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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물 (60/304)

속물

“내가 톱스타잖아. 해도 내가 먼저 해야지.”

아직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본인도 5월로 생각하고 있었다.

본가가 아닌 방계와 결혼하는 것도 서러운데, 식마저 늦춰야 했다.

“누군 시댁에서 반겨 준다는데….”

자신은 남자의 집에 가면 잔뜩 움츠리고 눈치 봐야 했다.

무시무시한 시어머니 될 분과 그에 견줄 수 있는 시누이까지 있었다.

“아오… 그런다고 내가 이제 와서 결혼을 무를 일도 아니고….”

이제 와 발끈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얼굴 보고 인사나 하자. 그래! 윤혜린. 네가 더 잘 살면 되는 거야. 임아현 고 계집애는 분명 나중에 이혼하고 말겠지. 난 행복하게 살 거야.”

다음 날. 윤혜린은 한껏 차려입고 더블 엔터로 향했다.

더블 엔터에서도 윤혜린의 등장에 문을 활짝 열어 줬고, 아현이 있다는 집무실까지 안내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안에는 방금 들어간 선객이 있다고 한다.

“잠시 기다리시면….”

“장 대리! 어디 갔어?”

“네에! 금방 가겠습니다.”

안내하던 직원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얼른 대답하고 말했다.

“금방 나오실 겁니다. 그때 들어가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이만. 지금 갑니다! 실장님!”

윤혜린은 후다닥 뛰어가는 더블 엔터 직원을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날 그냥 여기다 세워 놔? 하! 천하의 윤혜린이 여기까지 와서 이런 꼴을 당해야 해?”

기다려야 하나 그냥 들어가야 하나 고민하는데 살짝 열린 문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혜린은 살며시 문에 다가가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밖이 좀 시끄럽네요.”

“아휴. 새언니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지 말아요. 기획사가 바쁘게 움직이면 좋은 거죠.”

아현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고, 알 수 없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언니라고 불렀으면… 강수안 씨 동생?’

“호호. 수현 아가씨가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어요.”

“지난번에 상견례에서 저희가 실례를 한 것 같아서 왔어요.”

“실례요?”

“그 있잖아요. 호텔 얘기….”

“아! 고려 호텔 말이에요?”

“그땐 우리도 경황이 없어서 어머니에게 반발을 했는데… 새언니한테 좀 미안하더라고요.”

“아니에요. 충분히 이해해요.”

거대 계열사 중 하나인 고려 호텔을 아현에게 준다고 했으니, 자식들 입장에서 충분히 기함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현은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다.

“덕분에 오랜만에 집합해서 오빠한테 한 소리 들었어요.”

“수안 씨가 아가씨를 혼내요?”

“저만 혼나겠어요? 미국으로 돌아간 수진 언니는 물론이고 수용이도 마찬가지죠. 수안 오빠가 집안에선 회장님 다음이라니까요.”

“아… 수안 씨가 그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그보다 그땐 정말 미안했어요. 엄마가 선물한다는 고려 호텔은 우리도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어요. 이제 고려 호텔은 언니가 맡아 줘요.”

오늘 수현이 전격적으로 아현에게 와서 사과하는 이유는 수안에게 혼나서가 아니다.

미래에 뉴월드 백화점을 약속받고 그동안 받지 못한 용돈을 몰아 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이 받을 계열사가 확실해졌으니 고려 호텔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었다.

“…네?”

“그 자리에서 회장님도 듣고 계셨고, 실소유주인 어머니 입에서 나온 말이잖아요. 결혼하면 고려 호텔은 바로 언니 몫이에요.”

밖에서 듣고 있던 윤혜린의 동그란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떠졌다.

‘고, 고려 호텔을 아현에게 주겠다고?’

고려 호텔 그룹만 해도 규모가 엄청났다. 서울과 지방에 있는 호텔이 전부가 아니다. 콘도, 리조트와 스키장, 골프장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잠시 충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문을 열고 나오는 두 사람이 있었다.

“어머. 기다렸어?”

“아….”

“윤혜린 씨 아니세요? 지난번 드라마 잘 봤어요.”

수현의 인사에 윤혜린은 자신의 본업이 연기자였음에 감사했다.

“호호. 고맙습니다.”

덕분에 속은 쓰려도 완벽하게 감정을 숨기고 밝은 얼굴을 연기할 수 있었다.

“새언니. 이렇게 친구분도 오셨는데, 난 여기서 가 볼게요. 밑에 기사 있으니까 나올 필요 없어요.”

“미안해요. 아가씨. 조만간 집에 갈게요.”

“그럼 집에서 봐요. 윤혜린 씨 반가웠어요.”

“네에.”

아현의 시누이 되는 사람이 엘리베이터에서 모습을 감추는 순간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문이 닫히자마자 표정이 굳어졌다.

“오늘 올 줄은 몰랐네.”

생글거리는 아현을 보자니 억지로라도 다시 웃음을 지어야 했다.

“얼른 와야지. 호호. 잠깐 들어가서 얘기 좀 해.”

“어? 그래….”

방금 전까지 아현의 시누이가 앉았던 자리엔 흔해빠진 녹차 티백이 담긴 찻잔이 놓여 있었다.

‘내가… 이걸로 차를 내왔다가 얼마나 잔소리를 들었는데….’

주방 아줌마들이나 나눠 먹는 차를 내오는 사람이 어딨냐며 부모님 안부까지 물었던 예비 시누이였다.

“자리 치울게. 음료는 뭘로 줄까?”

아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선 직원이 물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일이 생겨서 자릴 비웠습니다. 이사님. 차는 뭘로 드릴까요?”

직원은 얼른 쟁반을 들고 들어와 남은 찻잔을 치우고 있었다.

아현이 돌아보자 혜린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커피.”

아현은 자연스럽게 주문했다.

“커피 두 잔. 내린 커피로. 설탕은 없이.”

“예. 이사님.”

직원이 나가고 아현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준비는 잘 돼가?”

“아직 멀었는데 뭐.”

“그래. 천천히 준비하면 되지. 딱히 준비랄 것도 없더라.”

“…없어?”

‘없긴 뭐가 없어. 해 오라는 것만 산더미인데….’

듣도 보도 못한 물건도 많았다. 가격은 왜 그렇게 비싼지, 지금까지 일하며 벌어온 돈을 다 쏟아부어야 혼수를 맞출 지경이다.

“그렇잖아. 어머님이 어차피 집에 내 몸만 들어가면 되는데 뭐가 더 필요하냐고 하셔서….”

“아…. 그래?”

‘얘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오늘따라 표정 관리가 정말 쉽지 않았다.

“아까 본의 아니게 들었는데. 호텔 뭐라고 하더라?”

“밖에도 들렸어? 별거 아니야.”

“아니긴… 아까 그 사람 네 시누이 맞지?”

“응. 수안 씨 둘째 여동생. 강수현이라고. 예쁘지?”

예쁘고 자시고 묻고 싶은 부분은 따로 있다.

“포기 어쩌고 하는 것 같던데?”

“수안 씨 어머니가 자기도 받았다고 하시면서 호텔을 넘긴다고 하시잖아. 재벌가에선 기업을 선물로 주고 그러나 봐.”

“…설마.”

“그러게. 나도 아직 안 믿겨져.”

혜린의 설마는 믿겨지고 안 믿겨지고의 설마가 아니라, 다른 재벌가에서 함부로 기업을 선물로 넘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형제끼리도 피 튀기는 암투가 빈번하게 이뤄지는 일인데, 쉽게 누군가에게 넘기고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럼 고려 호텔을 네가 갖는 거야?”

“당장은 아니고. 나 결혼해서 애 낳으면 주신다고….”

“어쨌든 준다는 거네. 더블 엔터에선 이사 달고, 고려 호텔은 사장?”

“아휴. 아니야.”

윤혜린은 손을 내저으며 웃는 아현의 얼굴이 심히 꼴 보기 싫었다.

얼른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네 예비 남편 체력은 짱짱하겠다? 단거리 선수였잖아.”

“운동은 여전히 열심이야. 나도 자기관리 철저하다고 생각하는데, 수안 씨는 더하더라고.”

“밤에도 단거리 선수는 아니겠지?”

이 부분이라도 이기고 싶었다.

“얘는 별 소릴 다해.”

“뭐 어때? 우리끼린데. 곧 결혼할 예비 신부끼리.”

아현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조그맣게 말했다.

“…장거리도 나름 잘.”

“아. 음.”

이제 뭘 갖고 이겨야 할지 다시 찾아야 했다.

“선수 출신이라 그런지. 체력은 또 왜 그렇게 좋니?”

“지난번 올림픽에서 보니까… 팔, 다리 근육도 빠방하더라.”

“속은 더….”

저도 모르게 말을 이어 가던 아현이 얼른 정신을 차렸다.

“아이고.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미안. 미안.”

“다 들었거든? 그리고 요즘 네가 강운 CF 도맡아 하더라? 이것도 신경 써주신 거지?”

“수안 씨가 그렇게 한 모양이더라고.”

“언제 만난 거야?”

“만난 지는 오래되지 않았고….”

이제 고작 한 달쯤 지났다고 얘기하긴 민망했다. 속물이라고 광고하는 꼴이다.

“기사에 대충 나갔을걸?”

“난 네가 연애한다는 얘기도 못 들었는데 결혼 기사부터 봤잖아.”

“워낙에 폐쇄적인 곳이라 기사들부터 다 막아 버리더라고.”

윤혜린은 괜히 왔다 싶었다. 뭐라도 하나 이기고 싶지만, 도저히 방법이 보이질 않는다.

“…뭐 필요한 거 없니? 앞으로 가족이 될 텐데, 뭐라도 선물하고 싶어서.”

“아냐. 선물은 무슨… 너야말로 필요한 거 없어?”

“됐어. 돈을 벌어도 내가 더 벌었지….”

아직 결혼 전이니 재력으로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너 차라도 한 대 사 줄까? 결혼하면 따로 타고 다닐 차도 필요하잖아.”

“차는 수안 씨가 벌써 사 줘서….”

“사 줬어? 뭔데?”

“…자기 차를 사면서 나도 같은 걸로 타고 다니라고….”

혜린은 벤츠 대형 세단을 선물 받았다는 말에 이마에 힘줄이 빠득 튀어나올 것 같았다.

“차는 필요 없겠네.”

‘적당한 중고 밴이나 사 주려고 했더니….’

“앞으로 활동하면서 쓸 차도 있어. 수안씨가 타던 밴인데, 새것 같더라고.”

“결혼해도 계속 일하려고? 시댁에서 허락하겠어?”

“괜찮다고 하시던데? 너무 심한 수준의 노출만 아니면… 작품 알아서 잘 선택해서 하라고….”

“…활동까지 허락받으셨다라고라….”

“너는 시댁에서 하지 말라고 해?”

“아… 응.”

결혼의 조건 중 하나였다. 이제 막 피어나는 톱 여배우의 커리어가 결혼으로 끝나 버리는 것이다.

“저런. 나도 처음엔 그럴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수안 씨가 집에 뭐라고 했는지 아버님도 허락하시더라고.”

“남편 능력 좋네. 배포도 크고….”

혜린은 남편 될 사람부터 연예계 활동에 부정적이었다.

“어차피 애 낳으면 활동하기 쉽지 않을걸?”

“그렇긴 하지.”

“애 낳고 돌아온 아줌마를 어디서 써 주겠니.”

“그래도 언제든 복귀할 수 있잖아. 나중에 별것 아닌 비중의 배역이라도 다시 일하고 싶어.”

“…넌 벌써 반쯤은 마음을 내려놓고 있니?”

“내가 혜린이 너처럼 톱급 배우도 아니잖아. 뭐든 배역만 따도 감지덕지야.”

“어휴. 됐다 얘. 너랑 얘기하면 나만 속물인 것 같아.”

배우라는 공통점이 깊은 곳에서 올라오던 화를 식혀 줬다.

아현이 배우로서 가진 마음은 진실했다.

결혼으로 어마어마한 시댁을 갖게 된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속물이라니. 그렇게 따지면 누군 아니겠어?”

“풋. 이제야 인정해?”

“내가 언제는 아니랬니? 나야말로 속물이지. 나 속물 맞아. 돈 보고 결혼하는 거야. 큭.”

“하하. 우리 잘 지내보자. 시댁에서 비빌 구석은 너밖에 없어.”

“우리 가끔 만나서 시댁 욕도 하고 살자.”

“큭. 그래. 자주 보자. 선물은 내가 생각해 볼게.”

“선물은 됐어. 가족 될 사람끼리 선물 주고받으면 거리감 느껴져.”

“말로는 못 당하겠네. 알았어. 바쁜 임 이사는 자리 지켜. 난 가 볼게.”

윤혜린이 나가고 아현은 스스로 속물이라고 말한 것이 잘했다 싶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수안 씨랑 결혼하면서 순수한 마음만 있다고 하긴 무리잖아.’

무겁게 가슴을 누르던 돌을 내려놓은 기분이다.

“선물은 벌써 받았어. 혜린아.”

아현은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살피기 시작했다.

* * *

혜린이 아현을 만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수안도 회사에서 방문객을 받았다.

“오랜만이다.”

“지훈 형. 하하. 얘긴 들었어. 결혼한다며?”

뉴월드 그룹의 하나 있는 아들 정지훈이다.

아버지 여동생의 아들. 수안에겐 고모의 아들인 사촌 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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