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린
동생들과 집에 돌아가자 어머니가 형제들을 불러 모으셨다.
“수안이랑 수진이 수현이 수용이도 다 들어와 봐.”
“예. 어머니.”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실지 뻔했다. 사전에 정리가 끝나 다행이었다.
“호텔은….”
어머니 말이 시작되기 전에 수진이 먼저 말했다.
“잘하셨어요. 새언니가 받으면 잘 운영할 거예요.”
“어… 그래?”
수현도 언니의 말을 거들었다.
“맞아요. 어차피 엄마도 전문 경영인이 운영하는 호텔에 가끔 주총이나 참여하잖아요. 새언니라고 못하겠어요?”
“수안아. 미리 얘기했니?”
아까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 같던 자식들의 태도가 이렇게 변화할 이유는 수안밖에 없었다.
“네. 동생들 의견이 약간 달라서 미리 조율했습니다. 심려 끼쳐 죄송합니다.”
“아휴. 그럼 그렇지. 너희가 왜 이렇게 늦나 했다. 수용이 넌?”
“형수님도 뭐 하나는 가져야죠. 그래야 집에서 고개를 드시지 않겠어요?”
“하여튼… 너희 우애가 좋아서 다행이다. 수안아, 잘했다.”
“동생들은 욕심이 없어서 그래요. 나중에 제가 살뜰하게 챙겨 줄게요. 어머니 걱정하시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어머니는 다른 재벌가에서 벌어지는 형제간 재산 다툼을 걱정했었다. 동생들에겐 말하지 못해도 수안에겐 미리 얘기하고 걱정을 나눴었다. 밖이 아니라 내부에서 비슷한 일을 겪은 어머니였다. 아버지가 강운 그룹을 물려받으며 큰아버지 댁과는 지금도 왕래가 뜸했다.
“그래. 그래야지. 아버지는 단호하신 것 같지만, 수안이 네가 챙겨 준다면 걱정이 없어.”
“동생들도 아버지 자식들이잖아요. 제가 말씀드리면 미리 챙겨 주실 거예요. 제가 그렇게 말씀드릴게요.”
“난 수안이만 믿을게.”
“예. 어머니.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동생들 허리 펴고 살게 할게요.”
* * *
수안의 집에서 일이 마무리되어 가는 동안 아현의 집은 믿을 수 없는 제안에 의견이 분분했다.
“호, 호텔을 내준다는 거잖아?”
아버지 말에 영수가 답했다.
“고려 호텔이라고 하셨죠. 고려 호텔이면 최고급 호텔의 대명사예요.”
“애 낳으면 주신다 하셨잖아요. 아직 멀었어요.”
“애만 낳으면 준다는 말이나 그냥 준다는 말이나 그게 그거지.”
“그렇긴 해요.”
결혼을 하면 당연히 애를 낳을 것 아닌가.
“아들이어야 하려나?”
“요즘 아들딸 구분이 어딨어?”
“그래도 아들이어야….”
“아빠. 엄마. 벌써부터 그러지 말자. 아직 나 결혼도 안 했거든요? 갖지도 않은 애 갖고 왜 그러세요?”
“…알았어. 얘는 괜히 열 내고 그래?”
“나 돈에 팔려 가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자꾸 그러지 마.”
아현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툭 떨어졌다. 아니라고 하지만 자꾸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수안에게 깊이 빠졌지만 그럴수록 자신과 수안을 비교하게 된다.
“얘는… 또 그런 생각이야?”
“강 서방이 너한테 얼마나 잘하냐. 우리도 아닌 거 뻔히 알아. 우리도 너 팔아서 한몫 잡겠다는 생각은 없어. 다 너 잘살라고 하는 말이야.”
“크흥… 알아요.”
“그나저나. 혼수는 그 집안에 맞춰야 할 텐데.”
재벌가에 맞는 혼수는 어느 정도 규모일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괜찮다 아니다 얘길 들었지만 그래도 뭔가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가 수안 씨랑 상의하면서 맞출게요. 집에서 뭐 준비할 생각 말아요.”
“돈은 충분하고?”
“요즘 CF가 많이 들어와서 충분할 거야. 아니라도 수안 씨가 알아서 한다고 했어요. 수안 씨 어머니가 하는 얘기도 들었잖아요. 아빠랑 엄마는 신경 안 써도 돼요.”
“어휴. 그 집 엄마는 무슨 복을 타고나서 그런 아들을 가졌는지…. 영수 너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야.”
“강 서방이 좀 잘났어야지. 아! 영수 너 들으라는 말은 아니다.”
“그 말은 안 붙이는 편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부모님 말에 날카롭게 답하는 영수였다.
“그래. 우리 아들이 어디가 못났어?”
“우리 아들도 잘났지. 어디 가서 빠지는 아들은 아닌데….”
“아닌데도 붙이지 말지?”
“흠흠… 알았다.”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 아들은 올림픽 금메달에 사법 고시를 단숨에 패스하고 기업까지 운영하고 있었고, 자신의 아들은 이제 겨우 대학을 졸업할 참이다. 군대를 다녀와서 휴학까지 했었으니 27의 나이에도 졸업을 하지 못했다. 지극히 평범한 아들이었다.
“나도 이번에 대학 졸업하면 바로 취직한다니까.”
“누가 뭐래니?”
“그래. 너는 너 살길 찾으면 그걸로 족해.”
“기대 좀 하시라고. 아들인 내가 부모님 모시지 딸이 모시나?”
“강 서방이 부족하지 않게 잘 모시겠다고 하던데?”
“그래. 넌 얼른 취직해서 신붓감이나 잘 찾아봐.”
“아 놔. 내가 아들이라고요. 매제가 아들이 아니고.”
수안을 만나고 나서는 부족해 보이기만 하는 아들이었다.
* * *
결혼식 날짜는 늦봄으로 잡혔고, 강운모 회장이 중국 출장에서 돌아오는 때에 맞춰 거행하기로 했다.
수안의 결혼 소식은 강운 그룹 비서실을 거쳐 연예 기사와 스포츠 기사, 경제면까지 동시에 올라갔다.
[신인배우 임아현, 강운가 장남 강수안과 결혼 임박설.]
[올림픽 스타 강수안 결혼 예정. 신부는 CF 스타 임아현!]
[강운 그룹 장남 더블 스타 강수안 부사장 결혼!]
배영성이 챙겨온 신문이 한가득이었다.
“어휴. 신문마다 난리네.”
“저도 이렇게 고루고루 다 나오는 결혼 소식은 처음입니다. 하하하.”
아현이 연예인이라 연예란에 기사가 나오는 것이 당연했고, 수안이 스포츠 스타이니 스포츠 기사란에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또한 수안이 소유한 회사가 있고, 지금 부사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니 경제란에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수안은 강운 그룹의 적장자였다. 언론의 반향도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사모님에게 인터뷰가 쇄도하고 있지만, 전부 거절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는 거절해도 정보는 충분히 주도록 해. 괜히 헛소리 나오지 않게.”
재벌가 스폰서 같은 소리가 나오면 아현뿐 아니라 수안 자신도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충분한 연애 기간을 갖고 결혼하고 있다는 식으로 비서실에서 정보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간의 상황은 나름 각색했습니다.”
스포츠 스타로서 일찍 아현을 만나 연애를 이어 갔다는 내용이었다.
재벌로서 여배우를 만났다는 스토리보다는 나았다.
“특히 강운가에서 아현을 반겼다는 정보를 줘. 그래야 엉뚱한 상상을 차단하지.”
“아이를 먼저 갖지 않으신 것은 천만다행입니다. 그랬다간 애 때문에 결혼했다는 얘기가 돌았을 겁니다.”
“애도 금방 가질 건데 뭘… 어쨌든, 기자들 단도리 잘해.”
“예. 부사장님.”
* * *
임아현과 강수안의 열애와 결혼 소식으로 뜨거운 와중에 황당한 표정으로 기사를 살피던 여배우도 있었다.
“…뭐야? 난 어쩌라고?”
보도되진 않았지만, 당대 톱스타인 여배우 윤혜린도 재벌가 인물과 열애 중이었다.
서로 결혼을 추진하는 단계에 돌입했기에 이제 기사를 내보내고 알리려던 차였다.
“게다가 강운 그룹이 말이 돼?”
자신은 강운이 아니라 그에 못 미치는 재벌가였음에도 있는 설움 없는 설움 다 겪어 가며 결혼을 준비했는데, 임아현은 강운의 축복까지 받으며 결혼을 준비하고 있단다.
“우아. 진짜 너무하네.”
기사 내용이 진실인지부터가 너무 궁금했다.
윤혜린은 매니저를 닦달해서 연락처부터 구하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감사합니다. 더블 엔터 지원팀입니다.
“뭐래?”
윤혜린은 전화기에서 귀를 떼고 봤다가 얼른 다시 말을 이었다.
“저 배우 윤혜린인데요. 임아현 씨 거기 있습니까?”
임아현과 윤혜린은 동갑내기였다. 친하진 않았지만, 얼굴은 알고 지내던 사이다.
-아. 윤혜린 씨였군요? 금방 임 이사님께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이사? 회사에서 직급을 달았어?’
전화가 연결되고 아현이 전화를 들었다.
-여보세요.
“아. 아현이니? 나 윤혜린이야.”
-아. 혜린 씨? 반가워요.
“존댓말은 무슨. 동갑끼리 편하게 하자.”
-어…. 그래도 되려나?
“결혼 기사 진짜야?”
-그렇게 됐어.
“기사대로 그쪽 집에서 반대가 없었고?”
-회장님이나 어머님이나 다 좋아해 주셔서… 수안 씨 형제들도 너무 잘해 주고….
“하!”
어처구니없게도 진실이었다.
“정말로 반대 하나 없이 결혼한다고?”
자신은 여기저기 난관이었다. 집안의 부족함도 다 까발려지고, 스스로의 부족함까지 거론되어야 했다. 내세울 것은 배우로서 유명한 자신의 커리어와 얼굴밖에 없었다. 남편 될 사람의 마음이 혜린에게 향한다는 것이 부족함을 채워 주고 있어 어찌어찌 결혼으로 흘러갔다.
-응. 수안 씨가 집에서 나름 믿음직한 아들이다 보니까, 부모님도 그렇고 형제들도 다 반겨 줬어.
“네 남편 될 사람이 선택하면 데려온 신붓감도 믿는다? 그 말이네.”
-…그런데 왜? 그냥 궁금했던 거야?
“나도 곧 결혼하는데… 비슷한 시기라서….”
-우아. 축하해.
“…축하한다는 인사가 오늘따라 굉장히 듣기 힘들다.”
-…….
아현은 축하한다는 말도 듣기 힘들다는 윤혜린의 말에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네 탓은 아니지… 나도 신랑 될 사람이 재벌가 사람이라 넌 어땠을까 궁금했어.”
-그래? 어디 누구야?
“말한다고 알지 모르겠네?”
‘그래 봐야 강운 그룹 장남한테는 못 비비지.’
-나야 잘 모르지만, 수안 씨는 알 거야.
“…뉴월드 그룹 정지훈 씨야.”
-아… 그분은 수안 씨 사촌 아닌가?
“…아마도 맞을걸?”
본가 장손과 결혼하는 아현에 비해 혜린은 방계라고 할 수 있는 뉴월드 유통그룹이었다.
이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강운가와 결혼할 생각이면 범 강운가 사람들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어머. 우리 친척이 되겠네?
“…그래서 연락했어. 넌 정확히 언제 결혼식이야?”
기사에도 정확한 날짜는 나오지 않았다.
-아마 5월 초쯤 되지 않을까 싶어. 그때 회장님이 출장에서 돌아오신다고 하셨거든.
“강 회장님?”
-맞아.
“난 그 뒤로 잡아야겠네.”
-나 때문에 미뤄지는 건 아냐? 미안해서 어쩌지? 난 생각도 못 했어.
“나도 강 회장님이 참석해야 해서, 어차피 그 뒤로 잡아야 해. 네 탓은 아니지.”
윤혜린은 벌써부터 아현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본가와 방계의 차이는 생각보다 더 깊고 넓었다.
“어쨌든 축하하고… 결혼식에는 나도 꼭 참석할게.”
-고마워.
“대신 너도 내 결혼식에 꼭 참석을… 아차! 당연히 하겠구나. 그땐 이미 결혼했을 테니까.”
-그렇겠네. 사촌 결혼식이니까 나도 수안 씨 따라서 가야지.
“결혼 전에 얼굴이나 보자. 내가 더블 엔터로 임 이사님 뵈러 가야지.”
-호호. 고마워. 요즘 밖에 함부로 나갈 수가 없어서….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함부로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아현은 전화를 내려놓고 포옥 한숨을 쉬었다.
“결국 얘도 재벌가와 결혼하는구나….”
수안에게 윤혜린을 거론하긴 했었지만, 진짜로 재벌가와 맺어질 줄은 몰랐다.
‘게다가 수안 씨 친척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