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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정리 (1) (57/304)

교통정리 (1)

“누나? 여보세요?”

-…야! 넌 전화하란 지가 언젠데 이제 전활 해?

수진의 말을 듣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수진에게 전화한 수용이다.

“내가 대학 생활에 좀 바빠서….”

-그걸 변명이라고 하고 있니?

“…미안.”

-하아. 너 회사 안 들어간다고 했다며!

“아예 안 들어간다는 건 아니고, 나중에 가겠다는 거지.”

-네가 가겠다고 해 놓고 그걸 미뤄?

“이때 아니면 언제 놀아 보겠어?”

-빠득.

수진의 이 가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누나. 딱 1년만 쉬고 회사로 들어갈게. 신입인 내가 1년 먼저 들어간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다고. 그리고 대학에서 사람도 좀 만나고 하면 회사에 가서도 직원들과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네가 왜 신입이야? 너 회장님 아들이잖아. 그리고 직원들하고 뭘 잘 지내? 넌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라고!!

“…벌써 얘기했잖아. 이제 와서 되돌리지도 못하는데 자꾸 지난 얘기하지 맙시다.”

-아오… 내가 이걸 그냥….

“얘기 끝? 나 그럼 끊어도 되나?”

-야! 넌 누나가 해외에서 타지 생활하는데 잘 지내는지도 안 물어보냐?

“아차. 괜찮지? 어차피 회사에서 보낸 직원들이 알아서 잘 챙겨 줄 거 아냐?”

-내가 말을 말자….

수진은 반쯤 포기하고 다른 얘기를 꺼냈다.

-너 오빠가 데려왔다는 여배우 알지?

“아. 형이 결혼한다고 한 여자? 얘긴 들어 봤어.”

-혹시라도 불편하게 만들지 말고, 잘해 줘.

“왜? 결혼 파토 내면 안 되나? 아버지도 결혼 파토 나면 형에게 실망하지 않을까?”

-넌 생각이 없냐? 아무런 배경도 없는 여자가 들어와야 오빠가 처가에 기대지 못할 거 아냐?

“오~ 잔머리 엄청 굴렸네?”

-…넌 그런 잔머리라도 좀 굴리지?

“오케이. 어쨌든 형수로 받아들이자 이거지?”

-결혼해서 집에 들어와도 절대로 함부로 대하지 마. 마냥 결혼 생활이 좋게 만들어 주란 말이야.

“이혼도 시키지 말자 이 말이네.”

-당연하지! 이혼하면 다시 재벌가 여식이 들어올 가능성 100%야!

“크흣. 좋아. 좋아. 나도 깍듯하게 형수님으로 대접할게.”

-그리고 어차피 1년 쉬기로 했으니 그동안 제발 사고 치지 말고 조용히 지내. 알았어?

“내가 뭐 사고만 치고 다녀? 지난번 사고는 말 그대로 사고였잖아.”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난 네가 무슨 사고를 칠까 맨날 전전긍긍이야.

“잔소리하고는… 어머니도 이렇게는 안 하겠다.”

-…수용아. 누나로서 다시 말하지만, 우리 좀 같이 살자. 응?

“나도 믿는 건 누나들밖에 없어. 그러니까 걱정 붙들어 매시고, 나만 믿어.”

-내년이면 나도 회사로 갈 테니까, 그때는 정말 같이 일 시작하는 거다. 알았지?

“콜. 내년에 보자고.”

-내년에 보긴 뭘 봐? 올해 오빠 결혼하기 전에 얼굴부터 봐야지.

“아… 그런가?”

-평소에 누나한테 관심 좀 갖고 상황 좀 파악하면서 살아. 주기적으로 연락 좀 해!

“쏘리. 가끔 연락할게.”

전화를 마친 수용은 남은 1년을 알차게 놀면서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흐흐흐. 이제 완전히 자유다.”

* * *

아현은 오랜만에 수안과 함께 다시 집으로 왔다.

“얼굴 좀 자주 보여 줘.”

“죄송해요. 어머님.”

이제 어머님 소리까지 자연스럽게 입에 담는 아현이다.

“아현은 매번 볼 때마다 이렇게 예쁘니. 보고 또 봐도 질리지가 않아.”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현을 대신해 수안이 나섰다.

“앞으로 어머니와 평생 같이 살 사람인데 질리면 쓰나. 질려도 정주고 예뻐해 주셔야지.”

“그런가?”

“수용이는?”

“내려오라고 했어.”

소파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자, 수용이 내려왔다.

“야. 너는 형수님이 오셨는데 재깍재깍 내려와야지 임마.”

“하하. 미안해 형. 와아….”

수안에게 인사했지만, 그다음 옆에 있는 아현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수용이었다.

“안녕하세요. 도련님. 임아현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강수용입니다.”

더듬거리며 인사하는 동생을 보고 수안이 놀렸다.

“너 여자 동기들하고 인사는 하고 사냐? 눈도 못 마주치고 피해 다니는 거 아냐?”

“공부만 하던 애들하고 비교가 되겠어? 형수님 정도 되는 여자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겠다.”

“당연하지 임마. 흐흐흐.”

아현을 칭찬하는 말을 듣고 수안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감사해요. 도련님.”

“아휴. 형님하고 형수 사이에 태어날 애들은 안 봐도 훤하네.”

“크흐흐. 나도 기대 중.”

연애를 하면서 더욱 얼굴이 활짝 핀 아현이다.

“그래서, 수안이 넌 아현이 집에 인사하고 왔어?”

“네. 지난주에 다녀왔어요.”

수안이 보채고 보채서 아현의 집에서 인사드리고 왔다.

재벌가 아들이라고 해서 살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수안의 실체는 평범한 젊은 청년의 모습이었다. 수안을 TV로만 봤던 아현의 부모님과 오빠는 실제로 만난 수안이 털털하고 구김 없어 보이자, 흔쾌히 교제를 축하하고 결혼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수안의 어머니도 얼른 결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이제 날짜만 잡으면 되겠네? 아현아. 괜찮겠어?”

“…네에.”

아현도 이미 수안을 깊이 받아들였다. 결혼은 당연히 오케이였다.

만나면 만날수록 수안에게 더 깊이 빠져들었고, 이제는 결혼을 하지 못하면 어쩌나 싶어 조급한 마음도 들었다.

“날짜 잡게 빨리 만나자. 그래야 올해 내에 식을 올리지.”

“예. 제가 가서 말씀드리고 집안끼리 만날 날을 잡을게요.”

아현은 강운모 회장의 위치를 생각해 자신의 말을 보탰다.

“회장님 괜찮으신 시간만 알려 주시면 저희 집에서 맞추겠습니다. 어머님.”

“아휴. 어쩜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한다니….”

“오늘은 아현 씨와 선산에 좀 다녀올게요.”

“아.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다녀오려고?”

“예. 손주 며느리 보여 드려야죠.”

“그래. 산길 조심하고.”

“길 잘 닦여 있는데 뭐.”

집에서 나온 수안은 아현과 차를 타고 가며 대화했다.

“산소 가서 인사만 드리고 오면 될 거야.”

“네….”

“무슨 걱정 있어?”

“결혼이라고 생각하니까… 이것저것 걱정이에요.”

보통 집안도 아니고, 국내 최고의 기업인 강운 그룹의 장남이었다. 막상 결혼을 진행한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앞선다.

“설마 집에서 혼수 해 오라고 할 것 같아? 혼수 해 오라면 하지 뭐. 아현이 돈이 없나? 없으면 말해. 내가 뒤로 챙겨 줄게.”

“…….”

“아버지 어머니를 포함해 내 형제들도 전부 반기는 결혼이야. 아현이 집으로 들어와도 걱정할 것 없어.”

“…네에.”

“그리고 내가 아현 옆에 있잖아. 강운이랑 상관없이 내가 당신을 놓지 않아. 그러니 앞날을 걱정하지 마. 난 언제나 당신의 버팀목이 될 거야.”

“수안 씨만 믿을게요.”

“믿어 줘서 고맙고, 더 믿어도 돼. 나 강운 없어도 당신 먹여 살릴 수 있어. 나 금메달 연금 받는 사람이야.”

“풋. 저도 당신과 태어날 우리 아이들까지 먹여 살릴 자신 있는데요?”

“흐흐. 막 기운이 나네. 혼수로 애부터 만들까?”

“어머! 그랬다간 어른들에게 책잡혀요.”

“하하하.”

수안은 아현과 진한 농담도 할 수 있는 지금이 꿈만 같았다.

* * *

강운모 회장의 일정에 맞춰 양가의 만남이 있었다.

아현의 부모님과 오빠는 먼저 한정식집 프라이빗 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수안 일행이 들어오자 일어나 반겼다.

“오셨습니까.”

“반갑습니다.”

아현의 아버지와 수안의 아버지 강 회장이 먼저 인사하고, 나머지도 인사를 나눴다.

아직은 어색한 사이라 대화가 오가는 것도 드문드문 이다.

수안의 모친이 먼저 본론인 결혼을 언급했다.

“아이들이 잘 만나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외부에서 먼저 알기 전에 준비했으면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올해 내에 했으면 어떨지 싶은데,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늦봄이나 여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귀댁에서 날짜를 잡아 주시면 그날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희야 일정에 맞추면 되니까요.”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아현의 집에서 날짜 잡는 것까지 양보했으니,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호텔 연회장에서 결혼을 진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마침 제가 소유한 곳이 있으니 어렵지 않겠습니다.”

수안의 출산 선물로 받았던 고려 호텔이다.

“결혼하면 아현도 호텔에 와서 일을 배우면 좋겠어요. 나중에 호텔 일도 잘할 것 같아요.”

“호텔이면 고려 호텔 말씀이십니까?”

“수안이 낳고 돌아가신 시아버지께서 선물로 주셨어요. 저도 며느리가 아이를 낳으면 물려줘야겠죠.”

“……!!”

옆에서 듣고 있던 수현이 깜짝 놀란다. 자신이 일을 배우고 있으니 자신에게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수진도 그 말을 듣고 참견했다.

“엄마. 벌써 거기까지 말씀하시는 건….”

“당연한 일이야. 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주셨으니 나도 며느리에게 물려줘야지.”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수안이 쐐기를 박았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수진과 수현은 양가가 만나는 자리라 더 언성을 높일 수도 없었다.

아버지도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으니 자신들이 지금 나서 봐야 안 좋은 인상만 남길 뿐이다.

그리고 수안의 말에 둘은 자신들의 예상이 맞았다고 확신했다.

‘오빠는… 단 하나도 포기하지 않을 거야. 호텔조차 동생들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어.’

“따님들도 참 잘 키우셨습니다. 아드님도 훌륭하시고요.”

“호호. 수안이만큼 정이 가는 아이들입니다. 우리 수안이 제가 낳아서 길렀지만, 정말 바르게 컸어요. 앞으로 처가에도 잘할 겁니다.”

“저희 딸 아현도 마음을 다해 예쁘게 키웠습니다. 사돈께서 잘 챙겨 주시리라 믿습니다.”

“물론입니다. 저희도 아현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애 아빠도 아현이 집에 오면 보내려고 하질 않으세요.”

“어허. 내가 언제 그랬다고….”

사실이 그랬기 때문에 반박하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저희가 살림이 변변치 않아 걱정이 많습니다.”

혼수 걱정임을 알 수 있었다.

“혼수까지 걱정하지 마세요. 식만 올리고 집에 들어와서 살면 되니까요. 큰돈 들어가지 않습니다.”

“부족한 살림이지만, 최대한 귀댁에 누가 되지 않도록 맞춰 보겠습니다.”

거듭된 걱정이다. 아무래도 집안에 차이가 있으니 걱정이 없을 수 없었다.

“수안아… 네가 알아서 잘할 수 있지?”

수안의 어머니는 입 아프게 더 얘기하지 않았다. 수안이 알아서 처가를 챙기길 바라는 것이다.

“제가 조율하겠습니다.”

아버지 강 회장도 거들었다.

“그래. 사돈 어르신 걱정하지 않게 네가 중간에서 잘 처리하면 된다.”

혼수를 바랄 일이었으면 애초에 재벌가 집안에서 며느리를 선택했어야 할 일이다.

수안에게 골라오라고 말한 때부터 결혼으로 뭔가를 얻을 거라는 기대도 내려놨다.

“예. 아버지.”

딱딱한 상견례 자리가 끝나고, 아현은 부모님과 함께 돌아갔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따로 돌아가시고, 동생들과 수안이 남았다.

수안은 이제 말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녀석들의 눈치가 심상치 않았다. 관계가 더 틀어지기 전에 바로잡아 줄 필요가 있었다.

고난과 성장도 좋지만, 형제간의 우애와 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너희는 나 좀 보자.”

수안의 말에 냉랭한 반응을 보이는 셋이다.

“하! 우리가 보이긴 했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우릴 불러?”

“호텔은 너무했어. 형. 거기서 감사하다고 대답하면 안 되지.”

수안도 이런 동생들의 불만을 익히 예상하고 있었다.

“일동 집합.”

수안의 조용한 말 한마디에 얼굴이 핏기가 가시는 셋이다.

오랜만에 들어 보는 집합 소리였다.

항상 순한 얼굴을 부모님께 보여 주는 수안이지만, 가끔 동생들에겐 무시무시한 오빠이자 형의 모습을 보여 줘왔다.

“오, 오빠. 왜 그래.”

“다들 자리에 앉는다. 실시.”

““실시!””

셋은 다시 상견례하던 자리에 앉았다.

“우리 교통정리 좀 해 보자.”

속으로 불만에 가득했지만, 교통정리라는 말에 반색하는 얼굴을 숨기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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