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
수현은 책상에 앉자마자 수화기를 들었다.
뚜우… 뚜우….
-하음… 여보세요….
이제 막 일어난 목소리로 수진이 전화를 받았다.
“언니. 나야 수현.”
-야아… 아침부터 뭐야. 시간이… 새벽이잖아?
시차로 인해 한국은 저녁이지만, 미국은 이제 막 새벽녘이다.
“빅 뉴스. 오빠가 어제 결혼하겠다고 여자를 데려왔어.”
-…뭐? 잠깐 기다려 봐.
우당탕 소리가 들리고 다시 전화기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설명해. 어느 집. 누구야?
“아무 집도 아님. 재벌가 자식이 아니야.”
-그럼?
“그냥 연예인. 배우라고 하는데 얼굴도 모르겠더라. 집안도 그냥 평범할 거야. 가난하다고 하는 편이 이해하기 쉽겠지?”
-뭐? 그 결혼이 가능이나 하겠어?
“벌써 허락도 받았어. 회장님도 어머니도. 어제 집에 다녀갔다고 해.”
-…정말이야?
“방금 고려 호텔로 오빠가 데려와서 직접 얼굴도 보고 왔어. 오빠는 좋아 죽더라.”
-하! 진짜 연예인과 결혼을 하겠다고?
“우리에겐 좋은 일이잖아. 결혼에 문제 안 생기게 조심해야 할 것 같아.”
-어…. 그럼 오빠가 얻을 수 있었던 힘의 축 하나가 사라지는 거네?
수현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는 수진이다.
“맞아. 이제 오빠는 처가 도움을 기대도 할 수 없어. 혹시라도 결혼하고 나서 이혼하지 않게 철저하게 챙겨 줘야 할 것 같아.”
-이혼했다간 힘 있는 처가가 새로 생기겠지.
“맞아. 언니. 다시 하면 그때는 재벌 처가댁이 생길 게 뻔한 일이지.”
-좋았어. 일이 술술 풀린다.
“이제 수용이 이 새끼만 말을 잘 들으면 좋겠는데….”
-하아. 썩을 놈. 네가 제대로 설득시켰다고 하지 않았어?
“했지! 했는데 갑자기 뒤통수를 치잖아!”
얼마 전 수용은 아버지에게 잠시 대학 생활을 하며 적응하겠다는 의사를 표했고, 급하지 않았던 강운모 회장은 대수롭지 않게 허락했다. 어차피 거는 기대도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수용이 회사에서 자리 잡길 바라던 수진과 수현은 닭 쫓던 개 신세였다.
-아직 오빠가 아버지께 약속한 외유 기간은 여전히 유효해. 그 안에 빨리 들어와서 녀석이 경영권을 잡아야 해.
“나도 아는데… 수용이 놈만 모른다니까.”
-내가 얘기해 볼 테니까. 막내에게 전해. 나한테 전화 좀 하라고! 얘는 지 누나가 미국에서 타향살이하는데 전화 한 번이 없어? 오빠도 일주일에 최소 두 번은 내 목소리 듣겠다면서 연락한다고!
“에효… 언니. 우리가 노선을 잘못 정한 건지도 몰라.”
항상 동생들을 챙기는 오빠를 생각하면 절로 그런 마음이 든다.
-…마음 약해지지 마. 항상 완벽한 오빠는 우리가 필요 없어. 오빠의 자비를 바라기엔 강운 그룹이 너무 크지 않니?
“알지….”
그 이유 때문에 수안 오빠가 아니라 막내인 수용을 선택해야 했다. 믿음직한 오빠지만, 부모님께도 믿음직해서 문제다. 아버지는 평소에도 큰오빠를 향한 신뢰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곤 했었다. 이대로 넋 놓고 있다가는 강운 그룹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결혼해 분가할 판이다.
-막내에게 내 말이나 똑바로 전해, 알았지?
“응. 언니.”
* * *
“수안 씨 동생까지 절 좋게 봐주실 줄은 생각도 못 했네요.”
‘저 시커먼 속마음이 보이지 않는가 보네.’
수안은 동생 수현의 생각을 뻔히 읽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난 처가 도움은 없어도 된단다. 동생아.’
국내 어떤 재벌가보다 많은 현금 유동성을 확보한 수안이다.
그것도 미국에 있는 달러. 향후 IMF 상황에서 사용할 총알이 지금도 계속 쌓이고 있었다.
수안은 동생의 재촉이 마냥 좋은 뜻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벌써부터 아현이 재벌가의 생리를 배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마 다른 동생들도 아현 씨를 반길 거야.”
“어쩜 이렇게 일이 술술 풀리죠?”
수안은 아현의 손을 보며 말했다.
“당신 손가락에 반지만 끼워져 있었으면 나도 술술 풀린다고 생각했을 거야.”
아현은 허전한 자신의 손을 다른 손으로 감쌌다.
자신의 결정이 남아 있었다.
“…우리 겨우 어제 만났거든요?”
그사이 여러 일들이 있어 오래전처럼 느껴지지만 둘은 어제 처음 만난 사이였다.
이미 한참 마음이 넘어가 버린 다음이지만, 그런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내일은 엊그제라고 할 건가? 다음 달엔 한 달 전, 내년엔 고작 1년 전이라고 할 거고?”
“…….”
“미안. 내가 너무 압박했지? 오늘 야경이 예쁘네.”
아현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수안의 옆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당신은… 확신해요? 우리가 행복할 거라고?”
수안은 확신에 찬 얼굴로 아현을 보며 말했다.
“당신은 날 사랑하게 되고 태어날 우리 아이를 사랑하게 될 거야. 행복은 그 뒤에 당연히 따라오겠지.”
수안의 반짝이는 눈은 오롯이 아현만 바라보고 있었다.
“…모, 못 당하겠네요. 집에서도 수안 씨가 너무 성급하지 않느냐고 야단이에요.”
“어른들께 말씀드렸어? 잘했네. 나 언제 갈까? 내일?”
“또 그런다. 제발 좀 천천히….”
“오케이. 난 그냥 기다리라 이거지?”
“…그래요. 기다려 줘요.”
“그럼 우리 마음 놓고 연애 한번 해 보자. 나 연애가 너무 궁금했어.”
“정말 연애 한 번도 못 했어요? 거짓말도 너무 과한 거짓말이 아닌가 싶은데요?”
연애를 못 해 봤다는 사람치고는 여자를 리드하는 그의 행동이 무척 대담했다.
“어린 나이에 88올림픽 육상 준비하면서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 대학 입시 준비도 마찬가지고, 사법 시험 준비하는 것도 그렇고. 또다시 올림픽 준비에 그다음은 내 회사 운영하느라 바빴지.”
“…수안 씨가 이룩한 성과는 정말 대단하죠.”
아현이 생각하기에도 그 많은 일을 하면서 연애할 시간이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 좋다고 따라다닌 팬들은 있었어도, 가깝게 지낸 팬은 없었어. 경호원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데, 누가 함부로 접근할까. 내가 높은 사람을 많이 만나 봐서 아현을 만나고 떨지 않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사실 속으로 떨고 있는데 숨기느라 용쓰고 있어.”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연애는 자신과 무관하다 여기고 있었기에 시도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
“풋. 정말 티도 안 나요.”
“어제도 말했지만, 떨리는 마음 숨기느라 고역이야.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고.”
‘나도 그런데….’
아현은 왠지 모를 동질감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그렸다.
수안은 그 미소만으로 충분했다.
“…당신 보고 있으면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네.”
“뭐예요?”
새침한 표정의 그녀도 마음에 들었다.
“흐흐.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수안이 손을 들자 이곳 테이블만 주시하던 호텔직원들이 식기를 세팅했다.
아현은 그제야 주변을 돌아보고 이상한 점을 느꼈다.
“수안 씨.”
“응?”
“호텔 레스토랑이 원래 이렇게 한산해요?”
“항상 붐비는 곳이지. 해외 바이어와 미팅도 자주 이뤄지는 곳이고.”
“그런데. 왜….”
이곳 테이블 외에 다른 테이블은 모두 비어 있었다.
레스토랑에 내부에 움직이는 사람들은 모두 정복을 입은 직원들이었다.
“오늘 미리 얘기해서 비웠어. 배우에게 스캔들은 쥐약이잖아.”
“와아… 레스토랑 전체를 빌렸어요?”
사실 그리 유명하지도 않아서 스캔들이 생길 일도 없었다.
아현은 기자들이 관심도 없을 수준의 연예인이었다.
‘…그래도 수안 씨랑 만난다고 하면 불을 켜고 달려들긴 하겠다.’
“고려 호텔이 어머니 소유야. 그리고 좀 전에 만났던 내 동생이 일하는 곳이고. 저녁 시간 비우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해.”
“……!”
그때 메인 셰프가 전채 요리와 메인디쉬까지 한꺼번에 내오고 있었다.
“도련님.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직원들이 자주 오가면 귀찮으실까 봐 요리는 한 번에 가져왔습니다.”
“잘하셨어요. 제 마음을 읽으셨네요?”
“하하하. 오늘 특별히 제가 솜씨를 부려 봤습니다.”
“어휴. 안 그래도 잘하시는 분이 특별하게 하셨으면… 벌써부터 침이 고이네요. 잘 먹을게요.”
“요리는 제 즐거움이죠.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피앙세도 즐겨 주시길 바랍니다.”
“아… 네.”
지금 수안의 앞에 앉아 있었고, 어제 결혼 허락까지 받은 사이였다.
피앙세가 아니라고 바로잡을 수 없었다.
“셰프님이 해외 오성급 호텔에서 일하던 분이라 입에 맞을 거야.”
“다음엔… 좀 더 편한 곳으로 가요.”
“그럴까?”
“수안 씨 수준에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 수준이라고 당신이랑 많이 다르지 않아.”
“그걸 누가 믿어요?”
살아온 환경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은 빌딩을 올려다보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수안은 언제나 높은 곳에서 빌딩을 내려다봤을 것이다.
‘오늘은 같은 위치에서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지만….’
수안은 전생을 말할 수 없었기에 변명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강운에서 태어나 서민들의 생활과는 거리가 먼 재벌가의 삶을 영위해 왔다.
“식기 전에 들어. 오늘 T본 스테이크가 제대로 됐어. 여기!”
수안은 직원을 불러 와인을 주문했고, 짙은 루비 빛의 레드 와인이 잔에 따라졌다.
“짠 할까?”
“네….”
“우리 행복한 결혼과 아이들을 위하여.”
“…….”
아현이 잔을 들고 가만히 실눈으로 노려보자 수안은 얼른 말을 바꿨다.
“우리 재미난 연애를 위하여!”
이것도 앞서 나가긴 했지만 더는 거절하지 못했다.
“…위하여.”
챙.
둘이 텅 빈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모습은 마치 호텔 홍보물의 한 장면 같았다.
“다음엔 여기와도 호텔 영업에 지장 주지 말고 다른 곳에서 보자.”
“어디요?”
“여기 룸을 잘 꾸며놨거든. 룸서비스로 먹으면 되지 않을까?”
“뭐요?”
호텔 룸으로 들어가자는 말은 결국 하나의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말이야.”
“흥. 하여간 남자들은 다 똑같아.”
“내가 남자지 그럼 여자야?”
수안은 당당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려 하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애는 뭐 그냥 생겨?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조용히 좀 해요. 직원들 다 듣겠네.”
“그럼 이따 조용한 곳에서 다시 얘기하는 걸로….”
“또 또 시작이다.”
기회만 줬다 하면 수안이 자꾸 앞서 나간다. 거침없이 직진이다.
“쳇. 그냥 슬쩍 넘어와….”
“어림 없어욧.”
아현은 쉽게 넘어갈 일은 없다고 다짐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다.
게다가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생각은 언젠가 넘어간다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벌써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니 이미 일은 성사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로맨틱한 분위기에 마음이 가는 남성이 앞에 있었다.
아현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둘째 여동생이 세 번째로 예쁘다고 했으면,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누구예요?”
“엇! 기억하고 있었어? 혹시… 이거 질투? 기뻐해야 하나?”
“말하기 싫으면 말아요.”
“집에 계신 어머니가 당연히 최고 미인이지. 그리고 둘째는 당신. 실망시켜서 미안한데? 하하.”
‘…윤혜린이라고 했으면 꼬집어 주려고 했는데.’
“첫째 여동생은 왜 없어요?”
“아. 음… 수진이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어.”
수안은 난감한 표정이었다.
“…네.”
“그래서 내가 더 마음이 쓰이는 녀석이지.”
“잘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