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합시다 (48/304)

합시다

“…….”

인사는 했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다음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그녀의 얼굴만 보게 된다.

“저, 저는… 배우 임아현입니다…. CF로 데뷔했고, TV 드라마는 장편 하나 단편 하나 정도….”

고요한 압박에 이기지 못한 임아현이 자신의 필모를 읊었다.

아현의 말에 수안도 정신을 차리고 준비해 온 질문을 던졌다.

“아아. 내가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라. 혹시 지금 사귀는 사람 있습니까?”

“네, 네? 없습… 니다.”

임아현도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주변 배우들을 통해 재벌가와 배우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고 있었다. 연결은 사귀고 결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저 밤을 보내기 위한 연결이었다.

“그럼 재벌가 스폰서에 연루된 적 있습니까?”

“전혀요!”

‘지금 연루되고 있네요.’

아현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다행이네요. 경쟁자가 없어서. 일찍 찾길 잘했습니다.”

“……!”

이젠 의심이고 뭐고 사실로 확정이다.

‘스폰서가 경쟁자면… 확실하지….’

“자. 임아현 씨는 선택지가 생겼습니다.”

“하! 선택지요?”

임아현의 목소리에 날이 서기 시작했다.

“선택 하나. 내 제안을 듣고 거절한 다음 그대로 돌아가 본래의 배우 생활을 한다. 여기에 아무런 보복이나 불이익은 없을 겁니다. 저는 제가 가진 힘을 이용해서 죄 없는 배우를 핍박하지 않습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전 국민에게 알려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입니다. 그리고 강운 그룹 장남이고요. 거짓 약속을 드리지 않습니다.”

“…강수안 님의 나머지 제안을 꼭 들어야 하나요?”

제안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보복을 하지 않는다고 하니 결심은 더욱 확고해진다.

“꼭. 들어 주셨으면 해요. 내 마음속에 여자는 당신뿐이거든요.”

“하아… 말씀하세요. 제 대답은 이미 정해진 것 같지만요.”

스폰서 요구가 분명했고, 임아현의 답은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

“선택 둘. 우리 집으로 가서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날짜 잡읍시다.”

예상했던 제안이 아니다.

“…네, 네?”

“지금 청혼하는 겁니다. 반지도 준비해 왔습니다.”

급하게 구하기 힘들었지만,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청혼 반지를 구해 왔다.

“부모님은 제 반려의 선택을 오롯이 제게 맡겨 주셨습니다. 난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받아 주십시오.”

수안은 잠깐 사이 옆에 다가와 한쪽 무릎까지 꿇고 반지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아… 어…. 이게 그러니까….”

갑작스러워도 너무 갑작스럽다. 그냥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재벌가. 그것도 현 재계 1순위의 강운이다. 강수안은 그런 강운 그룹의 장남이었다.

“…결혼하자고요? 오늘 처음… 지금 방금 봐 놓고 대뜸? 이보세요!!”

다시 단호한 태도를 되찾으려 하지만 한 번 말리면 두 번 말리기도 쉽다.

“나 모릅니까? 나도 당신을 알고 당신도 날 압니다. 자세한 부분은 차차 알아갑시다.”

“그,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걸 보세요… 당신을 위해 준비한 청혼 반지입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거대한 크기의 반짝이는 다이아 반지가 빛을 반사해 그녀의 눈을 어지럽혔다.

화려한 반짝임이 그녀의 눈을 잠시 몽롱하게 만들었다.

“약속합니다. 나 지금까지 다른 재벌가 자식들처럼 문란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겠어요.”

“자, 자꾸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그리고 강운에서 허락할 리도 없어요.”

“그건 오늘 가서 확인합시다.”

“네, 네?”

“집에서 허락하면 나랑 결혼하는 겁니다. 오케이?”

“아, 아니. 그게….”

“김 사장. 밑에 차 대기시켜요.”

“예. 실장님!”

애초에 선택지를 준다고 한 것부터가 수안의 페이크였다.

아현은 화끈하게 일을 진행하는 수안의 추진력에 어어 하면서 끌려다녔다.

.

.

.

촤라락.

커튼이 열렸다. 그리고 예쁘게 차려입은 아현이 나타났다.

“우아. 정말…. 이야… 브라보!”

짝짝짝짝.

혼자서 손뼉을 치며 웃는 수안이다.

수안이 고른 옷을 입고 나온 아현의 모습에 수안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훗.”

입을 크게 벌리고 얼이 빠져 버린 수안의 모습은 나름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아현 씨는…. 함부로 웃지 말기로 합시다. 내 마음을 어디까지 가져가려고 그래요?”

“후흣. 자꾸 웃기시잖아요.”

“화장도 은은하게 잘됐고. 날개옷도 딱입니다. 선녀님. 이제 갑시다.”

“…진짜 회장님댁으로 갈 거예요?”

“그럼 내가 농담한 것처럼 보입니까? 지금까지 당신에게 한 번도 거짓말하지 않았어요.”

“정말. 나랑 결혼하고 싶어요?”

“네. 진심입니다. 당신과 결혼해서 우리 아이들을 낳고 평생 함께 살 겁니다.”

“…뭐. 제 젊은 날 인생에 즐거운 추억으로 남겨두죠.”

아현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래도 재벌가 남성과의 재미난 에피소드로 기억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안에게 끌려다니는 것도 나름 재미는 있었다. 언제 이런 경험을 해 볼 수 있을까 싶었다.

“누가 이렇게 완벽한 당신을 거절할까요?”

“강운 그룹이죠. 당신 부모님이요.”

“벌써 호칭이 당신까지 왔습니까? 저도 여보라고 불러도 될까요?”

“…아뇨. 자꾸 이럴 거예요?”

“그럼, 부모님이 허락하면 바로 여보 당신입니다.”

“그럴 리 없어요.”

“재벌가가 생각보다 꽉 막히지 않았어요. 통쾌하고 시원한 분들이니 아현 씨도 좋아질 거예요.”

싫다. 안 된다. 돌아가면 안 되냐.

아무리 거절해도 모두 소용없었다. 수안에게 끌려다니다가 이젠 무시무시한 재벌가 회장님댁까지 가야 했다.

‘…아들 한정이겠죠. 난 뺨 맞을 각오까지 해야 한다고요.’

* * *

“어머니 저 왔습니다. 아버지 계시죠?”

“아버지는 오늘 계신데… 아들 뒤에 누구?”

“제 신붓감이요.”

“……!!!!”

“제가 골라서 데려오라면서요.”

“야! 그게 어제 아침 일인데 오늘 저녁에 데려와? 말이 되는 소리니?”

수안은 어머니 호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현을 인사시켰다.

“아현 씨 인사드려. 어머님.”

아현은 사뭇 긴장되는 마음에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다가 얼른 허리를 접어 인사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임아현입니다.”

아현이 고개를 들자 거실이 환하게 밝혀졌다.

어머니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며 아현의 얼굴을 가득 담았다.

“어머, 어머…. 어머머….”

수안이 아현에게 입힌 옷은 한복이다. 가장 한국적이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가졌다고 평가되던 그녀다. 게다가 풋풋한 리즈 시절의 그녀가 한복을 입고 있으니 어머니 눈이 번쩍 뜨이지 않을 수 없었다. 훗날 나이가 들어도 국내에서 한복을 가장 잘 우아하게 소화한다고 평가될 그녀였다.

덥석.

어머니 손이 아현의 손을 잡았다.

“왜 이제 왔어. 얼마나 기다렸다고.”

“……!!”

자신을 꾸준히 괴롭히던 지독한 악몽을 단번에 불식시킬 최종 병기 며느리가 등장했다.

* * *

“거실에서 기다릴게요. 아버지 모셔와 주세요.”

“아현 씨는 기다려봐. 내가 회장님께 금방 다녀올게. 여기 차 네 잔 가져다줘요. 아줌마.”

수안은 아현을 소파에 앉히고 귓속말을 했다.

“어머니는 통과. 우리 결혼까지 벌써 반절 왔음.”

“……!!!”

‘…뭐 이런 집이 다 있어?’

이러다 결혼하게 생겼다.

.

.

.

“나와 보세요. 여보.”

“왜?”

“수안이가….”

“수안이가 뭐?”

“…신붓감을 데려왔어요.”

“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여름도 아닌데 더위 먹었어?”

“지금 밖에… 수안이가 제 신붓감이라고 여자를 데려왔다고요!”

“……!!”

놀람도 잠시다.

“이놈이… 비서실도 모르게 잘도 숨겨 놨구나.”

어제 허락했는데 오늘 데려왔으니 당연한 의심이다.

“어쨌든. 가 봐요.”

.

.

.

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내자 수안과 아현이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임아현입니다.”

“…….”

만개한 꽃처럼 미모가 절정에 달한다는 스물다섯.

게다가 배우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미모를 자랑하는 임아현이다.

처음 실물을 영접하면 말문을 잃게 되는 마법을 누구에게든 공평하게 선사한다.

그리고 스물넷의 수안보다 한 살 많은 나이였지만 수안에겐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어… 그래.”

버럭 화를 낼 생각이었지만, 비현실적인 외모에 화를 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둘이 서 있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앉자.”

“예. 감사합니다.”

조신한 한복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자태도 아줌마가 내온 차를 들어 올려 입술을 적시는 모습도 우아함의 극치였다. 차를 내주고 엉덩이를 빼던 아주머니도 아현의 외모에 잠시 몸이 굳어 있다가 발을 헛디뎠다.

“에구머니. 죄송합니다.”

아줌마 눈엔 아현이 재벌가의 주인 같고, 앉아 있던 나머지가 집에서 찾아온 손님으로 보이고 있었다.

‘어쩜. 어쩜….’

아버지는 아현을 보다가 옆에 앉은 아내를 보고 흠칫 놀랐다.

극명한 대비 효과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수안이 고요한 거실에 파문을 던졌다.

“제가 청혼한 여인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저희 결혼 허락해 주십시오.”

“…언제부터냐.”

언제부터 자신과 비서실을 속이고 만나왔냐는 뜻이었지만, 수안은 속인 일이 없으니 질문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언제부터 만났냐고? 그래서 지금까지 다 뺀찌를 놨던 거야? 어제도 되도 않는 소리로 애비 복장을 뒤집어 놓고?”

“…오늘 처음 만났는데요?”

“뭐 임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조용히 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함부로 끼어들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회장님.”

“아현이라고 했던가? 그래 저 녀석이 딱 잡아떼니 자네가 말해 보게. 언제부터 수안이를 만나왔나?”

혹시 아이라도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었다.

지금까지 요리조리 빠져나가던 녀석이 이렇게 급하게 여자를 데려올 이유를 고민해 봤지만, 아이 외에는 의심 가는 일이 없었다.

“…직접 뵌 것은 오늘이 처음 맞습니다.”

“뭐,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미리 입이라도 맞췄어?”

“오늘 강수안 님을 처음 뵈었는데, 그 자리에서 청혼을 하시고 집에서 허락하면 바로 결혼하자고 강권하셔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가 함부로 따르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거절이 어려워 여기까지 왔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회장님.”

창백한 얼굴에 긴장한 표정. 몸을 떨기는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강운모 회장의 이마에 핏대가 올라왔다.

“강수아아아안….”

“옙!”

“결혼이 애들 장난이야? 요즘이 어떤 시댄데 오늘 처음 보고 애를 납치해 와?! 정신이 있어 없어!”

지금까지 아들이 신붓감을 고르면서 보여 준 엉뚱한 행동을 생각하면 이런 일도 발생할 수 있었다.

“오늘 처음 본 것은 맞지만, 납치까지는 아니었어요. 그렇지 않아? 아현 씨?”

“…비슷했죠.”

납치나 다를 바 없었다.

‘납치 맞잖아요. 확실히 납치죠.’

원하던 답은 아니지만 수안은 상관없었다.

“그래도 아버지 어머니가 허락만 해 주시면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저 장가가게 허락 좀 해 주십시오.”

“이놈이 그래도!!”

아버지의 호통 속에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왔다.

“전 찬성이요.”

<『재벌가에 끼어들었다』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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