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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그리던 그녀 (47/304)

꿈에 그리던 그녀

회사로 돌아온 수안은 김현성 사장에게 플랜 B로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작은 통신사로 알아보겠습니다.”

“우선은 작은 통신사로 시작하고 나중에 큰 건수가 있을 거야.”

“예. 실장님.”

답하는 김현성 사장은 작은 통신사 인수가 그렇게 어려울 줄 알지 못했다.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

.

.

수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퇴근하고 아침에 일어나 조깅을 위해 밖으로 나섰다.

매일 아침마다 이어지는 상쾌한 조깅이다. 수안은 평소대로 달리다가 경호원들의 제지를 받았다.

“잠시만요. 도련님. 기다려 주십시오.”

“뭔데?”

“가시는 길에 사람이 있어서 확인 중입니다.”

“에헤이.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막 확인하면 쓰나.”

“…덩치 큰 두 사람이 차량 안에 대기 중이었습니다. 차에서 나오지 않아 잠시 대치 중입니다.”

“…누군지 알아 와. 나도 얼굴 좀 보자.”

“예.”

잠시 후 경호원이 돌아와 알아낸 정보를 읊었다.

“형사라고 합니다.”

“형사?”

“도련님과는 무관합니다. 가시는 길에 있던 공중전화를 주시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

공중전화라고 하니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자신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았다.

“가서 인사라도 해야겠네.”

“그냥 가셔도 될 텐데….”

“형사님 잠복근무하는데 괜히 우리가 방해했잖아. 사과는 해야지.”

수안은 오래된 국산 중형차 곁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공무로 바쁘셨을 텐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강수안입니다.”

“아! 강 선수. 동대문 서에 박형묵 형사입니다. 여기가 강수안 선수가 다니는 길인 줄 몰랐네요.”

“하하. 저희 직원들도 형사님들이 잠복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 살인범 잡으셨던 형사님 맞으시죠?”

“아이쿠. 그것도 기억하십니까? 신문에 조그맣게 나왔었는데.”

“두 얼굴의 살인자라고 해서 나름 관심 있게 봤던 기사였죠. 그나저나 형사님들 잠복을 방해해서 어쩌죠? 저희 때문에 범인 놓치는 거 아닙니까?”

“범인은 아니고… 제보자를 찾으려고 했던 잠복입니다. 괜찮습니다.”

“제보자요?”

“사건이 발생하기도 전에 제보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무래도 해당 범죄와 관련이 있지 않은 이상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잡은 다음 취조하려고 했습니다. 제보자가 여기 공중전화를 주로 이용하더군요.”

“관련이 없을 수가 없겠지요. 누가 범죄를 사전에 알 수 있겠습니까?”

“저희도 비슷한 생각이긴 한데, 정체를 모르니… 서에서는 잡지 말라고 난리입니다. 덕분에 강력 사건 여럿 해결했다고….”

“어쨌든 직원들이 크게 잘못했네요. 성의 표시라도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죠.”

수안은 경호원 하나에게 눈짓을 했고, 경호원은 얼른 봉투를 준비했다. 수안은 경호원이 박형묵 형사 뒤에 있던 다른 형사에게 봉투를 찔러 넣는 것을 보며 말했다.

“가서 식사라도 맛있게 드십시오.”

“아이쿠. 별일 아닌데 미안해서리….”

곁눈질로 상황을 다 지켜본 박 형사다.

“꼭 잡으시길 바랍니다. 수고하십시오.”

“들어가십쇼.”

수안은 다시 운동을 이어 갔다.

조깅을 하는 와중에도 수안의 상념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 여기선 그만해야겠네.’

그간 수안이 알고 있던 여러 사건 사고에 대해서 공중전화로 제보해 왔다.

덕분에 화성 연쇄살인범은 1차 살인 범죄를 일으키고 형사들에게 잡혔고, 여죄인 강간 사건들까지 드러나 오랜 복역을 이어 가고 있었다.

박형묵 형사가 바로 화성 살인범 이춘재를 잡은 형사였다.

지존파도 본격적인 살인을 저지르기 전, 그러니까 그들의 범죄 아지트가 완공되기도 전에 모조리 체포되었다. 이것도 누군가의 결정적인 제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은 첫 살인 후 자신들의 패거리에서 빠져나가려는 동료를 죽인 일까지 상세하게 제보한 제보자가 있었기에 경찰은 손쉽게 모두를 체포할 수 있었다. 초기 살인이 발생하기도 전에 제보하게 되면 너무 낮은 형량으로 다시 사회에 범죄자를 풀어 놔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외에도 미제로 남았던 살인 사건들도 사전 제보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할 수 있었고, 어린이 납치 살인 사건의 경우에도 납치 은신처를 사전에 제보한 제보자에 의해 납치 사건으로 끝날 수 있었다.

향후 영화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는 사건이었기에 그 영화는 이제 나올 수 없었다.

고작 미래에 흥행할 영화 때문에 어린 생명을 잃게 할 수는 없었다.

박 형사는 자신 외에도 다른 사건들도 누군가의 제보에 의해 사건을 해결했다는 것을 알게 되며, 제보자를 추적하다 공통된 공중전화를 찾아낸 것이다.

박 형사는 마침 서울로 발령받으며 제보자를 찾으려 잠복근무에 돌입해 있었지만, 수안이 알게 되었으니 이제 제보자가 나타날 일은 없었다.

‘엄한 사람 잡아 가기 전에 공중전화나 없애버리라고 해야겠다.’

공중전화 위치를 옮기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 * *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수안을 아버지 서재로 불러들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수안을 앉혀 놓고 서류 하나를 앞에 두고 있었다.

“네가 만나 볼 아이 비서실에서 겨우 찾아 놨다.”

“그래. 이번엔 저번처럼 그렇게 벌떡 일어나서 나오면 안 돼. 알았지?”

아버지와 어머니 말에 수안은 한발 더 나아갔다.

“프로필은 볼 필요도 없습니다.”

“뭐 임마!”

아버지의 불호령에 수안은 얼른 뒷말을 이었다.

“안 만나겠다는 말이 아니라요. 그냥 바로 약혼식부터 하죠. 그 여자로 선택할게요.”

“…뭐?”

이번엔 어머니였다.

“어련히 알아서 잘 고르셨겠죠. 저도 이제 졸업도 했는데 언제까지 혼자 살아요. 빨리 결혼해서 손주 안겨 드리고 싶어요. 날짜부터 잡죠. 양가 상견례는 언제 할까요?”

부모님이 고른 여자다. 이젠 좋고 싫고 따지고 싶지 않았다. 폭탄은 전에 골라냈으니 더 고르느라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적당한 수준, 평범하기만 해도 자신이 얼마든지 맞춰서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생에 결혼을 해 보지 못해서 할 수 있는 생각이다.

“…….”

“…….”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어머니 입이 열렸다.

“…여보. 이 집 여식하고 우리 수안이 결혼시킬 생각 있어요?”

“음….”

만나 보라는 말이지 당장 결혼하라는 얘긴 아니었다.

수안이 당장 결혼한다고 하니 괜히 부족하게만 느껴지고, 잘못된 선택이라는 의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그리고 자꾸만 자신의 선택을 부정하게 만드는 아들에 괘씸한 마음이 들고 있었다.

“마땅치 않아요?”

스르륵.

아버지는 말없이 프로필이 들어 있는 서류를 옆으로 밀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수안이 오히려 당황했다.

“왜, 왜요? 그냥 한다니까요? 만나 보면 되잖아요. 만나고 오케이 하면 되지.”

수안은 아버지가 치운 서류에 손을 가져갔지만, 아버지는 수안의 손을 밀어내며 말했다.

“됐어, 임마! 네가 골라와!”

“여보.”

“아버지!”

어머니와 수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대로 밀고 나갔다.

“어디 네놈이 골라온 신붓감은 얼마나 잘났나 보자.”

“저보고…. 골라오라고요?”

“그래! 네가 데려와 봐.”

수안은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캄캄했다.

“조건부터 말씀해 주세요. 맞춰 볼게요.”

조건이라도 알아야 아버지 기준에 맞출 수 있지 않겠나 싶었다.

“조건은 무슨 조건! 강운이 조건 봐가면서 며느리 골라야 할 만큼 부족해? 다 필요 없어!”

강 회장도 참을 만큼 참았다.

“…외모 상관없어요? 집안도 상관없고? 제가 밖에서 여자 고르면 재벌가 여식은 물 건너가잖아요. 재벌가 여자애들은 몇몇 얼굴만 알지 친분도 없다고요.”

“참하고 싹싹한 애면 충분하다. 재벌가 여식 아니어도 상관없어. 못 배웠으면 가르치면 되고, 없이 살았으면 채워 주면 된다.”

“아이고… 제가 누굴 만나 본 적이 있어야….”

기준이 확 내려갔지만, 수안이 여자를 만나 본 적 없어 여전히 막막하기만 했다.

“너도 고생 좀 해 봐! 어디 네가 골라온 여자는 얼마나 잘났나 두고 보자!”

어머니는 수안과 쫓겨나듯 서재에서 나와 한마디 했다.

“아들. 아버지가 저렇게 나오시면 나도 방법 없어. 아들이 잘 골라올 거라 믿을게.”

“…에효. 어머니….”

수안이 한숨을 쉬고 밖으로 나왔는데, 거실 TV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

수안의 뇌리에 번쩍 스쳐 가는 추억. 그 안에 아름다운 기억으로 존재하던 얼굴이다.

‘임아현. 내 유일한 로망.’

전생에 정금용으로 인생에 치이며 살았지만, 임아현은 그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우아한 자태와 고풍스러운 말투.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고급스러운 그녀였다.

자신의 비루한 삶에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사람이었고, 비교할 거리도 아니었다.

팬이랄 것도 없었다. 그저 CF와 TV, 영화를 통해 얼굴을 익힌 것이 전부였다.

‘…지금의 나라면 당신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과거의 금용과 지금의 수안은 다른 사람이다.

지금은 얼마든지 연결될 수 있었다.

‘바로 당신이야… 당신을 만나려고 일이 이렇게 된 걸지도….’

“…잘 찾아볼게요. 어머니.”

“제발 인물 좀 보고… 알았지?”

“저 눈 높아요.”

“높기는… 네가 고른 애들만 생각하면 아직도….”

일전에 수안이 고른 여식들의 얼굴이 가끔 꿈에 나오곤 했다.

넙데데한 얼굴로 “어머님~ 식사 준비할까요~”라고 말하며 다가오면 소스라치게 놀라 깨곤 했다. 그런 악몽이 현실로 실현되는 것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혹시라도 그런 여자를 데려오면 본인 선에서 거절할 생각이다.

수안은 방으로 돌아가 바로 전화를 넣었다.

“김 사장님?”

-예. 강 실장님. 더블 엔터 김기수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배우 임아현. 내일 회사로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임아현이 누구더라….

지금은 제대로 된 필모를 만들지 못한 임아현이었다.

친절한 영애 씨와 의녀 장금은 아직 시나리오가 만들어지지도 않은 때다.

김기수 사장이 모를 수도 있었다.

“초콜릿 광고로 뜨고 재작년에 신인 연기상도 받았는데 몰라요?”

-아. 기억납니다. 와꾸가 신선했죠. 영입할까요?

“영입은 아니고… 최대한 정중하게 내일 미팅 요청하세요. 회사로 데려오면 제가 직접 갑니다.”

‘영입이 아니면… 나머지는 하나밖에 없지.’

-…알겠습니다. 임아현 배우 소속사에 제가 연락하겠습니다. 틀림없이 성사시키겠습니다.

“그럼 내일 봅시다.”

* * *

수안은 떨리는 마음을 안고 더블 엔터로 향했다.

김 사장이 성공했다는 연락을 줬기 때문이다.

“오셨습니까?”

“임 배우는 안에 있습니까?”

“안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매니저는 제가 자리를 피해 달라고 했습니다.”

“잘했습니다.”

김기수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강 실장님도 남자는 남자였어. 그것도 상남자. 흐흐흐.’

“혼자 들어가시겠습니까?”

“그게 좋겠네요. 김 사장은 대기하고 있어요.”

“예. 실장님. 아무도 접근 못 하게 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흐흐흐.’

똑똑.

미팅 룸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그녀가 노크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고,

수안은 놀란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여, 역시… 그녀야. 그것도 치명적인 매력에 젊음까지… 완벽한 리즈 시절의 그녀….’

앞으로 시간이 흘러도 연일 리즈를 경신할 그녀 되시겠다.

밝은 조명도 그녀의 화사함에 빛을 잃은 것 같았다.

수안의 눈엔 오로지 그녀만 가득해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강수안입니다.”

수안은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고 태연함을 가장해 인사했다.

‘꿈에 그리던 그녀가 내 눈앞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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