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소문
수안은 집에 가서 어머니와 아버지께 수용의 상태를 말하고 간단하게 짐을 싸서 다시 병원으로 간다고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차를 사 줘서 이 사달이 났네요.”
“…적당히 몰았으면 될 일인데.”
“아녜요. 수용이가 그런 차를 사면 당연히 그랬을 거라고 예상해야 했어요. 어쨌든, 큰 이상은 없다니까 하루만 같이 있어 보고 괜찮으면 혼자 있으라고 할게요.”
“네가 잘 보살펴 줘.”
“예. 아버지. 걱정 말고 집에 계세요. 어머니도 마음 놓으세요.”
“그래.”
수안이 병원으로 향하고, 어머니는 절로 푸근한 마음이 들었다.
“수안이가 괜히 맏이가 아니네요.”
“…뭐 이런 일을 갖고 그래? 들어가.”
강 회장도 말만 그렇게 했지 속으로는 믿음직한 맏아들 덕분에 마음이 든든했다.
이번만큼은 수진과 수현도 불만을 토로할 수 없었다.
‘…진짜 오빠는 못 이긴다. 못 이겨.’
‘오빠는 여기저기서 점수를 다 따고 있는데. 우린 어쩌냐고.’
.
.
.
병실에 도착하니 수용은 거대한 VIP 입원실을 차지하고 곯아떨어져 있었다.
‘약이 세긴 했나 보네.’
잠들어 있는 수용을 깨우지 않도록 조용히 발소리를 죽여 병실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원장님이나 보고 갈까? 오늘 계시긴 하려나?”
수안이 병원장실로 가서 물어보니 마침 안에 계신단다.
똑똑.
“다 저녁에 집에도 안 가시고 병원에서 뭐 하세요?”
“하하하. 이거 수안이 아냐.”
예전 수안을 가르치던 김일곤은 강운 병원 부원장을 거쳐 지금은 병원장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었다. 수안은 어느새 나이 들어 버린 일곤의 모습에 너무 오랜만에 왔구나 싶었다.
“병원장이면 이런 명절에 쉴 수 있지 않아요?”
“쉴 수야 있지만, 집이 가까워서 말이지.”
“그럼 집에 갔다가 나오셨어요? 뭐 하러 그래요. 집에서 손주들 재롱도 보고 하셔야지.”
“다들 시댁 간다고 갔어. 집에 마누라밖에 없는데 같이 있으면 마누라가 밥 차려야 한다고 귀찮다네.”
“아….”
“내가 자식은 딸밖에 없잖아. 수안이 같은 아들만 있어도 딱인데 말이야.”
“그럼 나처럼 아들 같은 사위를 들이셨어야죠. 내가 이렇게 있는데 나한테는 소개도 안 시켜 주고 그냥 막 시집을 보내요?”
“푸흐흐. 그러게 내가 너무 성급했다.”
서로 농담임을 알고 하는 말이다. 일곤의 딸들은 수안보다 한참은 연상이었다.
“차나 한잔 줘 봐요.”
“얼른 내 오마.”
하늘 같은 스승보고 하라는 말은 아니었다.
“시킬 사람 없어요? 왜 일어나셔요?”
“명절에 일하는 것도 서러운데 차 심부름 시키면 좋아하겠어?”
“아이고. 성인군자 나셨네.”
“기다려 임마. 내가 아무나 차를 타 주는 줄 알아?”
“네에. 스승님.”
일곤은 희색이 만연해서 차를 타 왔고, 수안도 미소를 머금고 차를 받았다.
“어휴. 이 비싼 티백 녹차를 다 주시고….”
“…이것밖에 없더라.”
“제가 하나 사다 드릴게요. ”
“그럼 좋고. 그런데 수용이는 무슨 일이야? 교통사고 크게 났어?”
“벌써 원장님 귀에도 들어갔어요?”
“강운 로열패밀리 일인데 당연히 보고가 들어오지.”
“우리 스승님 얼굴도 안 보고 갔으면 큰일 날 뻔했네.”
“당연하지 임마. 넌 나 안 보고 갔으면 예의도 모르는 놈이 되는 거야. 하하하.”
“수용이 대학 합격기념으로 차 한 대 사 줬더니 몰고 나가서 거하게 해 먹었대요.”
“아이쿠. 그 어린 녀석이 벌써 대학 갈 때가 됐었나?”
김일곤의 기억에서 수용은 수안을 형아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던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수염이 거뭇하게 자란지가 언젠데요.”
“푸흐흐. 그래도 크게 안 다쳐서 다행이야. 내일 아프긴 하겠지만.”
“만나는 의사마다 내일 아침에 아프다고 하시니… 동생 놈이 내일 고생 좀 하겠는데요?”
“그나마 차가 좋아서 그 정도겠지. 다른 사람은 안 다쳤고?”
“집에서 얘기 들어 보니까 혼자서 박았대요.”
“운전 미숙이네.”
“크크. 맞아요. 분명 혼자 지랄 발광을 떨었겠죠. 면허 따고 한 달도 안 지난 놈이… 에효.”
수안은 일곤과 근황에 대해서 한참 노가리를 까며, 티백 차를 몇 번이고 우려먹고 동생이 있는 병실로 돌아왔다.
* * *
다음 날 아침 예상대로 비명을 지르는 수용이다.
“으갸갸갸. 혀엉! 형.”
“아프냐?”
“의, 의사 불러와. 빨리 진통제 놔 달라고 해 봐….”
“으이그. 진통제는 벌써 들어가고 있어 임마. 물리 치료 받으러 가자.”
“아그극.”
수안이 수용을 휠체어에 태워 물리 치료실로 데리고 갔고, 녀석의 고통은 찜질과 적외선 치료를 받으며 점차 나아졌다.
입원실에 다시 수용을 데려온 수안은 알면서도 다시 물었다.
“야. 이제 혼자 움직일 수 있지?”
“어? 어… 괜찮은 것 같아.”
“아직 물리 치료는 한참 더 받아야 해. 더 확실하게 끝내려면 아예 한의원으로 가는 편이 좋고.”
김일곤이 들었으면 기함을 했을 소리였다.
하지만 한의원에서 침 몇 방 맞으면 깨끗하게 나아지는 것을 몸소 경험해 본 수안이다.
“워우. 침은 별로… 그냥 여기서 열심히 물리 치료 받을래.”
“그건 네 선택이고. 혼자서 움직일 만한 것 같으니까, 문제 생기면 집으로 전화해.”
“응…. 고마워 형.”
“됐어. 임마. 다 내 탓이지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가기 전에 사다 줄게.”
“여기 사람들 시키면 되지 뭐.”
“그래. 내일 또 올게. 오늘은 혼자 자라.”
수안이 가고 수용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형은 왜 또 저렇게 착해? 배신하는 동생 맘 아프게.’
누이들은 어떻게든 힘을 모아서 형에게 대항해야 한다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알아도 진작 알아야 했다.
그리고 대학 생활을 하면서 회사에 다니는 것도 버겁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고생하며 느꼈던 억압을 벗어던지고 자유를 만끽할 순간에 또 회사로 가서 매일 마주하기 힘든 아버지를 보며 일을 해야 한다니 막막했다.
‘진짜 가기 싫다….’
회사로 가서 능력을 인정받는 것은 고사하고, 당장 가기가 싫었다.
‘…아버지께. 딱 1년만 대학 생활을 하겠다고 해도 되겠지?’
충분히 용인할 만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게 좋겠어. 대학에서 1년만 대차게 노는 거야. 후회 없이!”
1년이 2년 되고, 2년이 4년 되는 법이다.
얼른 병실에 전화를 들어 익숙한 전화번호를 눌렀다.
“최 실장님?”
-막내 도련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아. 오늘 물리 치료 받았더니 조금 나아졌습니다. 아버지께도 전해 주세요.”
-다행이군요.
“어제 제 차를 비서실에서 회수했을 텐데. 상태는 어때요?”
-뭐. 엔진이 있는 차량 후미가 박살 났다고 합니다.
원하던 드리프트를 하긴 했는데, 과하게 틀었다.
덕분에 후미를 박아 수리가 쉽지 않았다.
“아… 빨리 고쳐야 하는데….”
-또 이걸 타시려고요?
“그래도 형이 준 차잖아요.”
-최대한 빠르게 수리하라고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실장님.”
-막내 도련님은 몸부터 살피십시오. 앞으론 운전 조심하시고요.
“네에.”
전화를 끊고 수용은 팔을 치켜들었다.
“예에!! 으극. 아이고….”
목이 또 말썽이다.
“그래도 입학하기 전엔 다시 차를 받을 수 있겠네.”
대학에 가기 전에 차를 원상복구 시켜야 했다. 그래야 제대로 놀 것이 아닌가.
* * *
수안은 오랜만에 강운으로 가서 비서실에 들렀다.
비서실 직원이 수안의 얼굴을 모를 리 없다.
“어! 수안 도련님. 여기까진 어쩐 일로….”
“어제 수용이가 신세 졌다고 들었습니다.”
“아….”
“수용이 사고 현장에 빨리 찾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쉬는 날도 없이 고생하셔서…. 이건 별거 아닙니다. 비서실에서 나눠 쓰세요.”
예의 하얀 봉투들이다.
5만원 권이 나오기 전이라 봉투 하나에 들어가는 돈이 얼마 되지 않아 여러 개를 준비했다.
수안은 수용에게 사고가 발생했을 때 찾아 준 비서실의 수고를 치하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아휴. 이런 걸 함부로 주시면… 저희가….”
“최 실장님께는 제가 말씀드릴 테니 그냥 받으세요.”
“고맙습니다. 도련님.”
“제가 직원들 전부에게 말씀드리진 못하니 꼭 감사의 말을 전해 주시고요.”
“예. 도련님.”
수안은 최 실장이 집무를 보는 장소에도 들렀다.
똑똑.
“최 실장님?”
“어? 수안 도련님.”
“쉬지도 않고 일하십니까?”
“저희야 뭐… 매번 당연한 일이라. 회사엔 어쩐 일이십니까?”
“어제 수용이가 신세 졌다고 들어서 비서실에 감사 인사 좀 하러 들렀습니다.”
“아….”
“제가 금일봉 줬으니 타박하지 마세요. 제가 안 받으면 다 자른다고 했습니다.”
“하하. 받은 놈 불러 보세요. 제가 자르겠습니다.”
최 실장의 농담을 수안도 농담으로 받아쳤다.
“푸흐. 전 입 꾹 다물랍니다. 절대로 발설하지 않고 무덤까지 갖고 가겠습니다.”
“…도련님. 앞으론 그러지 마십시오. 우리 비서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죠. 사람 사이 일인데 감사는 표현하며 삽시다.”
“…알겠습니다.”
“실장님 선물은 밖에 뒀으니 들어가실 때 가져가세요. 매번 애써 주시는 거 알면서 이제야 처음 준비했습니다.”
최학주 실장을 위해 수안은 따로 명절 선물을 준비했다. 최 실장 선물을 준비하는 참에 김일곤 병원장에게 줄 차도 함께 사서 보내고 오는 길이다.
지난번 도청 사건으로 화낸 것을 어제 회장님 앞에서 사과했지만 불충분했다. 나름의 화해를 청하는 것이다.
‘포용력이 남달라. 회장님급. 아니면 그 이상.’
불과 얼마 전 도청 사건으로 비서실과 본인이 꺼려질 만한데도 구김 없이 고마움을 표하고 있었다.
“일찍 들어가세요. 쉬는 날 아닙니까. 이제 골칫덩이도 병원에 넣었으니 더 찾을 일은 없을 겁니다.”
“하하하. 딴엔 그렇군요. 이제 사고도 한번 내 봤으니 운전은 조심할 겁니다.”
“그리고 다음에 비슷한 일이 있거든 병원부터 갑시다. 집에 와서야 애가 병원으로 가야 하는 상태라는 걸 알았습니다. 만약 뇌출혈이라도 있었다면 아찔하네요.”
수안이 마냥 칭찬만 하려고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별문제가 없어서 다행이지만, 뇌출혈은 시간 싸움이다. 문제가 있든 없든 사고가 나면 일단 병원으로 보내야 맞았다.
“…죄송합니다. 비서실이 미처 챙기지 못했습니다.”
“저는 외부인이니 얼른 자리 비우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멀리 못 나갑니다.”
“아휴. 그럼요. 얼른 일 끝내고 퇴근하십시오. 그래야 밑에 직원들도 쉬죠.”
.
.
.
수안이 돌아가고 금일봉을 받은 비서실 직원들은 둘을 비교했다.
“정작 도움을 준 사람은 눈앞에서 불평만 했는데… 관련도 없는 첫째 도련님은 찾아와서 감사 인사를 하시네?”
“그러게. 오늘도 실장님 일찍 가라고 등 떠밀었다 하잖아. 연휴에 출근해서 고생한다고. 우리 전략비서실을 상당히 신경 쓰고 계셔.”
“야. 그래도 수안 도련님이 강운을 물려받을 게 뻔한 일이잖아. 잘된 일이지 뭐.”
“맞네. 수안 도련님이 회장님 첫째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따님들 성격도 장난 아니라더라.”
“특히 첫째 따님이 무시무시하다고 하던데?”
“둘째 따님도 만만치 않을걸?”
“…우리가 직접 겪어 본 막내 아드님은 어떻고….”
“그럼 수안 도련님만 별종이네.”
“말이 그렇게 되나?”
“우리한테는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하시고 최 실장님한테만 따로 하셨잖냐.”
“…우리가 잘못하긴 했지. 버럭 소리쳤다고 병원도 안 모시고 갔잖아.”
“난 괜찮을 줄 알았지. 멀쩡하게 말하고 빨리 집으로 가자는데 그럼 우리가 말을 들어야지 어쩌냐?”
“수용 도련님 말고 수안 도련님을 모셔 보고 싶은데 말이지….”
자신들이 훗날 수안 휘하에서 일한다고 가정하니 이미 가 있는 직원이 떠올랐다.
“소식 들었냐? 장호 놈은 수안 도련님 밑으로 가더니 벌써 실장 달았다고 하더라.”
“장호가 수안 도련님 밑으로 간 게 한 7년 되지 않았나? 그런데 벌써 실장을 달아?”
“저번에 봤는데, 어깨에 힘 딱 주고 경호원 애들 손가락으로 부리더라. 부러워 죽는 줄….”
“아오. 내가 자원했어야 했는데….”
“그때 아무도 안 간다고 해서, 결국에 막내급인 장호가 갔잖아.”
“이럴 줄 알았나 뭐….”
“그래도 이름만 실장 아니냐? 우린 강운 본사 소속 비서실이잖아.”
“장호가 나중에 강운으로 다시 복귀한다고 다시 내려가겠어? 그대로 실장이지 않을까?”
“그리고…. 저번에 실장님 지시로 장호 뒷조사하다 봤는데. 아파트도 받았데.”
“아, 아파트?”
“미친! 진짜 아파트를 해 주셨다고?”
“저번에 장호 녀석 결혼할 때 싱글벙글한 이유가 있었구나… 마누라가 예뻐서 웃는 줄 알았더니.”
“우리 쪼그만 변두리 아파트 가지고 너무 부러워하지 말자. 우리도 그 정도는 살 수 있잖아?”
“압구정. 대현 아파트. 43평이다.”
“커걱!”
없는 자리에서는 임금님 흉도 본다는데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직원들의 입은 결코 무겁지 않았다. 수안의 마음 씀씀이가 몰래몰래 강운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