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원
수용은 갑자기 골이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골 아프니까 더 얘기하지 말자.”
“내가 이런 널 믿고 무슨 일을 해?”
“겨우 제사 늦게 왔다고 너무 나가는 거 아닌가? 나야말로 이런 일로 문제 삼으면 뭘 믿고 누나랑 일을 해?”
적반하장도 정도껏 이어야 할 말이 있는 법이다.
수현은 하늘을 보고 허탈한 한숨을 내뱉어야 했다.
“하!”
“큰누나는 어디 있어?”
“아까부터 너 기다리고 있어!”
“…수안 형은.”
“네가 없는 사이에 집에 온 사장단에게 식사라도 대접해야 한다면서 나갔다고! 멍청아!”
사회 생활을 잘 아는 수안이다. 명절에 회장님께 인사드리겠다며 집까지 찾아왔는데, 그냥 보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당당하게 만날 수 있는 날이 많은 것도 아니다. 오랜만에 사장단을 다독일 시간이었다.
“…하여간 얍삽해.”
“얍삽한 게 아니라 똑똑한 거야.”
수현 본인만 같아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강운을 물려받는 데 큰 도움이 될 사장단이다. 미리부터 점수를 따고 들어가면 도움이 됐으면 됐지, 악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월급 사장들이야 총수 마음에 안 들면 자르면 그만이야. 밖으로 나가자. 집에서 할 얘긴 아니잖아.”
“…너 지금 들어와 놓고 또 밖에 나가자고? 아버지 눈 밖에 나고 싶어서 작정했니?”
“안 되려나?”
수현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짚고 손가락으로 수진 언니가 있는 방을 가리켰다.
“그냥 입 닥치고 방으로 들어가. 더 말하기도 힘들다.”
“거참. 잘 모를 수도 있지 뭘 그래?”
“모르는 게 자랑은 아니거든?”
수진은 밖에서 들린 대화를 듣고 수현과 마찬가지로 골치가 아팠다.
“나 왔어. 큰누나. 한국 돌아오니까 좋지?”
“공항까진 괜찮았는데, 집에 들어오니까 급 피곤해진다….”
말썽꾸러기 막냇동생이 문제다.
“…나도 사고가 날 줄 알았나. 잠깐 드라이브만 하고 오려고 했는데.”
“사고? 혹시 사람도 쳤니?”
“그냥 혼자서.”
혼자서 드리프트를 하겠다며 폼 잡다가 낸 사고였다.
“휴우… 그나마 다행이네.”
“몸은 괜찮으냐고 안 물어봐?”
“나불거리는 네 입이 그렇게 멀쩡한데 뭘 물어봐?”
“나 미움받는 건가? 사고까지 났는데 너무하지 않아?”
“됐고. 너도 수현이에게 얘기 다 들었다고 했지?”
“응. 작은누나가 우리 다 같이 쎄쎄쎄 하자고 한 말은 들었지.”
“아오…. 말을 해도 그따위로… 어쨌든! 너도 동의했다고 들었어.”
“나도 형 보면 감당이 안 되니까. 나중엔 비벼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허! 네가 그럴 깜냥이 되니? 감히 비비긴 어딜 비벼?”
오빠 수안에 비한다면 막내 수용은 태양 앞의 반딧불보다 못한 존재였다.
“자꾸 그렇게 삐딱하게 말할 거야?”
“그래. 기분 상했다면 미안.”
지금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동생을 달래서 끌고 가야 하는 처지였다.
“내가 귀국하면 패션으로 들어가고, 물산에도 한 다리 걸치려고 해. 수현이는 고려 호텔로 들어가서 서비스랑 유통 쪽에 몸을 담고 있고, 넌 우선 본사라고 했지?”
“응. 본사로 가서 인맥 쌓아 놓고 전자로 가서 …형 하는 일에 딴지라도 걸어 보려고.”
“그 부분은 조금 더 생각해 보자.”
“…왜? 형을 그대로 놔두면 어쩌려고?”
“생각해 봐. 오빠 회사가 네 생각대로 쪼그라들어서 망했다 치자!”
“오! 기분 좋은데?”
“멍청아, 입 다물고 들어.”
“…아놔. 왜 또….”
“아버지가 오빠를 어떻게 하실 것 같아?”
“회장님? 회장님이야… 회사 말아먹었으니 “네게 줄 자리는 없다.”라고 하지 않을까?”
“수현아… 설명.”
“응. 언니….”
수진은 설명하기도 싫다는 표정이었고, 수현도 마찬가지였지만 언니의 말이라 본인이 설명을 더했다.
“수안 오빠가 회사를 잃었어. 그렇게 되면 아버지는 오빠를 회사로 불러들이실 거야. 네가 경영자 수업을 받는 것처럼.”
“……!!”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는 수용에게 수진이 쏘아붙였다.
“당연하잖아! 우린 아무런 성과 없이도 경영자 수업을 받는데, 회사 한번 말아먹은 게 뭐가 대수야? 오히려 큰 경험했다고 좋아하실지도 모른다고! 게다가 오빠 회사에 우리 강운의 돈이 한 푼이라도 들어갔어? 아무 상관도 없어!”
“그, 그럼… 형을 그냥 놔둬?”
“아까 사장단에게 오빠가 하는 말을 들어 보니까 회사가 멀쩡하면 몇 년은 밖에서 나돌 생각이었어. 이미 아버지께도 허락받은 모양이야.”
“수현이 말대로야. 수안 오빠가 강운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면 우린 오빠가 설립한 회사가 살아남길 바라고 있어야 해.”
“그럼 우리 입지는 어떻게 지키고?”
“그 안에 우리가 완벽하게 회사에 자리잡고 아버지에게 지분을 받아 내야지.”
“오로지 성과야. 성과를 내서 아버지에게 어필하고 그 대가를 지분으로 받아야 해.”
수용은 자신 없었지만, 눈앞에서 지켜보는 무시무시한 두 누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어. 알았어.”
“또 다른 생각은 없고?”
수진의 날카로운 눈은 여전히 수용에게 향해 있었다.
“…또 있어?”
“멍청아. 오빠 회사가 그렇다고 마냥 성공하면 되겠어? 적당한 견제는 해 줘야지!”
“언제는 형 회사가 잘되어야 한다며?”
“그야 살아남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지 날개를 달아 주라는 뜻은 아니거든?”
“아….”
“수현아. 우리가 얘 데리고 뭘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나도 그래. 언니….”
둘은 하나부터 열까지 지적하고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절망스러운 심정이다.
“아~ 씨! 자꾸 이럴 거야? 나도 배워야 알 것 아냐?”
“누군 배워서 아냐? 딱 보면 아는 거지?”
“알았어! 알았다고! 회사가 살아남지만, 크게 성장하지 못하게 만들어서 형 능력을 의심하게 만들자 이거 아냐?”
수용은 일을 배우기도 전에 꼼수부터 배우고 있었다.
“정답.”
“이제 머리가 슬슬 돌아가네. 얜 압박을 해 줘야 돌아가나 봐. 그래서 대학도 재수를 했나?”
“재수 얘긴 하지 말고 쫌!!”
* * *
수안은 명절에 찾아온 사장단과 밖에서 편안하게 만났다.
점심에 반주도 한잔 곁들이며 그간 고생했던 사장단을 치하했다.
“항상 고생하시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있어서 강운 그룹이 재계 서열 1위를 달성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저희 공입니까. 그동안 수안 도련님 아니었으면 여기서 누가 자리를 보전하고 있겠습니까. 모가지 날아갔을 사장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보다… 회사엔 언제 들어오시려고 외부 기업에 힘을 쏟으시는지….”
한번 터지자 여기저기서 불만을 쏟아 냈다.
“또 몇 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졸업하면 바로 들어오실 줄 알았더니.”
“미안합니다. 저도 회사로 바로 갈 줄 알았는데, 일이 이렇게 됐습니다. 나중에 꼭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
강운 전자 김 사장도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도련님이 오시면 쓰시라고 자리까지 만들어 놨단 말입니다. 나중에 꼭 와 주….”
“김 사장! 그게 무슨 소리야? 왜 도련님이 거기로 가? 도련님 건설부터 시작하시죠. 건설이 최곱니다!”
“어허! 도련님이 전자에 얼마나 많이 신경 쓰시는지 몰라? 도련님이 왜 건설로 가?”
“금융도 잊지 마십시오. 도련님.”
사장단은 저마다 수안을 자신의 회사로 먼저 들이기 위해 혈안이었다.
“바로 부회장부터 시작하셔도 되지 않을지.”
부회장을 거론하는 사장도 있었다.
수안은 감사 인사로 답변을 대신했다.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 사장단 임원들께서 경영을 너무 잘해 주고 계셔서 걱정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강운 그룹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말아먹어야 들어오시려고요?”
“하하하.”
수안은 사장단과 식사를 하고 각자 돌아가는 길에 예를 다해 인사도 마쳤다.
‘그나마 나와 나이대가 맞는 사람들이라서 그런가… 친숙하네.’
24년의 현생에 전생 49년을 더하면 73년이라는 시간이다. 현 사장단 나이가 50대가 대부분이니 수안에 비하면 어린(?) 친구들이었지만, 그나마 나이대가 어울릴 만했다.
* * *
집으로 돌아가자 동생들이 거실에 모여 있었다.
“사랑하는 내 동생들. 이제야 가족이 다 모였구나.”
“술 마셨어?”
“그래. 사장님들과 점심 먹으면서 반주 한잔했다. 흐흐.”
“노땅들이랑 마음이 잘 맞나봐?”
“그러게. 이 오빠가 어려서부터 좀 빨랐냐? 나이 먹는 것도 빠른가 보다.”
비꼬는 말이 이렇게 돌아오니 수진은 할 말이 없었다.
“수진이 미국 생활은 괜찮아? 위험하진 않고?”
“뭐… 경호원이 잘 지켜 줘.”
“혹시라도 모르니까 경호원은 떼놓지 말고 다녀. 거긴 걸핏하면 총 들고 설치는 곳이잖아.”
“알았어….”
언제나 여동생들은 끔찍하게 생각해 준다.
“수현이는 일하기 어때? 직원들이 무시하진 않고?”
“…호텔 사장부터 알아서 기는데 뭐… 누가 감히 강운 로열패밀리를 무시하겠어.”
“그래도 뒤에서 궁시렁거리는 놈들이 있을 거야. 그런 놈은 본때를 보여 줘라. 그래야 기강이 잡히는 법이다.”
“…알았어.”
“수용이는…. 너 어디 갔다가 인제 들어왔어 임마!”
하나 있는 남동생은 아직 칭찬할 구석이 없다. 사랑으로 감싸 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아… 음… 일이 좀 있어서.”
“일? 무슨 일? 집안 제사까지 참석 못 하고 할 일이 뭔데? 너 뭐 하는 놈이야?”
수안의 기세가 심상치 않자 수진이 말렸다.
“오빠. 수용이가 작은 차 사고가 있었대. 그래서 늦었다고 했어.”
“교통사고? 다친 데는 없고?”
수안이 얼른 일어나 수용의 몸을 더듬었다.
“어. 어. 형. 사람도 안 쳤고… 나 괜찮아.”
“괜찮긴. 가만있어. 임마.”
수안이 팔다리를 들어 확인하고 다음으로 목을 살짝 잡아 돌리자 수용이 비명을 질렀다.
“으갸갸!”
“빨리 병원부터 가자!”
“어. 어.”
본인도 고통을 느끼고 나서야 몸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으으. 아깐 괜찮았는데… 집에 일찍 오려고 그냥 왔더니….”
“니들은 뭐 하는 거야? 동생이 교통사고가 났으면 병원부터 데려갔어야지! 아줌마! 기사 아저씨 불러요! 병원 가게.”
“예. 도련님.”
소란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오셨고, 자초지종을 물으셨다.
“무슨 소란이야?”
“수용이가 사고 났는데도 집에 일찍 오려다가 병원에 못 갔다고 하네요.”
“어허….”
나중에 혼낼 생각을 하던 아버지도 막내가 아프다는 말에 화를 내지 못했다.
“교통사고 후유증 남으면 골치 아파요. 얼른 병원부터 데려갈게요.”
“그래. 알았다.”
수진과 수현은 비슷한 생각을 했고 수용은 기꺼운 마음이다.
‘…내가 먼저 체크했어야 하는데….’
‘오빠는 막내 아픈 곳을 어떻게 알아낸 거야?’
‘이게 진짜 형제애지… 반면에 누나들은….’
.
.
.
다행히 강운 병원 검진 결과 큰 이상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근육이 놀라고 인대가 늘어났다는 소견이었다.
“상당히 아프시겠는데요?”
“자고 일어나면 이라는 뜻이죠?”
“네. 수안 도련님도 자동차 사고 경험이 있으십니까?”
“아뇨. 듣기만 했죠.”
현생에선 듣기만 했고, 전생에서 실제로 경험해 봤다.
당장은 멀쩡해도 시간이 지나면 엄청난 격통이 몰아닥치는 경우가 있었다.
그 절정은 언제나 사고 다음 날 아침이었다.
“입원 필요하죠?”
“예. 우선 입원해서 물리 치료를 받으며 경과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곳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특히 내일은 허리를 위주로 봐야 할 것 같네요.”
“너 입원 당첨.”
“아… 목에 이건 풀면 안 되나? 이거 차니까 더 아픈 듯.”
수용은 목 깁스로 인해 불편한 모양이다.
“빨리 나으려면 잘 차고 있어. 사고 친 아저씨.”
“내일 약속 있는데… 아차. 이제 차가 없지.”
수안의 고개가 끼리릭거리며 돌아갔다.
“설마…. 차도 아작냈냐?”
“…쏘리.”
“아오. 그게 얼마짜리 찬데….”
“어차피 형이 나 준 선물이잖아.”
“괜히 차를 사 줬어… 내가 죄인이다. 집에 다녀올 테니까 여기 있어 임마.”
“형이 다시 오려고?”
“그럼 동생이 입원했는데 누가 여길 지켜?”
“…….”
“군소리 말고 딱 누워 있어! 선생님 저 녀석 말 안 들으면 입원실에 묶어 버려요.”
“아하하…. VIP실로 안내하겠습니다. 김 간호사 휠체어 가져와요.”
“예.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