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회생
“다들 눈이 반짝반짝하던데요?”
김현성 사장은 계열사 사장들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다.
“진짜 계열사는 아직 소개도 못 했는데 말이지.”
미국과 일본의 BE 인베스트는 소개할 수 없었다.
거대한 금융자본으로 성장한 BE 인베스트먼트였다.
이들까지 포함하면 당장 국내 재계 순위에 지각 변동이 생길 지경이다.
“실장님. 거긴!! 말씀을 조심하셔야죠.”
김현성 사장도 얼마 전 도청 사건을 알고 있기에 펄쩍 뛰며 놀랐다.
놀라면서도 목소리를 죽이는 것이 여전히 도청에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최학주 실장에게 단단히 경고했어. 도청 장치는 모두 제거했으니까 이제 편하게 일해.”
“그래도 혹시 모르잖습니까….”
“그리고 회사 보안도 조금 더 신경 쓰자. 비서실이 아무런 제지도 없이 그냥 막 들어갔다 나오는데 어째서 회사는 아무도 몰라?”
“…예. 보안에 더 신경 쓰겠습니다.”
수안은 외부에서 비서실이 다녀갔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지금 보안 상태에서 외부에서 다녀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
“아…. 늦은 밤에 와도 경비가 있긴 한데….”
경비실을 뚫고 강운 비서실이 다녀갔다는 말인데, 어지간히 은밀하게 다녀가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비실은 몰랐잖아.”
도청 장치를 설치하고 갔다가, 다시 돌아와 회수해 가는 동안에도 경비실은 아무런 보고가 없었다.
“혹시….”
배 이사도 수안이 의심하는 부분이 어디인지 알아챈 모양이다.
“내부 직원 단속을 다시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흐음…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해도 그것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강운 비서실만 생각했지, 내부에서부터 문제가 됐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게다가 경비실이 전혀 알 수 없었다면 내부 직원이 용의 선상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답은 나와 있었다.
“총무 쪽 뒤져보면 답이 나오겠지. 내 방이나 김 사장과 배 이사의 방까지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면….”
“전화기까지 손대려면 총무팀밖에 없습니다.”
“봐주기엔 너무 멀리 간 것 같아. 지금은 도청 장치로 끝이지만, 나중엔 우리 동선까지 전부 노출되지 않겠어?”
“…맞습니다. 실장님.”
“전략실에서 조사 들어가겠습니다. 실장님.”
“김 사장이 감사 지시하라고 하고 배 이사는 전체적으로 직원들을 조사해 봐. 앞으로 우리 정보가 노출되지 않게 하려면 이런 일을 미리부터 잡고 가야 해. 겸사겸사 횡령이나 자잘한 문제도 파악하고. 한번 조여 줄 때가 됐어.”
““예. 실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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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스타 감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 두 명이 식별되었다.
이미 최장호가 의심하던 직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테리어를 갈아엎으며 보안을 강화했고, 그의 레이더에 걸려든 두 사람이다.
감사실로 마련된 작은 회의실에 먼저 총무과 여직원이 들어와 배 이사와 면담 중이었다.
“심미진 사원. 왜 그랬지?”
“…저, 저는 강운 비서실 지시라고 하셔서… 이 대리님이 전폭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여직원은 그저 이 대리의 지시에 따른 것뿐이었다. 수안이 강 회장님의 아들이었고, 강운 비서실도 회사와 무관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비서실이 수안을 보호하려는 조치의 일환이라고 여긴 것이다.
다음 면담은 이 대리였다.
“이채환 대리.”
배 이사는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사과가 먼저 나왔다.
“죄, 죄송합니다. 이사님.”
“죄송한 걸 아는 사람이 그런 짓을 하나? 후임 여직원까지 끌어들여서?”
“비서실에서 협조하지 않으면 나중에 문책이 있을 거라고….”
“강운 그룹은 우리 회사에 지분 한 톨도 없는데 무슨 수로 문책을 해? 이 사람아!”
“하, 하지만 강 실장님은….”
수안의 존재가 문제였다.
“실장님이 회장님 아드님인 것하고 도청 장치랑 무슨 상관이 있어? 비서실에서 실장님 죽이라고 하면 죽일 거야?”
“아….”
“당장 짐 싸서 나가.”
“…이, 이사님. 더블 스타에 뼈를 묻을 각오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제발 한 번만 선처를….”
“당신한테 도청 장치 설치하라고 했던 비서실에나 책임지라고 해!”
“이사님! 이사님!”
도청사건에 연루된 두 사람의 처분은 배 이사 선에서 내려졌다.
이채환 대리와 심미진 사원은 퇴사였고, 전체 감사 과정에서 일부 직원들에게서 드러난 자잘한 횡령의 경우 1개월에서 3개월 감봉으로 공지되었다.
그리고 이채환 대리는 법적인 조치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회사에 일으킨 물적 손해에 대한 고발이 들어가 당장 다른 직장을 얻기는 요원했다.
배영성은 이번 일을 전 회사에 알리고 앞으로 강운과 관련된 어떤 일에도 협조할 필요가 없음을 알렸다. 앞으로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한 조치였다.
* * *
“최 실장이 앗 뜨거 했겠는데?”
“그러라고 일부러 외부에 알렸습니다. 혹시라도 또 이런 일이 발생하면, 이유를 불문하고 퇴사 요건에 해당한다고 공지했습니다. 법적인 책임은 물론이고요.”
“그럼 이번엔 여기서 마무리되는 거지?”
“예.”
“그럼 이채환 대리와 심미진 사원은 여기서 끝인가?”
“제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강운 비서실에서 어떻게 하는가 봐서… 다시 안으로 들이자.”
이미 수안은 둘의 인사 카드를 자세히 살펴본 다음이었다.
“네?”
“강운 비서실에서 그래도 자신들 부탁 들어주다 그랬다면서 데려갈 수도 있잖아.”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보다…. 다시 끌어들이신다고요? 사람은 물건이 아닙니다. 고쳐 쓸 수가 없습니다.”
“그래. 내 말이 바로 그거야.”
“…….”
배영성이 전혀 이해를 못 하자 수안이 부연 설명을 했다.
“강운에 대해서 지극한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을 두 사람이잖아. 그러니 앞으로 강운과 얽힐 일은 전혀 없겠지. 믿음도 없을 테고. 그리고 능력이 있으니 우리도 모르게 도청 장치를 심지 않았겠어? 쓸모는 그것으로 증명한 셈이야. 이유는 또 있어. 공교롭게도 이채환 대리는 영어가 능통하고, 심미진은 일본어가 능통하네. 딱 우리에게 필요한 인재잖아.”
“…실장님이 강운 모르게 하는 일에 오히려 도움이 되겠군요.”
강운 비서실에 연락을 받아도 정보를 넘길 염려가 없어진 이채환이다. 이런 사람이라면 배영성만큼이나 중히 쓸 수 있었다.
“그렇지. 이번에 한 번 걸러졌으니 오히려 믿음이 상승하는 아이러니야.”
“하하하. 이걸 또 이렇게 이용하실 줄은….”
“안 그래도 배 이사 혼자서 해외 지사를 다 관리하는 것은 힘들었잖아. 아예 밖에다 사무실을 따로 만들어서 두 사람 데려다 쓰자고.”
“예. 실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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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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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과 배영성의 예상대로 이채환 대리는 전화를 붙들고 읍소하고 있었다.
“과장님… 저와 휘하 직원이 회사에서 쫓겨났단 말입니다. 비서실에서 하라는 대로만 했는데….”
-이 대리. 누가 들키랍니까? 이번 일로 생긴 문제는 오로지 이 대리 몫입니다. 괜히 우리 비서실까지 끌고 들어가지 말아요.
“하지만 비서실에서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지 않습니까? 책임을 져 주셔야죠.”
-…당신. 강운 비서실이 그렇게 만만해 보여? 다시는 일도 못 하게 해 줄까?
“과장님….”
-다른 일이라도 하고 싶으면 입도 뻥긋하지 말고 조용히 다른 직장이나 알아봐.
찰칵. 뚜우뚜우….
이채환 대리는 끊어진 전화기만 바라보며 망연자실했다.
이 대리는 2년 전 결혼해 첫 아이를 가진 가장이었다. 자신만 바라보는 아내와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가 있으니 어디서라도 일을 시작해야 가정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다른 직장을 얻자면 못 얻을 것도 없지만, 더블 스타에서 법적인 책임을 묻는 부분이 큰 문제였다. 자칫 잘못하면 전세로 얻은 집까지 날릴 판이다.
띵동.
“하아….”
크게 한숨을 쉬며 문을 열었다.
“누구십니까… 어?!”
“잘 있었나?”
“배 이사님… 여긴 어쩐 일로….”
“이대로 세워 둘 거야? 좋은 얘기하러 왔는데.”
“들어오십시오….”
법적인 문제를 말로 해결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배영성을 집안으로 들이는 이채환 대리였다.
“강운 비서실에선 뭐래?”
“…….”
“데려가 준다든?”
“…아, 아닙니다.”
몇 번째 전화하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럼 미진 씨는?”
“저도 안 되는데 미진 씨야 말할 것도 없죠.”
“어휴. 미진 씨는 왠 날벼락이겠어. 자기 사수 지시대로 했다가.”
“배 이사님. 회사에서 진행하는 법적인 부분만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저… 퇴직금이라도 받아야 아이를 키울 수 있습니다.”
소송이 진행되며 퇴직금까지 묶여 버린 상황이었다. 퇴사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지만, 소송까지는 버티기 힘들었다.
배영성도 곧 아이가 태어난다.
안방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자신의 단호한 처분이 너무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일모레 명절 연휴 시작인데 시골집에는 언제 가려고?”
“…지금 거기까지 신경 쓸 수가 없어서.”
배영성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기회… 다시 준다면 어떻게 하겠나?”
“기회를 주신다고요?”
“물론 더블 스타는 아니지만, 더블 스타보다 나을 수도 있지.”
“기회만 주신다면 정말 뼈를 갈아 넣겠습니다. 제발 소송만 해결해 주십시오. 이사님!”
“강수안 실장님이 그러시더군. 회사 내부에 경고는 충분히 되었을 테니, 실수한 직원은 살게 해 줘야 하지 않느냐고 말이야.”
“아….”
“자네와 미진 씨는 다른 곳으로 발령될 거야. 법적인 부분도 바로 해결해 주지.”
“감사합니다! 이사님!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강 실장님과 내가 원하는 사람은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야.”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강운에 들러붙을 일은 없습니다.”
“강운 뿐 아니야. 어디서 어떤 회유가 들어올지 몰라. 그래도 오직 강수안 실장님만 믿어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가지.”
툭.
“이건 실장님이 주시는 떡값이니 받아 둬. 명절에 집에는 가야 하지 않겠나. 퇴직금은 명절 끝나고 보내 주겠네.”
하얀 봉투엔 현금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아….”
“이번은 이대로 끝나지만 두 번은 없어. 앞으로 자네가 맡을 일은 정말로 보안을 지켜야 하는 일이 될 거야.”
“예. 믿어 주십시오!”
배영성이 나가고 얼굴에 수심 가득한 아이 엄마가 거실로 나왔다.
“여보. 누구 다녀갔어요?”
“다 해결됐어. 이제 다시 회사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갑자기?”
“좀 전에 다녀가신 분이 더블 스타 이사님이야. 법적인 부분 다 해결해 준다고 하셨어.”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야.”
“그리고 이것도 주고 가시네.”
하얀 봉투가 이채환의 손에서 흔들렸다.
“옴마. 이리 줘 봐요.”
탁.
봉투는 아내의 손에서 실체를 드러냈다.
“이백. 이백이나 주셨어요?”
“설 끝나고 바로 다른 곳으로 가게 될 거야. 더 좋은 곳이라고 하셨어. 퇴직금도 지급해 준다고 하셨고. 그러니 이제 걱정하지 마. 여보.”
“흐흑… 다행이다. 우리 아기 분유랑 기저귀 어떡하나 했단 말이에요.”
“…미안. 미안해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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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성은 심미진의 집에도 들러서 회유하고 다음 날 회사로 돌아와 보고했다.
“실장님 말씀대로 처리했습니다.”
“둘 다 어때? 잘할 것 같아?”
“총무팀에서 나름 빠릿하게 일 잘했던 직원들입니다. 두 사람이 보충되면 해외 지사 일을 더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보고할 수 있습니다. 둘 다 의욕까지 대단합니다.”
지옥에서 천당으로 끌어 올려진 둘이다. 기사회생한 둘은 앞으로 쉽게 배신하지 않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