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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이나 저놈이나 (39/304)

이놈이나 저놈이나

“앞으로 우리 회사는 연예계와 기획사에 불합리한 관행으로 자리 잡은 불공정 계약을 하지 않습니다. 연습생에게도 신인에게도 이 표준 계약서에 명시된 비율 아래로는 계약할 수 없습니다. 다만, 대스타라서 배분율을 올리는 것은 뭐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최저 기준만큼은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차후 기획사 수익률이 악화될 겁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김기수 사장은 표준 계약서에 표시된 수익 배분 조건을 보고 거부 반응을 보였다.

“김 사장님. 근시안적으로 보지 맙시다. 우린 연예계에서 올바른 기획사로 인식을 만들어야 합니다. 대스타도 우리 기획사로 오면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해요. 이런 인식은 오디션부터 드러날 겁니다. 스타의 싹이 보이는 친구들은 가장 먼저 우리 기획사의 문을 두드릴 겁니다. 거기다 선구안이 좋은 여러분이 있지 않습니까.”

장점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만약 5년쯤 계약한 스타가 대스타가 되고 계약 종료 시점이 되면 뭐라고 할 것 같습니다. 기존대로 불합리한 배분 조건으로 고통받았다면, 재계약을 하고 싶겠습니까? 아니죠. 안 할 겁니다. 법원까지 가서 지루한 싸움을 해야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런 풍족한 계약이라면 다른 기획사가 눈에 들어올까요? 첫 기획사가 마지막 기획사가 되는 겁니다. 아무도 함부로 발을 빼고 싶지 않을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중간에 계약 기간을 갱신하면 해결될 일입니다. 그리고 법은 우리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연예인은 이미지로 먹고사는 직업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약점이죠.”

“협박과 회유를 섞어가면서요?”

“…다들 그렇게 합니다만.”

괜히 여자 연예인의 은밀한 비디오가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기획사가 있기 때문에 약점을 잡아 놓고 꾸준하게 연예인들의 고혈을 빨아먹는다. 비디오 말고도 아이들 그룹 명에 대한 상표권 확보 등을 포함해 불공정하게 계약을 맺을 수 있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다.

계약 기간 중에 갱신 계약을 수락하지 않으면, 소속사는 해당 연예인을 대중에서 잊혀지게 만들 수도 있었다. TV에 한번 얼굴을 비추는 것도 소속사 뜻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적이 돈을 버는 것이라면 우리 아티스트를 비인간적으로 대우하는 것이 맞죠.”

비인간적으로 대우한다는 말에 김 사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우린 예술의 한 부분을 담당합니다. 우리 더블 엔터테인먼트를 국민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 줄 아티스트를 만들어 내는 종합 예술 기관이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

수안의 말에 박준영과 방수혁이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손뼉 치고 싶으면 치세요.”

배영성의 말에 둘은 열성적으로 손뼉을 쳤다.

짝짝짝짝.

아티스트 입장에서 기획사와의 배분 비율 상향은 긍정적인 신호였다.

그리고 예술을 한다는 당찬 주장도 그들의 웅심을 자극했다.

수안은 엎드려 절 받기였지만, 박수 소리가 듣기 좋았다.

“미래 스타가 될 이들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그들의 멘탈 관리도 쉬워질 겁니다. 고작 이 계약서 하나로 해결될 일이죠. 나머지 복지와 성장 지원은 부수적일 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수익 배분을 결정하는 계약서란 말입니다. 돈을 벌어들인 아티스트와 그 아티스트를 성장시키고 관리하는 기획사가 수익을 나누는 것이 공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제때 정산해 주고 적당한 수익 배분을 지키세요. 내가 참견하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수안의 열성적인 주장에 김 사장은 어쩔 수 없이 표준 계약서를 받아들여야 했다.

“예… 알겠습니다.”

수안이 먼저 밖으로 나가고 배영성이 김 사장 곁으로 가서 조그맣게 말했다.

“…자꾸 그런 식으로 강 실장님 말에 토 달면, 그 자리 오래 못 앉습니다. 아시겠죠? 김 사장님.”

“읍… 네… 알겠습니다. 배 이사님.”

“당장 저기 옆에 있는 두 사람의 계약부터 새로운 계약서대로 조정하세요. 표준보다 더 올려야 함은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일 겁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만간 다른 연예 기획사를 인수한다는 얘긴 했었죠? 그때 뵙죠.”

“…예.”

다른 연예 기획사를 인수한다는 말은 자신의 입지가 더 약해진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자신을 자르지 못하게 하려면 인수할 회사의 경영자를 내보내야 했다.

* * *

배영성이 가고 사장실에 돌아온 김기수 사장은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이 사장? 오랜만이네. 나야 더블 엔터테인먼트 김기수.”

-김 사장? 어쩐 일이야?

이수남 사장과 친분이 있었던 김기수는 먼저 SN 엔터테인먼트에 연락한 것이다.

“어쩐 일은 겸사겸사 전화했지.”

-김 사장이 괜히 연락했을 리가 없는데 말이지.

김기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혹시 어디서 연락 온 거 없었어? 회사 인수하겠다거나….”

-소문이 어디까지 난 거야? 투자 회사 입이 좀 싸네.

“하하. 소문은 무슨… 내가 이 사장에게 연락한 더블 스타 산하에 있잖아.”

-아! 더블 엔터가 더블 스타 산하에 있었어? 그러고 보니 이름이 같았구나!

“그런데… 회사는 넘기려고?”

-뭐. 들어 보고 결정할 일이지. 그리고 우리 회사는 제대로 된 스타도 없으니까.

“돈만 받고 다 넘겨 버리면 좋지.”

-…그러려나?

“네 말대로 아직 SN에서 작년에 그 난리 친 이후로 스타라고 할 만한 친구도 없잖아. 이번에 크게 적자 내지 않았어?”

-그렇게 아픈 데를 찔러야겠어?

작년 인기를 끌던 소속 가수가 필로폰 투약으로 끝장나 버리고 자신이 소유하던 카페를 두 개나 팔아서 회사를 운영해야 했다.

“지분 넘기고 두둑하게 돈을 받으면 언제든 또 시작할 수 있는 일이잖아. 껍데기만 넘겨주는데 큰돈을 받으면 좋은 일 아냐?”

-…좋은 말이긴 한데… 그러는 넌 왜 지분까지 다 넘겼으면서 사장으로 남았는데?

지분만 넘기고 아예 빠지라고 설득하려던 김기수는 날카롭게 물어 오는 이수남의 말에 잠시 당황했다.

“어어? …나야 기획사 또 세우긴 힘들지. 한번 엑시트하고 끝냈으니 됐잖아. 그래도 경영하라고 기회를 줬으니 남아 있는 거야. 아니면 진작 때려치우고 놀러 다니고 있었을걸?”

-너도 그날 같이 와?

“같이 가자고 하시더라고.”

-오기 전까지 생각해 볼게.

“그래. 금방 보겠네. 지분 넘기면 돈 좀 생기겠지? 같이 술이나 한잔….”

-바빠서 끊는다. 수고.

* * *

바쁘다고 했지만 제대로 된 스타도 없는 기획사가 바쁠 일은 없었다.

김기수 사장과 전화를 끝낸 이수남은 책상에서 잠시 고민했다.

“김 사장 이 녀석이 괜히 이럴 녀석이 아닌데….”

투자 회사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김기수를 의심하고 있었다.

“제 놈이 이득 되는 것이 아니면 움직일 놈이 아니야. 뭔가 있어. 녀석은 내가 회사만 넘기고 경영에선 발을 빼라는 걸까? 왜지?”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지만, 마음이 가는 사람은 아니다.

오래 알고 지내다 보니 성향까지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배 아파하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은 기어코 지켜 내는 녀석이었다.

“잠깐… 같은 회사에 연예 기획사가 둘?”

본인의 회사까지 더블 스타로 넘어가면 같은 회사에 기획사를 두 개나 갖게 된다.

“하하하… 제 자리가 위협이 되니까 내가 그냥 돈만 받고 나갔으면 했다는 거네. 그러면 그렇지. 녀석이 괜히 그런 소리를 할 리가 없지.”

녀석이 붙어 있고 싶은 회사라면 분명 좋은 회사일 것이 틀림없었다.

* * *

수남은 다음 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배영성 이사님? SN의 이수남입니다.”

-아. 이 사장님. 미팅은 오늘이 아닙니다만….

“드릴 말씀도 있고, 듣고 싶은 말씀도 있고 해서 연락 드렸습니다. 오늘 시간 되시면 따로 뵐 수 있을까요?”

-하하. 좋습니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정보를 제공해 드려야죠. 제가 그쪽으로 갈까요?

“아닙니다.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점심 같이하시죠.”

-좋습니다. 식당은….

회사 근처 식당에서 만난 두 사람은 안부 인사와 자잘한 신변잡기로 시간을 보내며 식사를 끝냈다. 그리고 차를 마시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수남이 먼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더블 스타에선 인수한 회사 경영자를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 싶어서요.”

“전혀 아닙니다. 다른 투자 회사와는 마인드 자체가 다릅니다. 회사 오너께서는 되도록 본래 경영하던 사람이 꾸준하게 회사를 운영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시죠.”

“아.”

“저희가 인수한 회사를 키워서 다시 팔아먹을 생각이면 모르겠지만, 저희는 회사가 망할 때까지 같이 갈 겁니다. 그러자면 기존 경영자도 함께해야 맞지 않을까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하하.”

“하지만 무조건적이진 않습니다. 경영자에게 문제가 있다면 생각을 달리해야겠지요. 경영권을 유지시켜 준다고 했다고 평생 직장을 보장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일례로 SJ 컴퓨터는 도무지 경영을 맡기기 힘들어서 갈아치워야 했습니다. 그 외에 다른 곳은 건드리지 않았죠. 우리는 자회사로 편입된 각 사장들의 능력에 따라 대우합니다. 능력이 출중하고 경영자로서 회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면 더 큰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인수 협상을 시작하기 전이라 좋은 말씀만 해 주실 수도 있었을 텐데, 솔직하게 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너께서 이수남 사장님을 좋게 보시는 것도 있거든요.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수안은 이수남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SN 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도 있지만 앞으로 스타를 알아볼 그의 안목과 스타를 만들어 내는 그의 능력이 중요했다.

“저를 좋게 봐주시다니 이것도 참 감사한 말씀입니다.”

“그럼 궁금한 부분은 해결되셨습니까?”

“예. 잘 해결됐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가 말씀 드릴 차례네요.”

“아. 하실 말씀도 있다고 하셨죠. 경청하겠습니다.”

“어제 김기수 사장과 통화했습니다.”

“오. 예상대로 알고 지내신 모양이군요.”

“뭐… 친하긴 하지만 정은 없는 사이죠.”

“하하하. 김 사장이 약간 자기중심적인 경향이 있긴 하죠.”

이수남은 솔직하게 있었던 일을 말했다.

“어제 김 사장은 제가 회사만 비싸게 넘기고 그 돈으로 다시 기획사를 차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더군요. 그 전에 배 이사님을 만나서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음… 그 부분은 상당히 문제가 있네요.”

한번 자리 위협을 받았다고 여기까지 미리 손을 쓸 줄은 몰랐다.

‘몹쓸 사람이었네….’

“아까 기존 경영자와 함께하겠다고 하셨지만, 제가 나간다고 해도 회사에 문제는 없지 않겠습니까?”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오너는 당신을 원합니다. 당신이 SN 엔터를 이끌어야 진정한 아티스트를 만들어 내고 SN 엔터를 성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시죠.”

“……!”

“답이 됐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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