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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계약 (38/304)

노예 계약

간단한 인테리어로 품의를 사실로 만든 배영성은 모던한 느낌의 사무실에서 다시 굳은 얼굴의 수안을 마주했다.

“…본사 연락해서 최학주 실장 오라고 해.”

“…아… 예. 실장님.”

두 번은 참을 수 없었다.

최학주 실장은 수안이 왜 자신을 불렀는지 알지 못하고 수안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어휴. 여기까지 저를 부르십니까? 하하하. 더블 스타 건물 구경은 나중에 해도 됩니다만….”

웃으며 말했지만 타박하는 의미가 강하게 포함된 물음이었다.

강운에서 위세가 대단한 최학주였다.

강운모 회장의 손발로 활동하고 있었고, 회장이 누구보다 믿는 사람이다.

강운 사장단에서도 최학주는 회장님 다음가는 권력자로 통했다.

회장님의 모든 지시가 최학주의 입을 통해 전달되니 최학주의 입지는 회장 다음이었다.

몇 년 뒤에는 부회장으로 승진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으니 실장이라는 직급은 무의미했다.

“내가 어지간한 일로 최 실장님을 부르겠습니까? 내가 그럴 사람이에요?”

수안은 사무실 자리에 앉은 채였고, 최학주는 책상 앞에 서 있었다.

“흠… 뭔가 오해가 있나 보군요. 제가 도련님과 얽힐 일이 뭐가 있습니까?”

“나도 없으면 좋겠어서 불렀습니다.”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앉아도 되겠죠? 여기 비서실은 차도 안 내오나요?”

수안은 슬슬 성질머리를 끌어올렸다.

“내가 만만해 보여서 그러나? 앉을 필요 없고, 차도 필요 없어. 나도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까 회장님이 아니라 최 실장을 불러 말하고 있잖아.”

“말투는 조심하시죠. 회장님도 제게 그렇게 하진….”

수안은 최학주의 말을 끊고 차가운 말투를 유지했다.

“최 실장. 지난 첫 번째 도청은 내가 참고 넘어갔어. 김현성 사장이랑 배영성 이사 사무실과 내 차에도 설치했더라? 귀찮은 미행까지도 그냥 넘겼어.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참아주니까 계속해도 될 것 같아?”

“……!!”

‘전부…. 알고 있었어?’

“내가 사무실 인테리어까지 갈아엎으면서 기회를 줬잖아!”

쾅.

책상을 치며 하는 말에 최학주는 변명의 말을 할 수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을 파악당했다고 여긴 탓이기도 했고, 불같이 화내는 수안을 처음 본 충격도 있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면 될 거 아냐?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이딴 식으로 날 감시해!!”

콰작.

수안이 집어던진 전화기가 박살 났다. 그 안엔 예의 도청 장치가 들어 있었다.

전화기에서는 덜렁거리는 도청 장치가 삐져나왔다.

“변명할 생각하지 말고, 오늘 내로 지금까지 설치한 것 전부 챙겨가. 그리고 다음에 미행이 붙어서 걸린다. 그땐 강운 직원이고 뭐고 트럭으로 밀어 버릴 테니까 그런 줄 알아!”

“…….”

수안은 잠시 숨을 가다듬고 딱딱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일이 아니면 나도 최 실장에게 예의 지킵니다. 오늘은 그냥 나가요. 회장님께 보고는 최 실장 마음대로 하시고. 아셨죠?”

“…예.”

* * *

강운모 회장은 최학주에게 오늘 발생한 일을 보고받았다.

“…수안이가 불같이 화를 냈다?”

“예. 다음에 다시 미행이 붙으면 강운 직원이라도 트럭으로 밀어 버린다고 하시더군요. 살기등등하셨습니다.”

“하! 녀석 성질머리 하고는… 이것도 날 닮았나?”

“다시 도청을 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 사람아, 머리를 써야지.”

“네?”

“최 실장은 기계를 너무 믿어서 탈이야. 이럴 때는 사람을 구슬리면 끝날 일이건만.”

수안의 근처에 있는 인물들이라면 몇 없었다.

“수안이 근처에 머무는 인물들에게 접촉해 보고 다시 보고해.”

“하지만, 쉬이 도련님 정보를 넘길 친구들이 아닙니다. 김현성 사장과 배영성 이사는….”

“수안이가 도청을 어떻게 알았겠어? 알려 준 놈이 있을 거 아냐?”

최학주 실장은 강운 보안실에서 수안 도련님 곁으로 보낸 직원 하나가 떠올랐다.

“…예. 하나 있습니다. 예전에 비서실 보안팀에서 일하던 직원이 분명합니다.”

“그 친구 하나만 노리면 다 해결되지 않겠어?”

“바로 접촉해 보겠습니다.”

* * *

최장호는 최학주의 부름에 늦은 저녁에 약속 장소로 나갔다.

“반갑습니다. 실장님. 강운의 실세께서 저를 다 부르시고… 허허허. 제가 크긴 컸나 봅니다.”

최학주는 첫 마디부터 거슬렸다.

“자네 말투가 좀 건방지다고 생각하진 않나? 실세라니?”

“그럼 실세를 실세라고 해야지 뭐라고 합니까? 십상시라고 부를 수는 없잖습니까. 하하하.”

“…도가 지나쳐.”

“도가 지나친 건… 그쪽이셨죠. 강 실장님이 테러리스트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감시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 부분은 내가 따로 도련님께 사과드리지.”

“아직도 안 하셨어요? 어휴. 많이 두꺼우신 분이셨네.”

낯짝이 두껍다는 뜻이었다.

“자네… 이렇게 날 긁어도 후환이 두렵지 않은가 봐?”

“겁 많으면 이런 일 못 합니다. 아시잖습니까.”

“하긴 그렇지.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그렇게 뻗대는지 모르겠군.”

“미리 보여 드리는 거죠. 무슨 말씀을 하셔도 안 된다는 걸요.”

최학주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자네. 살고 있는 집. 어디서 났나?”

수안이 선물한 압구정 대현 아파트를 말함이다.

최학주는 이 건으로 최정호를 옭아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네 월급으로 살 수 있는 집은 아니잖아?”

3억짜리 아파트는 그의 월급으로 살 수 있는 아파트가 아니었고, 그의 집안에서 도와줘도 어림없는 아파트였다. 좋게 말하려고 했지만 강경한 장호의 태도에 바로 협박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어휴. 아직 조사가 덜 끝났습니까? 더 파악하시면 부르시던가요.”

장호는 자기 입으로 말할 생각 없었다.

“내부 감사가 들어가도 그렇게 말할 생각인가?”

“푸핫.”

“웃어?”

“나 참. 내가 아직도 강운 소속으로 보입니까? 나는 강운에서 떨어져 나온 지 한참입니다. 실장님의 더블 스타와 회장님의 강운은 전혀 다른 기업인데 무슨 수로 날 감사한다는 겁니까?”

“…분명 네가 집을 사는 데 사용한 돈은 도련님과 관련이 없는 돈이었어. 그렇다면 하나밖에 없지. 회사 자금을 불법적으로 융통했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아. 그리고 내가 말하는 감사는 강운의 감사가 아니라 더블 스타의 감사를 말함이야!”

이것을 확신하고 있기에 아파트 얘기를 꺼낸 최학주였다.

“허걱! 거기까지 파악하셨단 말입니까?”

마치 국어책을 읽는 것 같은 발 연기였다.

“…놀라는 연기가 영 아니군.”

“크흐흐. 미안합니다. 연기는 영 어색하네요.”

“도련님도 알고 있다는 말인가?”

“도련님이 학창 시절 받던 용돈만 해도 엄청나지 않습니까. 여기저기 몰래 투자도 해 보고 하셨죠. 거기서 약간 남은 돈이 돌고 돌아서 제게도 좀 왔습니다. 우리 도련님이 주변은 또 확실하게 챙기시거든요.”

나중에 이 부분을 어떻게 설명할지 한참 전부터 논의해 뒀었다.

“…도련님과 관계가 있는 돈이었군.”

“배 이사와 제가 그 돈을 관리하시는 데 도움을 드렸고, 그 보상으로 받았습니다. 도련님께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 정보망에 도련님 투자 정보는 없었는데….”

수안이 학창 시절 받은 용돈을 어디에 쓰는가 싶었더니 몰래 투자를 했었던 모양이다.

“큰돈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오랜 시간 투자해서 기껏 15억쯤 마련하셨죠. 괜히 고생만 했다고 저희를 챙겨 주셨고요.”

현재 더블 스타가 기록 중인 수익률에 비하면 형편없는 금액이다.

실제 수익률을 밝히면 최 실장이라도 기겁할 수준이었다.

해외 투자사 설립의 근원이 된 수익률이다.

“그래도 덕분에 많이 배우셨죠. 더블 스타에선 그 경험으로 제대로 날아오르고 계시니 저도 조만간 보너스 좀 받겠죠? 하하하.”

“자네. 본사로 들어올 생각 있나?”

“지금까지 충분히 들으셨지 않습니까. 저는 이미 주인을 찾았습니다.”

“…무엇을 제안해도 소용없겠군.”

“최 실장님도 그렇지 않습니까? 억만금을 준다고 해서 회장님 배신하실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하. 그렇지.”

“저 말고 배영성 이사에게 가 보시죠. 그 사람은 돈에 갈대처럼 휘둘릴지도 모릅니다.”

“허! …웃으라고 하는 소리야? 원래 그쪽은 시도할 생각도 없었어.”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최장호라고 생각했었다.

“크하하. 안 속으시네.”

“자네. 재밌군. 앞으로 자주 보지.”

“전 실장님 무서워요. 가끔 뵀으면 합니다.”

“내 앞에서 할 말 다 하면서 무섭기는….”

“지금 떨리는 심장을 겨우 부여잡고 있는 거 안 보이십니까? 여기 보세요, 이마에 식은땀도 납니다.”

“…으이그. 됐다. 내가 회장님한테 깨지면 다 네 탓인 줄 알아 임마!”

“흐흐. 제 핑계 대십시오. 죄송합니다.”

“간다. 또 보자.”

최학주는 속을 살살 긁어 대는 최장호의 화법에도 크게 화나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다.

‘…저 새끼는 왜 밉지가 않지?’

최학주는 곰곰이 차 안에서 생각하다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충성심… 녀석에겐 단단한 충성심이 있었어.’

최학주가 평소 비서실과 보안팀에 강조해 온 것이 강 회장님을 향한 충성심이었다.

스스로가 충성심을 강조하는 사람이라 녀석이 가진 수안을 향해 가진 충성심이 갸륵해 보인 것이다.

“도련님은 사람까지 잘 부리시네….”

그만한 충성심을 가진 부하직원은 쉽게 구할 수 없었다.

.

.

.

최학주의 보고를 들은 강운모 회장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파하하. 십상시? 하하하.”

“그 부분이 재미있으셨습니까?”

최학주는 떨떠름한 표정이다.

“어쨌든 어림도 없었다는 말이지? 그럼 어쩔 수 없겠어.”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 볼까요?”

“아냐. 괜히 녀석이 내게 아무 말도 안 하겠어? 나랑 얼굴 붉히고 싶지 않으니까 알아서 조심하는 거야. 녀석이 끝까지 내게 예의를 갖췄으니 나도 한발 물러서야지.”

‘하긴 회장님과 아드님의 관계도 있고 하니….’

“예. 회장님. 앞으로는 직접 도련님께 물어보고 정보를 취득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 * *

더블 엔터테인먼트의 오디션이 시작하는 날.

수안은 부푼 마음을 안고 오디션장으로 향했다.

수안은 오디션에서 반짝이는 예비 스타들을 우후죽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자신은 남들이 알아보지 못한 스타를 콕 짚어서 발굴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었다. 하나 같이 학생 티도 벗지 못한 어린 친구들이 꿈틀거리며 춤추고 비명을 지르며 노래를 부른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싶었다.

적당한 끼를 가진 친구들은 전문가인 김기수 사장과 현역에서 가수 활동을 하고 있는 박준영이 알아보고 있으니 수안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될 놈은 된다는 걸 오늘 또 깨닫는다.

미래의 스타를 알아보고 수안이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으면 김기수가 옆에 있는 박준영에게 귓속말을 한다.

“쟤는 시선을 잡아끄는데? 준영이 생각은 어때?”

“저도 그러네요. 잘 다듬으면 괜찮겠어요. 연습생으로 들이죠.”

방수혁도 보컬 가능성이 보이는 오디션 지원자를 잘도 찾아냈다.

“음색이 괜찮은데, 사장님 듣기엔 어떠세요?”

“딱 좋네. 음색이 청량하고 고음도 시원시원하고.”

‘나 왜 여기 앉아 있는 거니.’

3일간의 오디션을 마쳤다. 수안이 앉아서 한 말은 별것 없었다.

“네. 제가 그 강수안 맞습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사인하러 온 것이 아니라 당신 오디션의 감독관으로 나와 있다는 걸 명심하세요.”

나머지는 의미 없는 말들이고 그나마 제대로 문장으로 말한 것은 저게 전부다.

‘난 다른 일이나 처리해야지. 에효.’

* * *

오디션이 끝난 다음 날. 더블 엔터에 돌아온 수안은 김기수 사장과 주요 임원 그리고 박준영, 방수혁까지 불러 놓고 회의를 시작했다.

“배 이사, 가져온 표준 계약서 나눠 줘.”

“예. 실장님.”

배영성은 수안의 그림자와 같았다. 언제나 함께였다.

배영성이 나눠 준 계약서는 앞으로 연습생을 포함 더블 엔터테인먼트에서 아티스트로 영입하는 모든 연예인들과 맺을 표준 계약서였다.

“제가 되도록 경영자의 회사 운영에 간섭하진 않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고쳐야겠습니다.”

그 하나가 바로 계약이다. 연습생이든 아티스트든 노예 계약은 없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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