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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 (36/304)

도청

“안 믿으면 어쩔 수 없고.”

원래 수안은 강하게 밀어붙일 마음이 없었다.

그나마 아버지라서 맛보기로 얘기해 준 것이다.

아직 배영성이나 최장호에게도 말하지 않은 IMF 금융 위기였다.

위기는 기회를 동반하기도 하지만,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한국은 금융에 취약점을 드러내고 위기를 맞이하지만 덕분에 금융이 단단해지는 결과도 낳기 때문이다. 국내 은행은 선진 금융으로 한 걸음 나아가고, 방만하게 경영되어온 기업에도 철퇴가 가해진다. 쭉정이가 알아서 걸러지는 셈이다.

“쭉정이는 빼고 그사이에 숨어 있는 알맹이를 잘 골라내야겠지만….”

수안은 다음 날 아침 운전기사에게 말해 목적지를 변경했다.

“오늘은 더블 스타가 아니라 팬탁으로 갈 생각이야.”

“예. 실장님.”

더블 스타는 김현성을 사장으로 둔 국내 지주 회사의 이름이었다.

미국 지사와 일본 지사의 경우 BE 인베스트먼트라고 이름 지었다. 약자인 BE는 Bald Eagle(흰머리 독수리)의 약자였다.

누가 들어도 미국 회사라는 느낌이 들도록 일부러 미국을 상징하는 흰머리 독수리의 철자를 따온 것이다. 덕분에 미국에서도 대부분 BE 인베스트먼트를 자국 회사로 생각하길 주저하지 않으며, 일본에서도 미국 자본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수안은 팬탁으로 가서 박병우 사장과 인사하고 바로 개발실로 들어갔다.

요즘 수안이 크게 신경 쓰는 곳이다.

모회사 오너라고 할 수 있는 수안이 개발팀과 함께하고 있지만, 개발팀 직원들은 어려워하지 않았다. 처음 느꼈던 긴장감도 횟수가 많아지며 희석된 까닭이다. 지금은 자신들과 제품 개발에 대한 전문적 이론을 주고받는 수안을 오너가 아니라 동료처럼 대하고 있었다.

“실장님. 여기 휴대폰 키패드 샘플 한번 봐주세요.”

“오. 부탁한 대로 잘 나왔네.”

팬탁엔 수안이 심디 전자에서 데려온 두 사람이 있었다.

지금 휴대폰 키패드를 들고 온 직원도 그중 하나였다.

“깔끔하게 떨어지긴 했어요.”

“장 대리가 천지인 자판을 발명했으니까 이렇게 예쁘게 나온 거지.”

“히히. 저 혼자 했나요? 저기 김 대리랑 같이했죠.”

장 대리는 같은 개발실에서 일하는 김 대리를 가리키며 칭찬을 부끄러워했다.

“그래도 개발한 공로가 희석되는 건 아냐. 나중에 휴대폰이 대중화되면 저작권 비용 기대하라고. 모든 휴대폰 제조사가 장 대리와 김 대리가 개발한 천지인 자판을 사용하게 될 테니까.”

수안은 두 사람이 발명한 천지인 자판을 특허 냈고, 둘에게 발명보상금과 함께 앞으로 천지인 자판으로 발생할 수익의 일부를 로열티로 제공한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둘이 나중에 딴소리할 일은 없었다.

삼디 전자에서 그대로 있었다면 21만 원의 보상금을 받고 끝이었다. 훗날 법적 소송까지 불사해 추가 합의금으로 보상받았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합당한 보상을 제시하고 계약하면 문제의 소지가 없었다.

“어휴. 저희에게 너무 챙겨 주시는 건 아닌지 싶어요.”

“이제 고작 발명 보상금 2천만 원씩 받아 놓고 만족하면 안 되지. 앞으로 수십억을 받을 텐데.”

해당 자판으로 발생하는 매출의 영업이익을 계산해 그의 2%에 해당하는 금액을 둘이 나눠 받게 된다. 충분히 수십억이라고 할 만했다.

“…수십억이요?”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게. 기다려 봐.”

“그렇게만 되면 정말 좋겠네요. 하하하.”

2011년 국내 모든 휴대폰 제조사가 천지인 자판을 한글자판 표준 방식으로 합의한다. 단독 표준은 아니지만 충분히 메리트가 있는 천지인 자판이었다.

“개발이나 발명은 안주할 시간이 없어. 천지인이 좋은 입력 방식이지만, 개선점을 찾아봐. 그리고 또 다른 발명을 하면 받을 돈이 늘어나지 않겠어?”

“열심히 개발하고 발명하겠습니다. 실장님. 하하.”

“이대로 보고하고 휴대폰 제조사에 영업 시작하라고 해.”

“예. 실장님.”

수안이 팬탁에 와 있다는 것을 안 배영성이 찾아왔다.

“배 이사. 급한 일이 있어?”

“잠시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수안은 배영성이 온 이유를 생각하다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1995년 1월 16일. 고베 대지진 하루 전날이었다.

‘…지진이 하루 빨라졌나?’

배영성이 공용 회의실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잠그고 말했다.

“지진이야?”

“예. 일본에 리히터 규모 3.6의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아….”

수안은 왜 전날부터 지진이 발생했는지 그리고 그 규모가 작은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전조 지진이야.”

거대한 지진이 발생하기 전에 나타나는 전조 현상이었다.

지진이 갑작스럽게 발생하긴 하지만 아무 전조 현상도 없이 갑자기 큰 지진이 발생하진 않는다. 거대한 지진이 오기 전에 작은 지진이 발생하며 거대한 지진의 등장을 알리곤 한다. 악취나 나거나 심해어류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런 부분은 현장에서나 알 수 있는 일이다.

“…끝이 아니라는 말씀이죠?”

배영성은 오늘 지진으로 끝이길 바라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도 이걸로 끝이면 좋겠지만, 내일은 진짜가 도착할 거야.”

“하아….”

일본 지사의 상황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일본은 거품 경제가 꺼지면서 비틀대고 있었고 이 고베 대지진은 일본 경제에 최후의 일격이나 마찬가지였다.

“차진호 지사장은 방비하고 있어?”

“…예. 주식 시장에서 보유하던 종목을 대부분 처분하고 공매도와 옵션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공매도가 허용되고 있었지.”

한국의 경우 내년에나 기관 투자자를 대상으로 허용하고 점차 허용 범위를 넓혀 간다.

“정말로 내일 큰 지진이 발생하고 많은 피해를 일으킨다면….”

“많은 이득이 생기겠지.”

“…그렇습니다.”

“배 이사는 심적으로 많이 불편해 보이네.”

“…아닙니다.”

“아니긴, 나도 그런데.”

수안도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재난을 눈뜨고 지켜봐야 하는 입장이다.

거기다 그 재난을 이용해 돈을 벌 계획을 진행하고 있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실장님도 마음이 편치 않으십니까?”

“나라고 심장이 얼음으로 됐겠어? 차진호 지사장에게 적당히 피해 지역에 기부하라고 해.”

지진 재난이 닥친 지역에 기부하는 방식으로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고 싶었다.

“예. 실장님.”

얼굴을 풀며 답하는 얼굴을 보니 배영성의 짐도 조금은 덜어진 모양이었다.

“끝? 오늘 다른 보고는 없고?”

“보고는 아니고 하나 여쭤볼 일은 있습니다.”

“말해.”

“더블 엔터테인먼트에서 곧 오디션을 본다고 합니다.”

“오오. 그래서?”

“와주시면 좋겠다는 뜻을 내비쳤지만, 제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라서 여쭤보고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하루 안에 끝나?”

“삼일 정도 진행될 것 같습니다. 지원자가 많아서 하루로는 어림없습니다.”

“스타 되겠다고 용쓰는 애들이 한둘이 아니겠지.”

지금도 각 엔터테인먼트 연습실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 미래의 대스타들이 가득할 터였다.

‘…곧 스타가 될 애들이… 어!’

당장 내년에 데뷔할 남성 5인조 댄스그룹이 수안의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남성 아이돌 그룹의 시조새 격인 스타들이었다.

“…배 이사.”

“예. 실장님.”

수안이 먼 곳을 보던 얼굴로 자신을 부르면 언제나 미래와 관련된 임무가 튀어나왔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배영성의 예상은 적중했다.

“SN 엔터테인먼트로 가서 사장이랑 미팅 잡아.”

“SN 엔터테인먼트요? 그런 이름을 가진 연예 기획사가 있습니까?”

“지금은 크게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 현 대표는 예전에 가수 활동을 하던 이수남이야.”

“아. 이수남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나중엔 상당히 커지는 모양이네요. 찾아보겠습니다.”

배 이사도 이제 척하면 척이다.

“얼마 전 연예인 마약 사건으로 시끄러웠던 연예인이 SN 소속이야. 그리고 인수하는 방향으로 갈 거야. 어차피 우리도 더블 엔터테인먼트라는 연예 기획사가 있잖아. 쌍두마차로 끌고 가도 좋아. 어차피 둘 다 성공할 테니까. 그리고 우리 회사 이름이랑도 딱이잖아. 두 개의 연예 기획사를 가진 더블 스타! 어때?”

한 손엔 SN 이수남, 다른 손엔 JYP 박준영과 BTC 방수혁이 있다.

실패가 불가능한 조합이다.

“인수가 어려우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투자자가 인수하겠다고 나선들 자신의 회사를 무작정 파는 대표는 찾기 어렵다.

특히, 자신이 일으킨 회사를 자신이 꾸려나가고 싶은 욕심을 가진 사람도 간혹 있었다.

“인수를 거부한다는 건, 제시한 돈이 모자랐다는 뜻이야. 돈 앞에 장사 없어.”

“…반박할 말이 없네요. 더블 엔터테인먼트 김기수 사장에게 실장님이 오디션 면접자로 간다고 말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SN 엔터테인먼트 이수남을 찾아서 연락하고 미팅 일정 잡겠습니다.”

“김현성 사장은 당연히 같이 가야 할 것이고. 더블 엔터 김기수 사장도 같이 가는 걸로 하지. 같은 업계에 있었으니 서로 알고 있을 거야. 아는 사람이 나오면 더 마음을 놓지 않겠어? 안 그래도 자금이 상당히 쪼달리고 있을 거야.”

“예. 실장님.”

* * *

다음 날인 1995년 1월 17일.

수안이 예상했던 대로 일본에서 고베 대지진이 발생했다.

-오늘 새벽 5시 46분 일본 효고현 남부의 항구도시 고베를 비롯한 간사이 지방에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강력한 지진의 위력 앞에 도시는 무력했습니다. 많은 가옥이 파손되었고 인명피해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자세한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계속 전하겠습니다.

긴급 속보는 일본의 뉴스 화면을 그대로 받아 중계하는 수준이었지만, 참상은 고스란히 비추고 있었다. 아직까지 피해 상황 집계도 못 하고 있었다.

“결국… 터지고 말았어….”

자신의 기억이 망상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증명이었지만 씁쓸한 마음이다.

차라리 자신의 기억이 틀리고 많은 사람이 살아남는 편이 나았다.

.

.

.

수안은 더블 스타로 출근하면서도 가라앉은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자리에 앉은 수안은 배영성을 부르려 전화기를 들다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가라앉은 기분이 더 나빠졌다.

“배 이사. 내 자리로 와.”

-예. 실장님.

사무실에 도착해서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는 배영성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수안은 막 입을 열려던 배영성에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입에다 손가락까지 펴고 입을 열지 말라고 하고 있었다.

“……?”

“오늘은 아무런 보고도 받고 싶지 않아.”

수안은 메모지에 자필로 전할 말을 적어 배영성에게 보였다.

-우려하던 비서실 시선이 이쪽으로 향한 것 같아. 이제 외부 업무 보고는 사무실에서 금지야.

“……!!”

전화기를 보자마자 뭔가 어색한 기분을 느낀 수안이다.

회사에 아무도 없는 사이 누군가 다녀간 것이 분명했다.

수안은 일부러 자신의 사무실 전화기를 미세하게 비틀어 놓고 퇴근하곤 했는데, 오늘 아침 전화기는 정확하게 제 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 후 고개를 들어 루틴으로 맞춰 놨던 사무실 내부의 물건들을 확인하니 몇 개의 물건이 미세하게 조정되어 있었다.

누군가 다녀갔다는 뜻이다. 그리고 의심할 만한 곳은 강운 그룹 비서실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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