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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무슨 수로 기업이 망할지 안 망할지 알아?”

“나중에 아버지가 부르시면 그때 얘기 드릴게요.”

IMF를 넘지 못하고 부도를 맞이하는 회사들이 대부분이다. IMF를 넘겨도 크게 축소되어 사양 산업이 되는 기업들도 들어 있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생각 자체가 글러먹은 총수들의 회사였다.

2차 분류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눠졌고, 역시 오른쪽으로 분류된 서류는 폐기 대상이다.

“여기도 5년 내로 망하니?”

“5년 내로 망하진 않지만 내리막이라고 해야 하나? 발전 가능성이 없어요. 한 10년 지나면 망하겠죠.”

이도 저도 아닌 회사들이다. 지금까지는 권력과 결탁해 살아남았지만, 앞으로는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도태의 길을 걸어갈 회사들이었다.

“나 참. 내 아들이지만 너도 너무한다. 남은 서류가 몇 개야?”

“여기… 두 명 남았네요.”

수안의 왼쪽과 오른쪽에 하나씩 들린 서류에는 투실투실한 얼굴의 여성들이 남아 있었다.

“…외모는 안 보니?”

“본 건데요?”

복스럽고 후덕한 얼굴, 그리고 집안 가업은 꾸준하게 살아남아 훗날에도 재벌 기업으로 평가받을 회사였다. 집안의 흥망성쇠까지 자식의 관상에 확실히 들어 있었다.

‘복이 덕지덕지 붙었어. 아주.’

수안 혼자만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보긴 뭘 봐? 넌 대체 미적 감각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어머니 방에 제가 그린 그림이 걸려 있잖아요. 저보고 전시회 열 생각 없냐고 물으셨으면서 이제 와서 미적 감각을 문제 삼으시면 안 되죠.”

어려서 배운 그림은 높은 미적 감각을 가진 어머니의 눈에도 들어올 정도였다.

“…그림은 잘 그리면서 왜 여자 보는 눈은….”

“난 엄마가 제일 예쁘더라.”

어머니는 필사적으로 기쁜 감정을 감추고 말했다.

“흐흡. 그런 소리로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여기 보시라고요. 은성 쪽은 괜찮지 않아요?”

다른 한 곳은 작은 회사였지만 럭키 은성은 누구라도 잘 아는 대기업이었다.

“비서실에서 여긴 왜 넣었지?”

“우리 강운 전자랑 경쟁하는 기업이기도 하지만, 이미 혼맥으로 얽혀 있어서 좀 그렇죠?”

“회장님이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

“아니면 여기도 괜찮으니까 뭐.”

나머지 한 곳은 의약품과 화장지를 만드는 오랜 역사의 기업이다.

재벌가라고 하긴 민망하다. 이미 창업주 일가가 회사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거긴 우리 집안이랑 엮이고 싶어 할지 모를 일이고.”

정확하게는 수안의 엄마부터 원하지 않는 곳이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나 진짜 연애해요?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한다면 하는데?”

탁.

“알았어!”

수안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은 어머니는 아버지와 상의해 본다는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이제야 제대로 된 선을 보겠네. 흐흐.”

* * *

다음 날 저녁 수안의 어머니는 출장에서 돌아온 강운모 회장에게 얇은 서류를 내려놨다.

“뭔데?”

“수안이가 고른 며느릿감이요.”

“비서실이 준비한 가운데서 고른 거지?”

“맞아요.”

강 회장은 서류를 보지 않고 나머지의 행방을 먼저 물었다.

“나머지는 왜 싫다고 해?”

“…곧 망할 회사들이라 싫다고 하네요.”

“…뭐?”

비서실에서 고르고 골라서 준비한 리스트였다.

최학주 실장까지 비서실과 함께 마지막까지 고심했다고 보고 받았다.

그런 회사가 곧 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는 아니고요. 그냥 싫은 곳도 있겠죠. 얼굴도 봤다고 했으니까.”

강 회장은 아들이 괜한 핑계를 댔다고 생각했다.

“참나. 얼굴 따지기는… 수안이 아직 어리긴 해.”

강 회장은 그렇게 말하며 수안이 고른 서류를 들춰봤다.

“흠….”

복스럽게 생긴 여자가 환하게 웃으며 강 회장을 반겼다.

강 회장은 아내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수안이가 얼굴을 보고 골랐다고?”

“당신이 봐도 이상하죠? 내 눈이 이상한 거 아니죠?”

“뭐. 맏며느릿감이긴 한데….”

조선 시대에나 어울릴 소리였지만, 수안이 고른 여성들의 얼굴을 보니 절로 그런 말이 나왔다.

“그리고 그 애들 어느 집안 자제들인지 좀 봐요. 수안이는 골라도 그런 기업 아이들을 골라서….”

“럭키 은성, 유한 양화? 이 집안 자제들이야?”

“맞아요. 게다가 럭키 은성은 벌써 우리 쪽과 이미 사돈 관계이기도 해서 좀 그래요.”

“은성은 안 돼.”

강 회장의 형제와 이미 맺어진 은성이다. 안 그래도 국내 재벌가에서 혼맥으로 이어지지 않은 기업이 없다 할 정도로 방대한 혼맥을 자랑하는 은성이다. 여기에 자산의 아들까지 끼워 넣고 싶지 않았다. 장자 상속의 절대 원칙을 지키고, 딸에겐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는 기업이었다. 수안이 결혼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럼 유한 양화만 남는데… 여긴 이제 재벌 일가라고 하기도 좀….”

전문 경영인을 가장 처음 도입한 재벌가였고, 초대 회장 사후에도 이 원칙이 지켜지고 있었다. 초대 회장과 피는 이어졌을지라도 현 유한 양화와 어떠한 접점도 없는 여식이었다.

“나가서 수안이 불러와. 둘이 얘기 좀 해 봐야겠어.”

“얼른 불러올게요. 당신이 잘 타일러 봐요.”

* * *

수안은 조용히 서재로 들어왔다.

“아버지. 출장은 잘 다녀오셨어요?”

밖에서는 회장님 집 안에서는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었다.

“출장이야 뭐… 앉아라.”

“예.”

“네 엄마한테 얘기는 들었다. 예쁜 애들을 다 치워 버렸던데?”

“얼굴이 예쁘면 뭐 합니까. 예쁘다고 시부모 잘 모실 것도 아니고요.”

“흠흠….”

아들 녀석의 기준은 남달랐다.

“듣자 하니 네가 제외시킨 회사들 중에 곧 망할 회사들이 있다고 했다지?”

“예. 조만간 닥쳐올 위기에서 많은 기업들이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요.”

“위기?”

“아시아에 들이닥치는 금융 위기예요. 지금은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안타깝죠.”

직접 이 얘길 하려고 일부러 어머니를 통해 전달했다.

“…자세히 설명해 봐.”

“맨입으로요?”

“…….”

아버지가 찌릿 쳐다보는 눈에 수안은 얼른 설명을 붙였다.

‘어휴. 언제나 포스가 남다르셔.’

“유동성 위기가 다가오고 있어요. 아직 우리나라는 금융에 무지한 상태죠. 금융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 유태인들은 아시아를 먹어 치울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위기 원인이 뭔데? 금융이라고 퉁 치지 말고 자세하게 얘기하란 말이야. 증거를 대라고.”

이제 막 1995년으로 들어가는 때였다. 1997년 말에 도래하는 IMF 위기까지 2년 넘게 남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증거를 내밀어도 이해시킨 어려운 일이다.

“증거는 없어요. 하지만 멕시코를 보시면 답이 나오죠.”

“뭐 임마! 우리나라 위기에 왜 멕시코를 끼워 넣어?”

수안은 이럴 때를 대비해서 자신을 어필해 왔다. 이제 이를 활용할 차례다.

“저라면 그랬을 테니까요.”

“너라면?”

“제가 미국 금융을 손에 쥐고 있다면 먹음직스럽게 자라난 아시아를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아시아는 선진국이 보기에 이제 막 열매를 맺고 있는 작물에 불과해요. 잘 익으면 결실을 따서 배를 불리기만 하면 되죠. 멍청하고 미개한 아시아는 그들의 좋은 먹잇감일 뿐입니다. 멕시코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상 수지의 만성적인 적자 그리고 대외 채무 부담 가중… 거기다 외국 자본에 지나친 의존으로 금융 위기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미국과 IMF가 나선다는 말이 나오고 있죠. 계획된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진 금융이 나라를 위기에 빠트린다고?”

“역시 이해가 빠르시네요. 회장님.”

이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직함으로 호칭을 바꿨다.

“위기라면 언제?”

“올해 아니 내년 초에 강운 자동차가 출범한다죠?”

할아버지의 숙원이 아버지에게도 이어진 결과물이다.

1995년 3월 강운 자동차 출범이 예정되어 있었다.

‘취미생활은 방구석에서 혼자 하실 것이지….’

과거 삼디에서는 차를 만들어 보겠다고 폼 잡다가 큰 손해를 입는다. 삼디에서 거하게 말아먹어야 했는데, 이를 강운에서 따르고 있었다. 재계 순위에 변동이 생기며 발생한 나비효과라고 할 수 있었다.

“말 돌리지 말고!”

말을 돌리기 위해서 강운 자동차를 언급한 것은 아니었다.

“강운 자동차에서 3년 뒤 신차를 선보이기 전에 우리나라에 위기가 도래할 가능성이 99%예요.”

“…99%?”

과거 삼디 자동차 출시 전에 터진 IMF 덕분에 삼디 그룹은 첫차를 출시하고 곧장 말아먹는다. IMF를 신청했다고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IMF 구제 금융을 신청한 뒤로 많은 기업들의 부도와 워크아웃 기사가 저녁 뉴스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강운 그룹이라고 해서 피해갈 수 없다.

“예. 회장님께는 미안한 말씀이지만, 강운 자동차도 살아남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도 회장님이 건실하게 경영을 하고 계시니 그룹 전체는 대부분 무사하겠죠. 위기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 박수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넌 오지도 않은 미래를 마치 사실처럼 말하는구나.”

호황이 지속되는 한국이었다. 기업은 문어발식으로 기업을 확장하면서 외형을 키워나가고 있었으며, 이는 96년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대외 적자를 기록해도 정부가 우리 경제는 튼튼하다는 식으로 말하며 경제에 무지한 정치인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 준다. 하지만 정치인의 무지를 탓하기도 어려운 것이 지금 수안의 말을 듣는 강 회장마저 도래할 금융 위기를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젠장. 너무 나갔나 보네.’

그래도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제가 지금까지 사업적인 시각에서 회장님께 고언을 드린 것 중에 거짓이 있었던가요?”

“…강운 자동차는 절대로 망하지 않아. 네 할아버지의 숙원 사업이기도 했지만, 나의 숙원이기도 하다. 어떻게 준비한 자동차 사업인데….”

이전 정권부터 설립을 추진했지만 번번이 막히다가 이번 정부에 들어서서 겨우 승인을 받았다.

“저도 회장님과 같이 생각하라 이 말씀이죠?”

“넌 위기가 온다는 가정하에 타개책을 찾아야 할 것 아냐! 그냥 망한다고 말만 하면 끝이냐?”

“어차피 우리에게 외국 거대 자본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우린 지옥의 틈바구니에서 알짜 기업을 담으면 그뿐입니다.”

“……!”

“회장님. 돈 냄새가 풀풀 풍기지 않습니까?”

비밀을 얘기하듯 속삭이며 말하는 수안의 물음은 강 회장의 귀에 달콤하게 들려왔다.

“…가능성이 99%라고 했지….”

3년 내에 나라에 위기가 도래할 가능성이 99%라고 했다.

예측된 위기는 곧 기회나 다름없었다. 남들이 위기에 빠진 동안 날아갈 기회였다.

“다른 모든 기업이 죽네 사네 허우적거리고 있어도… 제가 있는 강운이 그래선 안 되죠. 미래는 준비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바로 우리 강운이 갖게 될 겁니다.”

“경제 연구소에 분석해 보라고 해야겠군.”

“…회장님.”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아무나 예측할 수 있다면 위기가 존재할 리 없죠. 인간은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에 위기를 맞게 됩니다.”

“너 혼자도 예측했는데, 박사급 엘리트가 즐비한 경제 연구소에서 못할 것 같으냐?”

수안의 대답은 간단했다.

“예. 못합니다.”

“…못해?”

“국가의 이기심과 투자자들 개개인의 욕망 그리고 각국의 온갖 조건들이 맞아떨어지며 발생할 위기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미래를 예상하는 강운 경제 연구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죠.”

“네 예측이 거짓으로 드러날까 겁나는 것은 아니고?”

“아버지.”

수안은 화를 내지도 않고 비웃지도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응시하며 말했다.

“제가 일부러 아버지를 속일 필요는 없습니다. 저 잘났다고 자랑할 것 같으면 제가 지금까지 올린 수익률을 보고 드렸겠죠.”

“…….”

“다가올 위기는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기업과 온 국민을 수렁으로 밀어 넣을 겁니다. 저는 아버지가 대한민국 재계 1위의 대기업 총수로서 정면에서 위기를 돌파하는 첨병이 되시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믿지 않으신다면 앞으로 회사 업무나 경제 상황에 대해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을 자제하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이번에 졸업하면 회사로 들어와.”

강 회장 입장에서 나름 양보한 화해의 손길이었다.

“내년에 졸업하고 10년 정도는 제가 일으킨 회사를 키우는 데 주력하겠습니다. 그동안은 동생들이 회사에서 자리 잡길 바랍니다. 동생들도 다들 욕심이 있을 텐데, 기회도 주지 않으면 서운하지 않겠습니까.”

“네가 들어와서 동생들을 가르치면 되지 않느냐.”

“스스로 성장하지 않으면 언제고 파탄이 드러나게 됩니다. 아버지의 자식들이고 제 동생들이죠. 처음엔 방향을 몰라 헤매겠지만, 아버지 핏줄의 진가가 드러날 겁니다. 그러니 동생들 믿고 기다려주십시오. 저도 10년 후에 크게 성장해서 돌아오겠습니다.”

수안이 독립하겠다는 말처럼 들려왔다.

“…집에서 나간다는 말은 아니지?”

“…제가 나갔으면 싶으세요? 저 아무리 구박하셔도 집에선 안 나갑니다. 아버지 어머니 평생 제가 모신다고요.”

당장 경영자 수업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집에서 나가 독립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럼 됐다. 10년 정도야 상관없겠지.”

“감사합니다. 열심히 키워 보겠습니다.”

수안은 나가지 않고 멀뚱히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왜 또?”

“저… 신붓감은 언제 만나는데요? 제가 둘이나 골랐잖아요.”

“둘은 무슨! 둘 다 안 돼! 다른 애들로 골라!”

“애도 잘 낳게 생겼던데….”

“넌 애 잘 낳고 부모만 잘 모시면 조건이 끝이야?”

이 역시 간단하게 답할 수 있다.

“네.”

“…이 녀석이! 비서실에서 다시 만들어 올 테니까 그때 다시 골라!”

“…겨우 골랐는데… 그럼 나중에 마음에 드시는 신붓감으로 다시 골라 보겠습니다.”

“나가 봐.”

“마음 푸시고 편히 쉬세요.”

“그래.”

수안을 내보낸 강 회장은 며느리 문제보다 위기 문제로 고민이 깊어졌다.

‘3년 내에 도래할 위기라….’

수안은 콕 집어서 금융 위기라고 말했었다.

‘경제 연구소에 맡겨 봐야겠어.’

경제 연구소는 절대로 자신과 같은 결과를 도출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만, 강운모 회장은 엘리트들이 모이면 수안보다 더 높은 수준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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