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선택의 기준 (34/304)

선택의 기준

“한신아와지 대지진이라고도 불러. 사망자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1만 명 이하였어. 부상자는 2만에서 3만. 이재민 20만 이상. 일본 조선, 철강의 중심지 고베가 완전히 박살 나게 될 거야. 사회기반 시설이 파괴되고 물동을 책임지는 항만까지 부서지면서 지역 산업 활동이 마비되어 버리지. 피해 규모가 150조 원 수준이었던가….”

수안의 예언 중에 가장 엄청난 규모의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가 발생하는 재난이었다.

“마, 막아야… 무조건 막아야 합니다!”

“이건 못 막아. 우리가 대피하라고 할 수도 없어. 무슨 수로 지진을 예측했다고 할 건데? 그리고 이건 성수대교나 삼풍 백화점과는 결이 달라. 자연재해라고.”

“…으윽.”

배영성은 머리를 쥐어뜯었지만 없는 방법이 나올 리가 없었다.

“차진호 지사장에게 혹시라도 우리 직원들 피해 없도록 미리 언질해 줘. 지금은 우리라도 피해를 입지 않는 것이 최선이야.”

“휴우….”

수안은 배영성의 침울한 표정에 지진 후 발생하는 일을 하나 덧붙였다.

“지진이 발생하고 일본인들은 외국인들이 약탈을 자행한다는 둥,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이 불을 붙였다고 하는 둥 유언비어를 퍼트린 적이 있어. 알지? 1923년 관동 대지진에 조선인을 학살한 일본의 만행. 관동 대학살이라고도 부르잖아.”

관동대지진이 발생하고 분노를 외국으로 돌린 일본인들은 한국인과 중국인을 학살했다. 당시 지진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분노한 일본인의 집단 광기로 인해 한국인이 죽어 나간 것이다.

“또 그런 일이 발생한단 말입니까?”

“관동 대지진 때와 같지는 않지만, 유언비어가 퍼지는 것은 사실이야. 우리가 이런 놈들을 생각해 줄 필요가 있을까? 2011년에 발생할 동일본 대지진에서도 다른 의미로 같았지. 한국은 지진으로 큰 아픔을 겪는 일본을 생각해서 성금을 모아 기탁했지만, 일본 언론 어디에서도 미국 다음으로 큰돈을 성금으로 낸 한국민의 온정을 자국민에게 알리지 않았어. 일본인들은 한국이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었지. 성금뿐이겠어? 직접 일본에 가서 도움을 준 사람도 있고, 물품을 기부한 사람도 많았어. 하지만 일본인은 아무도 모르지. 일본은 그런 곳이야. 믿을 필요도 없고 믿어서도 안 되는 곳. 국가 간의 협의조차 신뢰할 수 없는 나라.”

수안이 설명하고 나서야 배영성은 일본에 가졌던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이번 일은 철저하게 일로서만 생각하겠습니다.”

수안은 배영성에게 대지진을 말하고서야 후일 문제가 되는 후쿠시마 원자로에 생각이 미쳤다.

‘다른 건 몰라도… 원전 폭발은 대비를 해야 하는데….’

해산물을 좋아하는 수안은 바다에 퍼질 원전 오염수가 걱정이었다.

나중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도 물고기를 먹고 바다에서 놀아야 할 것이 아닌가. 바다는 인류 미래 세대를 위해서도 꼭 지켜야 했다. 일본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후쿠시마 원전을 관리하는 도쿄 전력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아직은 방법이 없지만, 일본에서 투자 회사의 영향력이 커지면 방법이 생길 것 같았다.

일본 투자 회사의 영향력 증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다.

“그리고 4월에 엔화 가치가 엄청나게 올라갈 거야.”

바로 돈을 쓸어 담는 것이다.

“대지진을 겪었는데도 말입니까?”

“자연적인 현상은 아니야. 올해부터 일본 정부가 억지로 끌어올린 엔고 상황에, 본국이 위기에 처했으니 해외 일본 기업들이 투자된 엔화 자산을 매각하면서 발생하는 엔화 수요가 넘쳐나거든.”

“지금은 달러당 100엔 근처입니다.”

“4월 초 달러당 엔화가 85엔 밑으로 내려와.”

“후아… 이것도 차진호 지사장에게 확실하게 지시하겠습니다.”

“오래 지속되는 것은 아니야. 바로 100엔을 다시 돌파할 테니까.”

“양쪽으로 먹을 수 있겠습니다. 더 좋군요.”

“일본은 그때부터 엔화 가치 상승을 끝내고 가라앉기 시작해. 지금까지 미국이 많이 봐줬지만 앞으로는 소용없지. 그래도 이미 엔화 가치의 존재감이 드러났어. 앞으로 올랐다 내렸다 롤러코스터를 탈 거야. 3년 뒤 최저점을 찍고 2년 뒤 다시 반등, 다시 2년 뒤 최저점, 다시 2년 뒤 반등. 향후 몇 년간은 먹을 게 많겠어.”

“독립 운동은 못 했어도 일본만큼은 벗겨 먹어야겠습니다.”

“크큭. 여기 내 동지가 있었네.”

“그럼 일본은 주식 투자에서 아예 발을 빼야 할까요?”

“아니.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출 기업이 살아나. 미국 대형 자동차 회사가 몰락하고 일본의 도요타가 미국 자동차 시장을 잠식하지.”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더니….”

“고루한 장인 정신이지만, 제조업만큼은 대단하잖아. 우리나라도 여전히 일본 경제와 발을 맞추고 있고. 일본은 개구리가 솥에서 삶아지듯이 천천히 죽음으로 향하게 될 거야. 아직은 스스로가 모를 뿐이지.”

“…가끔 실장님 얘기하시는 것 들어 보면 저보다 훨씬 오래 사신 것 같습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야.”

“…미래를 얼마나 오래 보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지금까지 배영성은 수안이 꿈에서 보듯이 미래를 본다고 생각했지만, 광범위한 미래를 기억하고 있어 다른 방식으로 미래를 본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미래를 본다고 해서 잠깐씩 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남들 세상 사는 것처럼 오랜 시간 봐 온 미래가 49년이야. 마지막 기억은 2020년까지. 하지만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지. 그리고 다시 볼 수도 없어. 한 번 본 것이 끝이야.”

진짜 살다 왔지만,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사람들이다.

“힉!”

“지금 배 이사 나이보다 많네. 그래서 내가 배 이사에게 이렇게 마음 놓고 반말을 하나 봐.”

“…한참 형님이셨네요. 반말이 당연했습니다.”

“형님은 무슨….”

배영성은 수안이 왜 그렇게 깊은 눈빛을 가졌는지 이해 할 수 있었다.

“이제 내년 문제는 끝이지요? 더는 듣기 무섭습니다.”

“뭐… 별거 없어.”

도쿄 지하철에 사이비종교 신봉자가 사린가스를 살포해서 사람들이 죽는 일이 발생하지만 수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막아?’

“국내 업무로 돌아가자. 김현성 사장에게 통신 회사 인수에 속도 내라고 하고, 안랩이라는 연구소가 생기기 전에 한발 걸치라고 해 줘.”

“안랩…. 뭘 연구합니까?”

“컴퓨터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곳이지. 그리고….”

수안은 안랩의 설립 목적과 설립하는 사람이 의사 출신이라고 알려줬다.

배영성은 같은 의사 출신이라는 말에 상당한 친밀감을 느낀 모양이다.

“오오. 역시 의사들이 한번 하면 어지간한 전문가보다 낫죠.”

“자화자찬인가? 뭘 하느냐에 따라 다른 법이야.”

“어쨌든 김현성 사장하고 잘 만나서 구슬려 봐. 우리가 SJ 컴퓨터를 소유하고 국내에 보급하고 있다는 것도 상당한 메리트가 있는 일이야.”

“한컴처럼 설치된 채로 판매를 진행할 수 있겠네요?”

기본 소프트웨어에 설치하는 방식으로 사용자를 늘릴 수 있다.

아직 연구소를 설립하지도 않은 안랩 입장에선 충격적인 제안이 될 것이다.

“그렇지. 그리고 마이크로 소프트 쪽은 주식 매입에 문제없지?”

수안의 머리에 불쑥불쑥 떠오르는 생각들 때문에 대화 주제가 수시로 바뀐다.

SJ 컴퓨터에 한컴과 안랩을 묶을 생각을 하다 보니 중심 운영체제인 윈도우95에 생각이 도달한 것이다.

“약간 비싼 감은 있는데 미국 지사에서 꾸준히 매입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팍팍 사라고 해. 폭등할 테니까.”

“오오. 어디까지 갈까요?”

“지금이 4달러 언저리였지? 올해 윈도우 95가 발표되고 들썩거릴 거야. 엄청나게 팔아먹거든. 그리고 99년 11월에 58달러까지 갈 거야.”

그 뒤에 IT 버블이 터지면서 폭락하지만 아직 거기까지 말하긴 이르다. 구글과 애플이 부상하는 것도 아직 먼 얘기였다.

“와아!”

“이걸로 놀라면 어떡해? 2020년엔 205달러까지 오르는데.”

지금은 뒤로 밀린 삼디 전자만 해도 2020년까지 매출액, 영업이익이 가파른 성장을 보였었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성장도 수안에겐 대단치 않은 성장이었다.

“으아아아!”

“됐고. 나가 봐. 이제 나도 정리 좀 하자. 문득문득 떠오르는 일들이 있어서 미리 정리 좀 해야겠어.”

배영성이 잔뜩 흥분해서 밖으로 나가고 나서 수안은 창밖에 지나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마음을 다스렸다. 앞으로의 일을 정리한다고 했지만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기 위함이다.

‘…49년… 내가 살아온 시간.’

배영성에게 가볍게 얘기했지만, 가벼운 사안은 아니었다.

자신의 입으로 과거를 말함으로써 과거의 상념을 표면으로 끌어올렸다.

현생의 시간이 길어지며 과거의 정체성과 기억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

자의식이 수안으로 고정되며 생긴 현상이다.

금용으로 살았던 시간이 어쩌면 꿈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꿈은 아니었어. 그건 사실이야.’

사실이 아니면 안 된다. 미래를 사실로 여기고 삼풍 그룹 회장을 암살했고, 미래의 대통령을 두 명이나 암살했다. 어찌 보면 죄가 없는 사람을 죽인 것과 같았다.

‘삼풍 백화점도 부실이 드러났고, 성수대교도 붕괴 위험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생각하던 대로 김일삼 대통령이 정책을 시행하고 있어. 난 미치지 않았어.’

스스로가 미치지 않았다 자위하며, 앞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만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좋다 이거야….’

과거로 돌아와 과도하게 개입한 역사가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짐작할 수 없었다.

자신을 과거로 돌아오게 만든 존재도 이러한 자신의 행동을 원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죽이는 건….’

[너는 스스로 바른길을 찾아 나아갈 것이다.]

신의 또 다른 축복이 그에게 머물고 있었다.

* * *

수안은 끈덕지게 달라붙는 상념을 떨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고민해도 답은 없어….’

집에는 수안의 어머니가 언제 아들이 돌아오나 기다리고 있었다.

“얘는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 회장님이 출장 가셔서 없는 날은 너라도 일찍 들어와야지.”

“기다리셨어요? 오늘 일이 좀 많아서.”

“이리 앉아 봐.”

“예.”

어머니는 소파에 앉아서 수안을 보고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

“엄마가 네 신붓감 고르느라 흰머리 나게 생겼어.”

“어휴. 아직 시커멓기만 한데요 뭐. 그리고 엄마는 곱게 나이 드실 거야. 흰머리 좀 나면 어때요? 미모가 받쳐 주는데.”

“호호호. 아차. 내가 이럴 때가 아닌데.”

수안의 말에 절로 기분이 좋아지던 찰나 본인의 임무가 다시 떠올랐다.

“아무리 봐도 난 모르겠더라. 그러니까 아들이 직접 골라 봐. 네 신붓감 말이야.”

“…연애하라고요? 저 연애에는 소질 없거든요? 내가 누굴 만나 봤어야 알죠.”

재벌가 맏아들에 올림픽 스포츠 스타인 수안이다. 누구든 만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지만, 집안과 부모님을 생각하면 차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여자는 모른다면서 상대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렇게 자리를 박차고 나오니?”

“그야….”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랬다.

아무리 부모님 추천이라도 그런 여자를 만날 수야 없지 않겠나.

‘나중에 시댁에 과자 봉지나 집어 던질 여자를 어디 집에 들여?’

“됐고.”

어머니는 옆에 놓여 있던 두꺼운 서류 뭉치를 들어 수안 앞에 내려놨다.

턱!

“네가 이 중에서 직접 골라.”

“…이게 뭐예요?”

“뭐긴. 비서실에서 고르고 고른 예비 며느리 목록이지.”

“풉!”

“웃어?”

“아. 죄송. 그래도 잘하셨네. 차라리 내가 고르는 편이 좋긴 하겠어요.”

“골라봐.”

“어디 보자….”

수안은 1차로 서류를 분류했다. 슬쩍 살펴보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눴다. 1차 분류를 끝내고 오른쪽 서류 뭉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2차는 얼굴이다. 어떻게 구했는지 프로필 사진까지 들어 있어 보기가 수월했다.

“…이쪽은 아예 빼 둔 거야? 나중에 보려고?”

“아뇨. 그쪽은 제외예요. 볼 필요 없습니다.”

“왜? 여기 괜찮은 집안 애들이 상당히 많은데….”

어머니는 오른쪽 서류를 하나씩 들춰보며 의아해했다.

“나중에 아버지랑 다시 상의해 보세요. 오른쪽으로 분류한 기업들은… 5년 내에 망할 기업들과 영 문제가 많은 회사들이에요.”

“…뭐?”

오른쪽에 놓인 서류엔 대기업도 수두룩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