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한 불씨
“그래! 밖에서 비슷한 일하는 오빠를 물 먹이려면 네가 강운 전자로 들어가는 방법이 최선이란 말이야.”
“하하… 누나 머리 좋은데?”
“네가 멍청하다는 생각은 안 하냐?”
“자꾸 그런 소리 할 거야?”
“알았어. 알았어. 이제 멍청하다는 소리 안 할게. 바보야.”
“진짜!”
“…지금 화내는 데 기운 쓰지 마. 그 기운을 전부 수안 오빠에게 돌려. 그래도 우리 힘이 부족하니까. 알았어?”
“아주 날 가지고 놀아….”
“그리고 너도 수안 오빠 하는 일에 관심 좀 가지고. 그래야 네가 견제를 해도 할 수 있을 거야. 알았지?”
“알았어. 그런데 형이 가진 회사는 그게 전부야? 다른 회사는 없어?”
“오빠가 작정하고 숨기면 우리가 알 수 있을 것 같아?”
“…아버지는 알지 않으실까? 우리 비서실 유능하잖아.”
“이것도 어머니 통해서 들었어. 어머니도 아버지가 비서실에서 물어다 준 소식을 들어서 알고 계신 거야.”
“어머니가 전해 주신 소식이면 확실하겠네. 오케이. 나도 더 확인해 볼게.”
“그래서 강운 전자로 갈 거야?”
“아니.”
“뭐? 넌 지금까지 뭐 들었어?”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생각 안 해? 안 가겠다는 말이 아니야. 우선 본사 직원들이 진짜로 그렇게 대단한 놈들인지 미리 파악은 해야지. 그리고 강운 전자에 가서도 본사에 끈이 있으면 좋지 않겠어? 한번 전자로 빠지면 본사로 가는 일이 쉽냐? 하지만 본사에서 전자로 이동하는 것은 쉬울 거 아냐.”
수용도 머리가 없지 않다. 한국대에 들어갈 정도면 수준 이상의 머리를 갖췄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 음….”
수진은 동생의 말을 듣고서야 다른 길을 봤다.
자신의 계획에 매몰되어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이왕 우리라고 했으니 앞으로 계획이 필요하면 머리를 맞대자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올라가니까.”
“그래. 네가 재수라도 한국대에 갈 실력은 된다는 걸 내가 깜빡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확인하자.”
“말해.”
“우리가 힘을 합하는 목적이 뭐야?”
“그야….”
수진과 수현은 딸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강운에서 무엇 하나 물려받지 못할 위기감을 함께 느끼고 있었고, 여기에 수용을 더해 자신들의 입지를 마련할 생각이었다. 입지는 다른 말로 하면 지분이었고, 또 다른 말로 하면 계열사라고 할 수 있었다. 즉, 자신들의 몫으로 강운의 회사들 중 일부를 받고 싶다는 의미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수현은 목적을 밝히기 어려웠다.
말하지 않아도 수용이 모를 일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멍청해도 이건 알아. 할아버지 때부터 아버지까지 마찬가지였어.”
“뭐, 뭐가.”
“아버지가 강운을 자기 손으로 쪼개서 가업을 토막 내진 않을 거라는 거야. 아주 미미한 회사라면 모르지만 규모가 있는 계열사를 쪼개서 우리에게 나눠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고모님은 계열사를 분리하고 있어.”
“고모님이 가져가는 계열사야 직접 애써왔으니까 아버지가 선심을 쓰는 거고.”
“….래서? 넌 빠지겠다고?”
“아니. 오히려 내가 누나들을 끌어들여야 맞아.”
“…네가 우릴 끌어들여?”
“도와줘. 내가 강운을 오롯이 먹을 수 있게.”
“…뭐? 네가 다 먹겠다고? 그런 말을 내 앞에서 너무 당당하게 하는 거 아니니?”
수현은 동생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까지 자세히 설명했음에도 동생은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겨우 이런 녀석을 데리고….’
“난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달라. 이미 누나도 알지만, 내 능력부터가 부족이야. 국내 재계 1위 타이틀은 내가 감당하기 힘들어. 난 누나들과 쪼개서 가지고 싶어. 물론! 그 전에 내가 다 가져야만 가능한 일이야. 아버진 절대로 강운을 나누지 않으실 테니까.”
“그러니까. 아버지께 네가 모두 이어받아서 나누시겠다?”
“아니면 방법 있어? 아버지에게 반기라도 들고 싶어? 아버지 지배력에 흠집이나 날까? 누나는 이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
“…불가능하지.”
강운은 강운모 회장의 공고한 성이다. 지금은 누구도 넘볼 수 없었다.
“나중에. 아주 나중의 일이겠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지분을 넘겨주실 거야. 오로지 한 사람에게.”
수안 아니면 수용. 둘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수현이 배팅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수용이다.
“어차피 누나들은 나 아니면 대안이 없어. 수안 형은 누나들과 손잡지 않아도 강운을 먹을 수 있으니까. 혼자서도 얼마든지 이 거대한 제국을 운영 할 수 있으니까.”
자신의 멍청함이 바로 무기였다.
“…수진 언니가 입국하면 자세한 계획을 짜보자.”
“나한테 올인?”
“당연하지. 네 말대로 수안 오빠에겐 아무것도 얻을 수 없으니까.”
“좋았어!”
수용은 이미 강운을 가진 듯이 기뻐했다.
“멍청아. 소리 지르지 마. 여기가 어디라고 그렇게 큰 소리를 내?”
“아차. 미안. 큰누나는 언제 들어와?”
“네가 전화라도 해 보지 그러니? 큰 언니한테 관심이 없었어도 이젠 좀 가져야 하지 않겠니?”
“…쏘리. 나 이제 대학 간다니까. 재수생이 어딜 신경 쓰겠어.”
“핑곗거리 있어서 좋겠다.”
.
.
.
수용은 어제 대화를 복기하며 슬쩍 미소를 흘렸다.
‘싸움은 이제부터야, 형.’
후계자 자리를 위한 경쟁의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엔 거액이 들려 있었다.
‘뭘 사러 갈까나.’
당장은 손에 들린 통장의 돈이 더 중요하다.
* * *
다음 날 사무실에 도착한 수안은 여전히 불퉁한 얼굴이다.
“운전 면허도 없는 녀석이 포르쉐를 고르고 있어.”
수용이 고른 차종은 포르쉐였고, 포르쉐는 수안 입장에서도 차마 고를 수 없었던 차종이었다.
“에이….”
수안은 아쉬움을 털어 버리고 일에 집중했다.
앞으로 회사를 키워나가려면 당장 처리할 일들이 산더미였다.
IMF가 오기 전에 미국 투자 회사를 통해 자금을 불려 놔야 했다. 그래야 수안이 노리는 회사들을 빼놓지 않고 날름 집어먹을 수 있었다.
삐익.
“배 이사 들어오라고 하세요.”
-예. 실장님.
인터폰으로 배영성을 부르고 다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부르셨습니까. 실장님.”
“앉아 봐. 이제 95년을 준비하자.”
“오라클의 예언인가요? 흐흐.”
“오라클은 개뿔… 예언이 아니라 사실이라니까.”
“이미 미래의 대통령까지….”
배영성은 말을 하다 순간 멈췄다. 함부로 입에 담을 말이 아니었다.
“배 이사도 아니다 싶지?”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실언을 했습니다.”
“여기 우리 둘밖에 없지만, 그래도 조심하자. 강운 비서실 알잖아? 아직은 내게 관심이 덜하지만 곧 도청까지 시도할지 몰라.”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말씀입니다. 날고 긴다는 친구들이 비서실 산하에 포진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비서실 산하 직원에서 차출된 최장호도 그중 하나였으니 나머지도 알 만했다.
“그 친구들을 어떻게 부리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지금은 잠잠하지만, 만약 내 동생들이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자식들 생각까지 알고 싶어 할 회장님이야.”
“실장님 동생들의 경우 아직 학생이니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며칠 전에 수현이랑 수용이를 회사로 부르는 편이 좋겠다고 말씀드렸어. 수현이는 고려 호텔로 가게 될 것이고, 수용이도 회장님이 적당한 회사로 부르실 거야.”
“…실장님이 직접 제안하셨단 말입니까? 왜 그런 짓을….”
가만 두면 시기를 늦출 수 있는 일을 왜 긁어 부스럼으로 만들었느냐는 질문이다.
“조금 일찍 배운다고 날 따라잡겠어? 배 이사.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푸훗. 생각해 보니 우습네요. 10년을 일찍 시작해도 실장님께는 어림도 없을 텐데.”
미래를 알고 있는 자신의 상사에게 동생들의 위협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문제는 있어. 첫째, 회장님이 나와 동생들을 주시할 여지를 준 것.”
아버지가 지시하지 않아도 아버지 곁의 최 실장이 알아서 면밀히 검토하고 보고할 것을 비서실에 주문할 것이다.
“둘째, 어머니의 동정심이 동생들에게 향할 것이라는 점.”
어려서부터 걱정 없던 수안과 달리 손이 많이 갔던 동생들의 경우 어머니가 더욱 신경 쓰고 힘이 되어 주고자 하실 것이다.
“셋째, 동생들이 회사로 들어가 날 견제할 수 있다는 것.”
동생들 머리가 어느 정도 컸으니 슬슬 자기 몫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과 비교 대상이 되는 수안을 깎아내리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워후. 문제점이 상당하네요.”
“그래도 막강한 장점이 하나 있지.”
“…실장님의 능력 말고요?”
“내 능력은 내 장점이잖아. 대신 동생들의 무능력을 계산에 넣어야 하지 않을까?”
“큭. 안타까운 일이군요. 저 같으면 일찌감치 포기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수안의 경영 성과와 사업 확장 능력을 보던 회장이 무난한 수준의 자식들을 보면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그 상황에 지금은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동생들이 회사로 들어가 봤자….
“일찍 들어가 봐야 지들 점수만 푹푹 까먹을 거야. 나야 구경만 해도 알아서 점수가 오를 일이지.”
지금까지 금융 실명제와 부동산실 명제의 예측을 통해 점수를 따냈고, 삼풍 그룹의 삼풍 백화점과 그 부지에 들어설 프리미엄 주상복합 구상, 경영혁신 방편까지 추가 점수를 따냈다. 거기다 향후 당선될 대통령을 정확하게 고르는 혜안과 정책까지 예측했다.
‘날 봐오던 회장님이 수용이나 수현이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실지 뻔하지.’
이것이 동생들이 회사 생활을 함으로써 얻는 이득이었다.
“경쟁자가 실장님인데, 회장님 눈에 차긴 힘들죠.”
“내 말이.”
동생들이 고난 속에서 성장할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를 견제는 미리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은 강운과 우리 계열사가 대립한다는 가정을 하고 준비해야 할 거야.”
“어휴. 강운에 비하면 아직 우리 회사는….”
“알아. 아직 멀었지. 겨우 중견기업으로 발돋움하는 중이니까.”
초기에 매입한 SJ 컴퓨터와 한컴의 경우 성장을 시작하는 단계에 있었고, 팬탁의 경우 준수한 매출을 보이며 커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중소기업이다. 새로 인수한 연예 기획사의 경우에도 미래에 빛날 원석들을 가져다 다듬고 있었으니 제대로 성장하려면 한참 남았다.
반면에 강운은 재계 서열 1위에 빛나는 국내 최고의 회사였다. 작정하고 수안의 회사를 고사시키자면 방법은 많았다.
“…그래도 회장님이나 동생들은 다른 쪽을 전혀 모르시겠죠?”
“아직. 이제 두 사람이 이곳으로 오는 것도 피해야겠어. 언제 꼬리가 잡힐지 몰라.”
다른 쪽은 미국 이방효 지사장과 일본의 차진호 지사장이 운영하는 투자 회사를 말함이다.
미국과 일본 지사를 생각하다가 배영성을 불러 하려던 말이 떠올랐다.
“아! 그리고 일본은 내년 초에 가지고 있는 일본 주식 일괄 처분하라고 해.”
“언제까지 처분하라고 할까요?”
“내년 1월 17일 고베 대지진이 오기 전까지만.”
수안이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일 중의 하나였다.
“고베 대지진 전까지…. 어?”
수첩에 메모하던 배영성이 수안의 말을 따라 하다가 우뚝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고베 대지진이라고요?”
또 엄청난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소규모 인적 재해가 아니라 거대한 자연재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