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시험 치르느라 고생 많았다.”
툭.
수용 앞에 강운모 회장이 내민 것은 여지없이 통장이다.
“네 명의로 만들어 둔 통장이다. 입학 전에 편히 써도 좋다.”
편히 써도 좋다고 했지만, 이것도 자식들 성향을 알아보는 시험의 일부였다.
수진과 수현의 경우 멋대로 자신을 위해 사용했지만, 수안의 경우 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하며 준 돈보다 더 많이 불려 강운모 회장을 흐뭇하게 했었다.
그리고 떡하니 사법 시험을 합격해 경제인 연합회 총수들 사이에서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어 주고 올림픽 금메달을 따와서 목에 걸어 주기도 했다.
지난번엔 삼풍 그룹 일에 의견을 내서 삼풍 백화점 자리를 인수하게 했고, 그곳 부지에 지을 프리미엄 초고층 주상복합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시시때때로 아들의 의견을 물어 경영에 참고할 정도로 수안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가던 아들이 커서도 예쁜 짓만 골라 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같은 한국대에 들어간 둘째 아들의 성과에도 기쁘다는 느낌은 없었다.
“흐. 감사합니다. 아버지.”
희색이 만연하여 통장을 받는 막내아들 수용을 보니 투자 수익을 기대하긴 어렵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수안이 놈이 별종은 별종이지….’
막내아들 손에 들린 통장의 돈 또한 두 딸들이 그랬던 것처럼 허황된 곳에 쓰일 것이 뻔했다.
‘열 손가락을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덜 아픈 손가락은 있기 마련이지.’
수안에게 줄 때는 아깝지 않았는데, 다른 자식들에게 줄 때는 아까운 마음이 먼저 든다.
강운모 회장의 경우 수안이 가장 아픈 손가락이다.
“입학하고 여유 생기면 얘기해라. 그룹 본사로 들어와서 일할 수 있도록 조처해 두마.”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도 있었고, 수안이 성장해 자신을 위협할 때를 대비한 보험이기도 했다.
“회사 발전을 위해 열심히 하겠습니다!”
수용은 자신감이 가득해 답하고 있었지만, 강 회장이 보기엔 치기 어린 행동이다.
* * *
서재에서 나온 수용의 들뜬 얼굴은 수안이 보기에도 치기 어려 보인다.
“좋냐?”
수용이 실실 웃고 있으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응.”
“앞으로도 아버지 말 잘 듣고 점수 많이 따. 그럼 또 기회가 생기겠지.”
점수를 많이 따라곤 했지만, 정확한 방법까지 일러주진 않았다.
지금 녀석의 품에 들어 있는 통장의 사용 방법부터 알려 주면 큰 도움이 될 일이다.
하지만 수안은 내버려 두었다. 대안으로 생각했던 막내아들이 대안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은 아버지 스스로가 느껴야 할 감정이다.
‘아버지. 손해는 감수하셔야 할 겁니다.’
“알았어.”
“아버지가 뭘 줬는지는 내가 알 바 아니고… 형 된 입장에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선물 골라 봐. 네가 원하는 것.”
“진짜?”
“…설마 내 차 달라고 할 건 아니지? 그거 빼고 골라라. 뭐든 사 줄 테니까.”
“그걸 딱 제외시켜?”
“어쭈? 형님 차를 탐내냐? 사 주면 될 거 아냐?”
“오오! 진짜로 사 주려고?”
“차 사 줘?”
“응!”
“내일 사러 가자. 대신 운전 면허는 따고 운전대 잡아라. 알았지?”
“당연하지!”
* * *
다음 날 수안은 동생 수용에게 차를 사 주며 거하게 뜯겨야 했다.
“…뭘 이렇게 비싼 차를 골라?”
1억이 넘어가는 스포츠카를 고른 녀석이다.
“찻값이 다 이렇지 뭐.”
“이 돈이면 차라리 집을 사야지. 집을 사면 나중에 오르기라도 할 거 아냐?”
자동차는 시간이 지나며 가치가 0에 수렴하는 소모성 지출이지만, 집을 사는 것은 되팔 수 있는 자산 형태의 투자라고 할 수 있었다. 미국과 일본에 이어 국내까지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도 돈에 더욱 민감해진 수안이다. 타고난 흙수저의 빈곤한 마음이 어딜 가지 않는다.
“다 해 준다며?”
억 단위의 돈으로 차를 사는 것은 너무 아까웠지만 내뱉은 말이 있었다.
“…알았어. 다음엔 금액을 정해놔야겠네.”
‘형은 이런 것까지 그렇게 알뜰하게 챙겨야겠어?’
수용은 불만을 속으로 감춰 뒀다.
* * *
수용은 차를 사고 집에 돌아와 방에 앉았다.
“그래도 형은 졸업하기 전에 내게 차를 사 줄 정도로 경제력을 갖췄지.”
수용은 어제 형과 대화를 나누고 후에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
.
.
한국대 입학을 축하하는 저녁 식사가 끝나고 아버지를 만난 다음 형과 대화하고 마지막으로 둘째 누나인 수현이 찾아왔었다.
“문턱이 아주 닳아 없어지겠어.”
“내가 축하한다는 말도 번호표 뽑고 해야 되는 줄 알았잖니.”
“흐흐. 고마워. 작은누나.”
“아까 얘기 어떻게 생각해?”
“무슨. 아버지께서 나보고 본사로 들어오라고 하신 것?”
“뭐? 식사에선 생각해 보신다고만 하셨잖아.”
“서재에서 따로 얘기해 주셨어. 학교 다니면서 본사로 들어와서 일 배우라고.”
“쳇! 나는 고려 호텔에서 배우라고 하셔놓고….”
“나는 수안 형과 같은 아들이잖아. 이 집안에 둘밖에 없는 아들.”
수현은 자신이 못나지 않았음에도 여자라는 이유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함이 너무 분했다.
“네 말대로 아들은 둘이야. 그래봤자. 넌 오빠 못 이겨.”
“해 봐야 아는 거지.”
수용은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자신이 능력을 발휘해 회사에서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형을 넘어서는 꿈이다.
“수안 오빠가 괜히 네 편을 들었을 것 같아?”
“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린 수안 오빠를 알잖아. 오빠가 보통 사람이야? 우리 어렸을 때부터 오빠는 남달랐잖아.”
자신들과 달리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독차지한 수안이다. 사랑에 이유가 없으면 모르겠는데, 그만한 이유도 있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대학 과정까지 모조리 끝냈던 수안이었다. 수현은 나중에 머리가 크고서야 그 일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괴물이라는 말도로 부족한 사람이 자신의 오빠였다.
“그래도 이제 내가 한국대를 갔으니 따라잡으면….”
“어디까지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오빠는 강운의 도움 없이 스스로 회사를 일으켰어.”
“나도 듣긴 했는데. 작은 규모겠지.”
수용은 대학에 들어갈 공부에 집중하느라 외부 일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형의 회사가 어느 정도 규모인지 파악도 못 하고 있었다.
“야. 너는 귀가 있긴 하니? 수안 오빠 회사가 얼마나 큰지 알아? 지금 전국에 퍼지고 있는 SJ 컴퓨터가 바로 오빠 회사 계열사 중에 하나란 말이야!”
“…SJ 컴퓨터?”
“그 안에 들어가는 한컴이라는 유명한 소프트웨어도 오빠 회사에서 만들었어! 조만간 모든 학교에 납품할 수도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는데 작은 회사? 오빠가 작은 회사를 차렸다고 아버지가 좋아하실 것 같아? 오빠는 지금 우리랑 노는 물이 달라. 그 회사가 조만간 수천억 규모로 성장한다고.”
수현은 강운에 자꾸만 마음이 가서 수안에 대한 정보에도 귀를 기울였고, 수안의 회사가 어떤 성장을 일궈내고 있는지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삐삐 단말기에도 손을 뻗고 있어. 강운에서도 만드는 컴퓨터와 삐삐야. 경쟁사라고도 할 수 있는데 아버지는 그냥 두고 있단 말이야.”
“후아. 형은 진짜.”
“지금 이 상황을 그냥 좋게만 볼 일인 것 같아? 오빠는 아버지가 경영자 수업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날아가는데? 그러니 회사에 부르지도 않으시는 거야. 혼자서 잘하니까. 그런데 네가 회사에 들어가서 오빠를 넘어선다고? 꿈 깨는 게 좋을걸?”
“나보고 어쩌라고?”
“다시 아까 말로 돌아가서… 오빠가 괜히 널 편들었을 것 같아?”
“어… 어?”
아까와 같은 질문이지만 똑같이 들리지 않았다.
“오빠는 네가 회사로 들어가서 얼마나 잘하나 보고 싶은 마음도 있을 거야. 이미 자신은 강운이 아니라도 충분히 자리 잡아서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으니까.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닐걸?”
“그럼?”
“널 자신의 경쟁 상대로 보지 않는 거야. 오빠 눈빛도 그랬고, 아버지 눈빛도 그랬어. 넌 아직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일 뿐이라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래. 지금의 넌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도 회사에 가서 능력을 보여 주고 싶어?”
“나도 하면 잘할 수….”
“너는 오빠처럼 머리가 좋아?”
“아니.”
“아니면 오빠처럼 혼자서 돈이 될 만한 회사를 찾을 능력 있어?”
“아니.”
“그럼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한 건데? 멍청아!”
“…누나는 방법이 있어?”
“우리가 강운에서 뭐라도 얻어내려면 힘을 합치는 방법밖에 없어.”
“우리?”
“그래. 우리! 수진 언니랑 나 그리고 너.”
수진과 수현은 수안을 제외하고 형제들이 힘을 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셋이 수안이 형을….”
“알아. 우리 셋이 더해도 오빠를 감당하기 쉽지 않을 거야. 그런데 너 혼자서 감당하겠다고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어?”
아무 생각 없이 말할 때는 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지만, 작은누나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이 얼마나 허황된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수현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
“너도 이제 분수 파악이 된 것 같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힘을 합해? 큰누나는 외국에 나가 있고, 작은누나는 고려 호텔로 간다며. 나는 본사로 가야 하잖아.”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강운 그룹에 있고, 수안 오빠는 밖에 있다는 점이야. 우리가 내부에 있는 것만으로 첫 번째 장점이야.”
“음….”
“내부에 있으면 우리끼리 서로 도우면서 서로의 일을 지원할 수 있겠지. 우리는 강운 총수의 아들, 딸이잖아. 그만한 힘이 없을 것 같니? 평사원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최소한 실장, 부장급 아니면 임원이야. 우리가 일할 곳의 사장이 우리 눈치를 안 볼 것 같아?”
“총수의 자식을 평사원과 같이 대할 리 없지….”
“그래. 우린 우리가 일하는 회사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어. 그런데 만약 네가 본사로 들어가 버리면… 넌 거기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 음… 아직은 잘….”
“넌 아무것도 못 해. 바보야. 거긴 계열사에서 날고 긴다는 직원들이 일하는 곳이라고. 오히려 네 멍청함이 돋보일 장소란 말이야.”
“…그렇게 된단 말이야?”
“수안 오빠도 널 본사로 들여보내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 이미 알고 있는 거야. 네가 거길 가면 안 된다는 걸.”
“하지만 아버지는 본사로 날….”
“아버지는 널 그냥 가르칠 생각이니까 그렇지. 일 잘하는 직원들을 보면서 배우라는 뜻이야. 거기서 널 보고 대단한 뭔가를 하라는 말이 아니라. 본사는 아버지가 계신 곳이잖아. 아버지가 네 뜻대로 움직이실 분이니?”
“아….”
회사에 가서 열심히 하겠다는 자신의 말에 아버지가 보인 눈빛의 의미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날… 안쓰러워하신 거야. 별것도 아닌 놈이 배울 생각도 없이 열심히 한다고 했으니까….’
“본사는 가지 마. 다시 말씀드려서 다른 곳으로 가야 해. 그래야 일말의 기회라도 만들 수 있으니까.”
“본사 아니면 어디가 좋겠어?”
“넌 생각은 하고 사니? 뭐든 내 말대로 할 생각이야?”
“…아직은 내가 아는 게 없잖아. 난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갔다고.”
“아. 그래 내가 깜빡했다. 네가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는 걸 잊었네.”
“비꼬지 마시고.”
“우선 수진 언니는 곧 돌아와서 패션 쪽으로 가게 될 거야. 미술관에도 한 손 거들 생각이고.”
“큰누나랑은 얘기가 됐나 보네?”
“그래. 그리고 나는 아까 들었던 것처럼 고려 호텔이야.”
“패션하고 호텔에서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는데?”
욕심만 많은 동생이 벌써부터 자신이 받을 도움을 계산하고 있으니 좋은 말이 나오질 않는다.
“듣기나 해, 멍청아.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얘기니까.”
“…오케이.”
“패션은 우리 회사에서 강운 물산과 함께 지주 회사 격이잖아. 그리고 고려 호텔은 호텔만 하는 게 아니라 리조트와 골프장, 스키장까지 붙일 수 있어. 거기다 앞으로 뉴월드 면세점까지 더하면 거대한 그룹사란 말이야.”
“…….”
“너는 전자로 들어가야 해. 그래야 강운 그룹 중요 회사에 우리가 다 발을 들이는 셈이야.”
“강운 전자?”
“거기서 네가 할 일이 가장 중요해.”
“내가 할 일이 뭔데?”
“오빠가 하는 일이 뭐야? 컴퓨터랑 삐삐가 주된 업종이잖아. 그리고 컴퓨터랑 삐삐는 강운 전자도 손대는 부분이고! 그러니까 견제를 해야지.”
“아!”
그제야 수용은 누나의 계획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