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
수안은 강운 전자에서 1994년 10월 새로 출시된 물건을 팬탁으로 보냈다.
배 이사는 팬탁으로 보낸 강운의 물건에 의구심을 드러냈다.
“불량률이 상당하다고 하던데요….”
“나도 알아.”
수안이 들고 있는 것은 휴대폰이다.
초기 휴대폰 모델이었던 탓에 10%가 넘는 불량률을 자랑했고, 아버지가 지인들에게 선물했다가 여기저기서 불량 문제로 싫은 소리를 들었다. 덕분에 아버지는 판매한 휴대폰을 다시 사들이는 중이다.
“그래도 배울 부분이 있을 테니까. 후발 주자는 상대의 단점을 보고도 배워야 하는 법이야.”
“이제 이쪽 방향으로 전환하는 건가요?”
“당장은 기술력 확보가 급선무지. 기존 특허를 우회하고 새로운 특허를 만들어 내고. 기존 회사에서 배우고.”
“그 기존 회사가 강운이라는 말씀이죠?”
“아니.”
“아니에요?”
“강운의 휴대폰은 반면교사로 삼으라고 준 거야. 진짜는 해외에서 배워야 해. 해외 휴대폰 회사와 제휴하라고 해. 우선은 해외 휴대폰의 기술력을 카피하는 것이 급선무야.”
“해외 휴대폰 기업이면.”
“모토로라.”
“아!”
“팬탁은 모토로라 휴대폰을 만드는 OEM 공장으로 시작해서 국내 휴대폰 제조업자의 후발 주자가 되어야 해. 쉽지는 않겠지만, 김현성 사장이 부지를 마련해서 박 사장이 공장을 올리고 있으니 모토로라에 보여 줄 조건은 나쁘지 않을 거야.”
“박 사장에게 지시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슬슬 소식이 들려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녀석은 어때?”
“징글징글한 사람입니다. 아직도 버티고 있습니다.”
미래에 희대의 사기꾼이 되었어야 할 조동팔을 말함이다.
“버티고 있다?”
“이미 사망한 주수동 쪽은 내연녀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것만 확인했고, 아직 경찰 쪽 소식은 모릅니다. 조동팔은 밖에서 보여 주는 모습이 이제 거의 끝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듭니다. 삐쩍 말라서 오늘내일하고 있습니다.”
주수동과 함께 살던 내연녀는 주수동이 죽고 남은 자산을 상속받으려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조동팔의 경우, 외부 활동이 뜸해지며 말 그대로 죽은 듯이 살고 있었다. 가끔 외부로 나와 얼굴을 비추긴 하지만 아주 잠시일 뿐이다. 그는 마약 중독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주변을 불안하게 응시하는 눈과 새하얀 얼굴. 바짝 마른 몸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남은 약은 충분하겠지?”
“반도 못 먹었을 겁니다.”
“괜히 경찰 귀에 들어가면 약을 끊을 기회만 주겠지. 조금 더 기다려 보자.”
“예. 실장님. 그리고 국내 기획사 인수를 끝내고 자본금을 투여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두 사람은 기획사로 편입시켰고, 작곡과 프로듀싱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고른 사람들은 빨리 찾아서 데뷔시켜.”
“훗날 톱스타가 될 사람들이니 최상의 대우로 모셔오고 있습니다.”
미래를 보았다는 수안이다. 그런 수안이 고른 배우와 가수들을 확보한다는 것은 성공을 보장받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연예계 말고 스포츠 스타도 같이해야 해. 특히 피겨는 확실하게 준비해야 하고.”
아버지의 결단이 늦어져 결국 기획사를 통해 김연하를 지원하기로 한 수안이다. 김연하 선수는 아직 5살의 어린 나이라 2년 후인 96년에나 스케이트를 접하게 될 터였다.
“그분이 시작하시기 전에 스포츠 스타를 지원하는 기획사 사업 분야를 제대로 키워 놓겠습니다.”
배영성도 수안이 설명해 준 미래를 듣고 여왕을 맞이할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여왕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 같은 신하들이 제대로 준비해야 하는 법이지.”
전무후무한 올포디움을 기록하는 피겨의 여왕이 바로 김연하 선수다.
처음부터 완벽한 지원 속에서 자란 김연하 선수라면 세계 무대를 조금 더 빨리, 그리고 안전하게 휩쓸 수 있었다. 풍족한 조건은 필수였다.
“척박한 주변 환경은 그분이 알지도 못하게 만들겠습니다.”
“배 이사만 믿겠어.”
“예. 실장님!”
초등부 시절부터 대회를 휩쓰는 김연하 선수는 수안이 있는 한 돈 걱정 없이 선수 생활을 이어 갈 수 있었다. 해외 전지훈련부터 국내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 가며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수안과 배영성이 마련할 것이다. 기획사에 소속되어 있는 한 그녀의 집에 따로 월급을 지급하며 부족함 없이 살게 할 생각이었다.
* * *
수안은 연말에 기다리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갔네.”
“예. 갔습니다. 이제야 한시름 놨습니다.”
조동팔의 소식이 먼저 전해졌고, 이어 마약 수사에 대한 일도 뉴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조동팔의 경우 이제 겨우 다단계 판매에 발을 들인 범죄자일 뿐이었고, 그가 저지른 작은 사기 행각은 국민들에게 크게 다가오는 일이 아니었기에 주목받는 뉴스가 아니었다. 하지만 마약 사건에 대한 것은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는 뉴스였다.
“그런데 주수동 마약 얘기가 전혀 없네.”
“경찰에서 놓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나 원인 결과가 확실한 죽음이었다면, 따로 부검을 하지 않습니다. 내연녀가 증인으로 나섰다면 경찰이 의심할 구석은 없으니까요.”
둘 다 마약으로 인한 죽음이지만, 주수동에겐 마약 사범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지 않았다. 오직 조동팔의 마약에 대한 내용만 나오고 있다.
조동팔이 사망하면서 마약에 꼬투리가 잡혔고, 다단계 사업을 함께하며 사기를 조장하던 조동팔 일당을 일망타진했다는 소식이다.
“저것들… 서로 돌려먹었네.”
“예. 그래서 약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저희와 연락이 닿지 않아 따로 업자를 통해 더 구입한 것 같습니다.”
뉴스에서는 국내에 마약을 유통한 마약 사범 일당을 경찰이 수배 중이라고 나오고 있었다.
“저런 놈들도 빨리 치워야 나라가 발전할 텐데 말이야.”
“쉽게 잡히겠습니까. 저런 놈들은 특히 잘 도망 다닙니다.”
남 얘기처럼 하고 있지만, 이들도 마약 생산, 공급을 진행한 마약 사범이었다.
“그래도 가장 큰 우환이 해결되었다니 후련하다. 배 이사 오늘은 통닭에 맥주나 한잔할까?”
“막내 도련님 일이 있는데, 오늘은 일찍 들어가셔야죠.”
“아차. 수용이가 오늘 발표 나왔다고 했지?”
막냇동생 강수용이 재수 끝에 한국대 인문학부에 합격했다.
“예. 아까 댁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그럼 배 이사랑 술은 나중에 해야겠네. 그래도 배 이사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한 번 먹자고.”
작년 말 결혼한 배영성은 내년 초에 출산일을 받아 두었다.
“예. 실장님. 최 실장에게도 미리 얘기해 놓겠습니다.”
“아차. 최 실장도 내년에 출산이랬지?”
“저보다 약간 늦습니다.”
배영성이 2월 최장호가 3월 출산이다.
“나도 얼른 결혼을 해야 하는데 말이지….”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스스로가 느끼기엔 늦다 싶었다.
‘언제까지 독수공방이냐고요….’
과거 49년을 현생과 더하면 일흔을 훌쩍 넘긴 수안이다.
“실장님이 아직 젊으시니 천천히 고르시죠.”
“내가 젊다고 여자 끼고 놀 것도 아니잖아. 차라리 빨리 결혼해서 자리잡고 싶어.”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수안은 여자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하게 선을 지키고 있었다. 금용으로 살아가며 느낀 것도 있었고, 수안이 여자에게 크게 관심이 없는 것도 한몫했다.
“가끔 보면 신기할 때가 많습니다. 보통 재벌가 자식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여자를 갈아치운다는데, 실장님은 눈길도 안 주지 않으십니까.”
“도무지 내키질 않네.”
“…지금 나이에 하실 말씀이 아니니 그렇죠.”
“난 내 아이들에게 당당한 아빠가 되고 싶어서 그래. 아무리 모른다 해도 나 스스로가 알잖아.”
기업을 경영하는 위치에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수안은 여자로 인해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특히 수안의 경우 자신에게 확신할 수 없었다. 몸을 섞다 보면 마음도 섞여서 전해지기 마련이라고 생각했고, 이 때문에 함부로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소중한 부모님의 명을 거역하고 아내를 고른다는 선택지는 고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제가 딸이 있으면 실장님 같은 사위를 얻고 싶네요.”
“배 이사가 20살에 애를 낳았으면 진짜로 가능했겠는데?”
올해 41이 된 배영성이 20살에 아이를 낳았으면 21살이다. 23살의 수안과 잘 어울릴 나이였다.
“흐흐. 조금 일찍 결혼할 걸 그랬나요?”
“나야 괜찮지만, 강운가 며느리 되는 일은 내가 선택 못 한다. 어쨌든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집으로 갈 테니까 배 이사도 얼른 퇴근해.”
“예. 실장님.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 * *
수안은 집에 들어갔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수용을 만나 축하 인사부터 했다.
“축하해. 수용아. 수고 많았어.”
“흐흐.”
강운모 회장도 오늘만큼은 일찍 들어와 아들의 합격을 언급했다.
“너도 얼른 졸업하고 회사로 들어올 생각을 해야 해. 인문학부로 괜히 가라고 하지 않았다. 대학에서 기업 경영에 필요한 기반 지식을 제대로 쌓아야 해.”
“예. 아버지.”
수안은 수용이 대학을 졸업하려면 멀었기에 다른 동생들을 챙겼다.
“아버지. 수진이는 해외로 나갔으니 그렇다 치고, 수현이가 2년 후에 졸업인데 부르셔야 하지 않을까요? 미리 불러서 회사 일을 가르치다가 졸업하면 바로 발령 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수현이를?”
“괜히 어디 가서 연애 결혼한다고 말썽부리기 전에 회사로 부르시면 좋지 않을지….”
아버지의 눈이 딸을 향했다.
“너 연애하냐?”
“아, 아뇨.”
연애는 꿈도 꾸지 않고 있는데, 수안의 말 때문에 괜히 불똥이 튀었다.
“지금 연애한다는 얘긴 아니고요. 혈기 왕성한 나이니까 언제든 그럴 수 있다는 말이죠.”
수안이 수현을 회사로 부르자고 제안한 목적은 다름 아니었다.
졸업하고 원치 않는 회사로 가서 원치 않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빨리 원하는 회사로 부르면 여동생의 커리어를 제대로 키워 줄 수 있다.
‘넌 고마운 줄 알아야 해.’
“그러는 너는 왜 연애를 안 하고?”
혈기 왕성하기로 따지면 아들인 수안이 더해야 했다.
“저야… 장남인데 함부로 그럴 순 없죠. 괜히 여자 일로 문제 일으키고 싶지 않아요. 회사 운영만으로 충분히 바쁘기도 하고요.”
수안에게서 눈을 돌린 강 회장의 시선이 다시 수현에게로 향했다.
“수현이 너는….”
“백화점과 호텔이 좋습니다. 아버지. 수현이가 뉴월드 쪽에 관심이 많아요.”
다시 수안을 한번 돌아본 아버지는 이어서 말했다.
“…우선 호텔로 가서 일을 배워.”
“어느 호텔이요?”
“고려 호텔.”
뉴월드는 지금 계열 분리를 진행하고 있었다. 괜히 회장의 딸이 그쪽으로 가면 잡음이 생길 수 있어 고려 호텔로 방향을 정한 것이다.
“아….”
“네 엄마가 갖고 있는 회사라서 싫으냐?”
수안이 출산했을 때 할아버지가 어머니께 넘겨준 고려 호텔 그룹을 말함이다.
지금은 당시부터 쭉쭉 성장해서 산하에 여러 서비스 기업을 두고 그룹으로 발돋움했다.
함께하는 계열사가 계열 분리를 준비하고 있지만 호텔 하나만으로도 일을 배우기엔 충분했다.
“아, 아뇨. 충분히 좋은 곳이라고 생각해요.”
딱 자신이 원하는 곳이다. 강운의 중심 그룹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이 쉽지 않다고 여기고 있었고, 그나마 자신이 얻을 수 있는 회사는 어머니 소유의 호텔 분야라고 생각해 왔다.
“고마워. 오빠.”
수현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준 오빠를 향해 감사 인사를 전하며 쐐기를 박았다.
“앞으로 네가 일하기 나름이야. 아버지가 일하는 걸 허락하셨지 그룹을 내준다는 말씀은 아니시잖아.”
뻔히 속이 보이는 감사라서 바로잡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너희에게 안 주지만 난 줄 거다. 요놈아.’
“아. 음….”
아버지가 오빠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말이 없는 걸 보니 계열사를 쉽게 내줄 것 같지 않았다.
“열심히 할게요. 아버지.”
“그래.”
대화를 지켜보던 수용이 조그맣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저도 대학 다니면서 회사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수안은 투명하게 드러나는 동생의 욕심에 오히려 기쁜 마음이었다.
“오~ 수용이가 드디어 뿔을 드러내는데요, 아버지?”
“훗. 뿔은 무슨….”
강운모와 수안이 보기에 수용의 욕심은 작아만 보인다.
수용조차 둘의 대화에 자신의 자리가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
“저는 수용이 원하는 대로 허락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수안은 강력한 경쟁자가 될 수도 있는 수용을 회사로 불러들이는 데 긍정하고 있었다.
“좋다고?”
강운모 회장은 아들의 속내를 파악 수 없어 수안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미리 회사를 경험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요. 저만 같아도 대학 다니던 중에 기업을 일으켰으니까요. 덕분에 기업과 사회를 보는 눈이 넓어지기도 했어요.”
동생 수용의 경우 거한 헛발질로 사회생활을 시작할 것이 뻔했다.
예전에 홀로 후계자의 위치에 있을 때에도 마이너스의 손으로 불렸던 수용이다. 지금이라고 해서 다를 것 같지 않다.
“그야. 너는….”
강운모 회장은 수안이 시작한 투자 회사가 커나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고 받으며 아들의 능력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투자 대비 수익률이 높은 것은 물론이고, 때때로 기업을 흡수하며 방대한 그룹사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기초 자본이 자신의 비자금에서 비롯되었다지만, 이를 활용하는 것은 아들의 순수한 경영 능력과 미래를 보는 혜안에 있었다. 이러한 능력은 막내아들 수용에 비할 바 아니었다.
“해 보지 않고는 모르잖아요. 수용이도 실제 회사에서 일해 보면 두각을 드러낼 수도 있어요.”
역성장만 하지 않아도 다행이지만, 고난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법이다. 수안은 수용이 성장하길 바라고 있었다.
“흐음. 생각해 보고 결정하자. 아직 대학을 들어간 것도 아니니까.”
“예. 아버지.”
더는 밀어붙일 수 없다. 선택은 기업 총수인 아버지의 몫이다.
“그리고 수용이는 밥 먹고 서재로 들어오너라.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예.”
수안은 아버지가 수용을 왜 불렀을지 짐작하고 있었다.
재수긴 하지만, 그래도 한국대에 들어갔으니 뭐라도 선물을 내주실 것이다.
수안도 당시 입학 선물이라며 30억을 받은 기억이 있었다.
다른 여동생들도 대학에 입학하면 여지없이 작은 선물을 받아 서재를 나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