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엎어치나 매치나 (25/304)

엎어치나 매치나

“회사로 모시겠습니다. 실장님.”

“강운 전자 공장으로 가.”

팬탁의 삐삐 제조 환경을 보고 떠오른 일이 있었다.

“…강운 전자로요?”

“그래. 가서 확인할 일이 있어.”

박영우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강운 전자에서도 삐삐 생산 공장이 있었다.

공장 입구에서 강수안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임원이 화들짝 놀라서 마중 나왔다.

“김익수 상무입니다. 도련님. 방문을 환영합니다.”

“김 상무님.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어휴. 괜찮습니다. 사장님이 출장을 가셔서 제게 잘 대응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더 죄송한 부탁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이곳 생산 시설 한번 돌아봐도 괜찮겠습니까?”

엄밀히 따지면 외부인이고, 경쟁사의 오너였기에 예의를 차리는 것이다.

하지만 강운 그룹의 맏아들 신분이 어디 가지 않는다.

“하하. 얼마든지 보셔도 좋습니다.”

공장으로 들어간 수안은 역시나 후드 위치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도…. 후드가 직원들 머리 위에 있군요.”

“예. 유해한 납땜 연기를 빨아들이는 장치이지요.”

천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은 위치는 아니었다.

“김 상무님. 옆에서 보십시오. 직원들이 납땜을 하면서 허리를 숙이고 기판을 보고 있습니다. 납땜은 직원의 머리 아래에서 진행되고 있고요. 이렇게 되면 납땜 연기가 그대로 직원의 머리를 지나 위로 빨려 올라갑니다. 유해한 연기를 빨아들여요? 직원이 다 먹고 나서?”

“아….”

“후드 위치를 직원들 머리 아래 정면으로 바꾸셔야 합니다. 강운 전자에 후일 큰 위험이 될 일입니다. 비단 우리뿐 아니라 많은 사업장에서 같은 상황일 겁니다. 오히려 후드조차 제대로 설치하지 않은 회사도 많겠지요. 하지만 우린 강운입니다. 납품하는 하청이나 거래처 전부에 같은 조건을 요청하세요. 안전의 강운을 만드십시오.”

“비용이 추가되는 일이라.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힘드시면 제 이름을 팔아서라도 만드십시오. 김 상무님 커리어에 오점이 되진 않을 겁니다. 시작을 김 상무님이 하시면 오히려 김 상무님 승진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회사에 제안하겠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변경하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이 시작이 앞으로 우리 회사에서 일할 강운 직원들의 건강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명심하시고요.”

수안은 미래에 발생할 안타까운 죽음과 불치병을 방지할 수 있음에 안도하며 회사로 돌아갔다.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른 회사로도 퍼져 나가야 할 텐데 말이지….’

* * *

수안이 지시하고 김 상무가 서류로 꾸며 보고한 사항은 위로 쭉쭉 올라가 회장의 손에 닿았다.

“고작 후드 위치를 바꾸고 추가 설치하는 일로 직원들 건강을 보장한다고?”

“비용은 추가되지만 앞으로 우리가 주력 먹거리로 삼을 반도체와 관련된 일입니다. 처음부터 이와 같이 설계하면 비용은 크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 생산 현장을 확인하니 사실이었습니다. 납땜 연기를 직원들이 고스란히 들여 마시고 있었습니다.”

“흠… 수안이 다녀가고 나온 제안이라.”

“예. 비서실에서 연락해 물어보니 김익수 상무가 실토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수안 도련님의 의중이 반영된 제안이라고 합니다.”

“이 녀석이 이젠 별걸 다 신경 쓰고 다녀.”

“아무래도 이번에 인수한 팬탁 공장을 직접 보시고 강운의 상황까지 염려하지 않으셨을지.”

“우리랑 겹치는 분야라고 했지?”

“예. 삐삐 단말기를 생산하는 업체입니다. 작년 매출액은 29억입니다. 올해 매출은 100억 이상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녀석이 괜히 이런 짓을 하진 않았을 거야. 그리고 중금속이 위험한 것은 다 아는 일이고. 비용이 좀 들어가지만 다 바꿔. 하청 업체도 무조건 우리 기준을 지키라고 해. 제대로 안전 확보하지 않으면 납품은 꿈도 꾸지 말라고 전하고.”

신뢰의 힘이었다.

“예. 회장님.”

“그리고 이제 제조업에 발을 들이고 몇 년 되지도 않은 아들놈이 아는 것을 우리 직원들은 왜 몰라? 내가 자식하고 마누라 빼고 다 바꾸라는 말을 괜히 했겠어? 혁신 경영이 다른 것이 아니야. 안전과 보건 점검 새로 하고 문제점을 찾아내! 강운 그룹 전 계열사에 통보해!”

“예. 회장님.”

“삼풍 백화점 부지는 어떻게 됐어?”

“삼풍 그룹에서 정부의 눈치를 보며 완벽하게 해체해 놨습니다. 지금은 빈 공터로 남아 있습니다.”

“두 놈들은 어쩌고 있고.”

“정두인, 노태환 두 전 대통령의 비자금 출처가 삼풍 그룹으로 이어져 있음이 드러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삼풍 그룹 자체가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삼풍 백화점 일로 다음 후계가 이상훈 부회장에게 이어지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럼 삼풍 백화점 자리 정도는 쉽겠군.”

“일이 진전되고 있으니 바로 들고 올 수 있습니다. 삼풍 백화점 사장이었던 둘째를 정리하려면 팔 아버리면 되니까요. 그리고 삼풍 그룹 입장에서도 오점으로 남을 수 있는 삼풍 백화점을 얼른 치우고 싶어 합니다.”

“가서 들고 와.”

“매입 절차를 진행하겠습니다.”

매입은 당연했고 이젠 다른 것을 고민할 차례다.

“거기다 백화점을 지을지 아파트를 지을지가 관건이군.”

“백화점은 이미 사람들 인식이 있는지라….”

무너진 삼풍 백화점이라는 인식이 사람들 뇌리에 깊숙이 각인 된 것이 문제다.

최고의 명품 백화점이라는 이름은 완벽하게 잊혀졌다.

잊혀지기만 하면 좋겠지만, 이젠 부실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그렇다고 그 좋은 목에다 아파트를 짓기는 아깝지 않냐 이거야.”

아파트도 이익을 많이 남길 수 있지만, 백화점에 계속 눈길이 가는 것이 문제다.

“비서실에서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수안이 전화 연결해 봐.”

“…예.”

이제 고민되는 일이 있으면 자동으로 장남을 찾게 되는 강 회장이었다.

-회장님. 수안입니다.

스피커폰으로 울리는 수안의 목소리에 강 회장이 답했다.

“그래. 네가 강운 전자에 와서 들쑤시고 간 일은 보고 받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경영자는 기업의 이득을 생각해야 하는 법이야.”

-가르침을 새기겠습니다.

“그래도 직원들 건강이 기업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지. 회사로 인해서 문제가 생기는 것은 나도 원치 않는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해결할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 전사에 안전 관리를 원점부터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예. 회장님.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수안은 알아서 일을 확장시키는 아버지의 결단에 속으로 큰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삼풍 백화점 자리 말이다.”

-아. 예. 회장님.

“너 같으면 그 자리에 뭘 하겠느냐?”

수안도 삼풍 그룹이 정권의 눈치를 보며 완전하게 건물을 해체해 놨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그 자리에 뭔가를 지을 수도 없었다.

서울시의 사업 허가부터 난관이었다. 이미 붕괴된 전력이 있는지라 기존 삼풍 건설에서 맡았던 일들도 하나부터 열까지 제동이 걸리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 새로운 사업을 진행하긴 무리였다.

-…아마 회장님은 아파트와 백화점 중에서 고민하실 것 같습니다.

‘이 녀석은 매번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 같단 말이지….’

“뭐 여러 가지 대안을 생각 중이긴 하다.”

-제 생각은 참고만 하실 테니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참고가 아니다. 요즘 강 회장의 의사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오냐.”

-저는 왜 꼭 둘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따로 만들지 않으면?”

-아파트의 입지에 백화점이 근처에 있는 것은 분양가를 높일 방법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발아래 백화점을 밟고 있는 아파트라면 더할 나위 없지요. 지상 6층까지 넓게 부지를 잡아 백화점을 세우고 그 위로 아파트를 올려 버리면 훌륭한 주거지와 상가의 복합 단지가 완성됩니다. 주상복합 아파트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지하는 기존보다 더 깊이 파서 주차대수를 늘려야겠지만 우리 강운 건설에서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아예 아파트 차량과 백화점 차량 진출입로를 구분하는 것이 좋겠군요.

“허허….”

강 회장은 헛웃음을 흘렸고, 최 실장은 입만 쩍 벌리고 있었다.

하지만 수안의 제안은 끝이 아니었다.

-백화점이 포함된 프리미엄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 강운 건설이 지으면 뉴월드 백화점에 강운 아파트의 가치까지 수직 상승입니다. 예쁜 연예인이 백화점에서 즐겁게 쇼핑하고 아파트로 걸어 들어가는 TV 광고가 더해진다면 어떨까요? 이번 기회에 새로운 아파트 브랜드를 만드시는 것도 좋겠지요. 아파트도 새로운 시도를 시작할 때입니다. 이번 기회가 대현 건설을 넘어서는 첫걸음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파트 분양가부터 역사를 새로 쓰게 될 겁니다. 엄청난 경쟁률이 예상되는군요.

“……!!!”

“……!!!”

아이디어에 아이디어가 더해지고 거기서 또 한발 더 나아간다.

-말 그대로 치기 어린 제 생각일 뿐입니다. 회장님 의사 결정에 작은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흠흠. 끊는다. 수고해라.”

-예. 회장님. 집에서 뵙겠습니다.

“후우… 역시 도련님의 아이디어는 남다르신 것 같습니다.”

스피커폰으로 듣고 있던 최 실장도 수안의 제안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빼놓을 구석이 없다. 그것도 당장 전화로 물어본 마당에 뒤로 이어지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는 비서실은 물론이고 강운 건설 홍보팀에서 고민해도 나오기 힘든 것들이었다.

“최 실장은 삼풍 백화점 부지나 빨리 가져와. 그리고 건설 들어오라고 해.”

건설은 강운 건설 사장을 말함이다.

“예. 강운 건설 임원 회의 소집하겠습니다.”

* * *

“훗.”

아파트가 브랜드화되고 연예인 광고가 시작되는 것은 2천 년 초반의 일이었다. 하지만 백화점을 품은 아파트의 가치가 있으니, 아파트 브랜드를 시작하며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수안은 조금 이르게 강운 건설의 브랜드 아파트 도입을 제안한 것뿐이다.

“툭툭 던져 주면 알아서 척척 받아먹으니 내가 편하네.”

한참 혈기 왕성하게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강 회장이다. 수안이 제안한 것들은 대부분 회장을 통해서 강운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었고, 그에 더한 새로운 아이디어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전엔 사장단을 비밀리에 만나 지시했어야 하는 일이지만, 이제는 아버지를 통해 해결하는 방식으로 변화했을 뿐이다.

“엎어치나 매치나… 떠먹여 주는데도 못 먹으면 병신이지. 아차. 아버지 욕은 아닙니다. 흐흐흐.”

강운 그룹이 입만 벌리고 있으면 알아서 수익이 될 만한 일들을 퍼먹이고 있었다.

‘곧 개강하면 학교로 돌아가야겠네. 학교는 잠깐 휴학이라도 할까….’

수안의 상념이 엉뚱한 곳으로 향하기 전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들어와.”

“실장님. 말씀하신 보고서 가져왔습니다.”

“배 이사도 앉아. 같이 보자.”

“예.”

수안은 보고서가 아니라 다른 일이 궁금해서 배영성을 불렀다.

보고서를 살펴보던 수안이 툭 말을 뱉었다.

“배 이사 결혼은.”

“…흐흐. 양가 상견례 날짜 잡았습니다.”

“곧 날짜 잡겠네.”

“아파트 매입도 잘 끝났고, 착착 준비되고 있습니다.”

“예비 신부는 언제 보여 줄 건데?”

“흐하하.”

“생각만 해도 좋아?”

“좋습니다.”

“그렇게 좋아할 거면 일찍 좀 하든지. 장호는 어떻게 되고 있대?”

“장호도 서로 집에 인사하고 상견례 날짜 잡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배 이사가 11월쯤 하고 장호는 12월쯤에 하면 되겠네.”

“그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조만간 식사라도 같이하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모이는 김에 장호 와이프 될 사람도 같이 보자.”

오래전부터 수안의 손발이 되어 준 사람들이다. 앞으로도 곁에 두고 함께해야 하는 사람들이니 더욱 친밀하게 지내야 했다.

“예. 실장님.”

<『재벌가에 끼어들었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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