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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드 (24/304)

후드

“하지만 저도 미래 비전이 보여야 결정을 하지 않겠습니까.”

김현성 사장은 실적으로 답을 대신했다.

“…팬탁이 3년 차. 더블 스타도 이제 3년 차 회사입니다. 팬탁이 작년 29억 매출로 성장하는 동안 더블 스타에서 인수한 SJ 컴퓨터는 매출액 천억대를 넘겼죠. 더 대단한 미래 비전이 필요하십니까?”

SJ 컴퓨터는 단정한 복장의 직원들이 호객 행위도 없이 정찰제로 컴퓨터를 판매한다.

소프트웨어는 언제나 정품만을 사용하고 무료 컴퓨터 교육을 시행하며 무상 A/S를 상시 제공한다. 용산에서 눈탱이 맞던 소비자들이 1년 365일 파격적인 세일을 감행하는 SJ 컴퓨터를 찾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안 그래도 컴퓨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와중이니… 하루가 다르게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휴우… 생각해 보겠습니다. 김 사장님.”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회사 운영 자금이 부족합니까? 사전에 알아보니 요즘 은행 문을 두드리신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사전에 조사를 하신 모양이군요.”

“인수할 회사의 사전 점검은 늘 있는 일이니까요.”

“금융 실명제 때문인지 모르지만 은행들 대출이 팍팍해졌습니다. 해서 여기저기 미리 알아보는 중입니다. 만기가 다가오는 대출이 있어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자금이 부족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것도 고려해 보겠습니다. 우선은 생각할 시간을 주시죠.”

“다음에 다시 오죠. 꼭 연락 부탁합니다.”

“예. 들어가십시오.”

* * *

김현성 사장이 돌아가고 팬탁 박병우 사장은 직원들을 모았다.

함께 회사를 설립한 창립 멤버들이다.

“오늘 회사 인수 타진 의사를 받았다.”

“사장님. 우리 회사 올해 매출이 작년 세 배는 나옵니다. 내년엔 또 성장이 확실하고요.”

“맞습니다. 이제 막 성장하는 회사를 그렇게 팔아치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인수되면 우리 다 쫓겨나지 않겠어요?”

“안 쫓아낸다고 했어. 인수해도 나를 포함해서 직원들은 그대로 유지한다고 하더라.”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창립하고 고작 2년 반입니다. 제대로 성공하기도 전에 그건….”

“인수 타진한 회사가… 강운 그룹이다.”

“……!!”

“……!!”

“……!!”

“엄밀하게 따지면 강운은 아니지. 하지만 강운이라고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정확히 어디에서 인수한다고 한 건데요? 강운이에요 아니에요?”

“강운가 장남이 소유한 회사다.”

“사법 고시 강수안?!”

“올림픽의 강수안 선수 말입니까?”

“한국대 법대의 강수안이요?”

강수안의 이름은 강운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그래. 그 강수안. 원대한 미래 계획을 세웠다는데 아직은 말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회사 자금 사정도 꿰뚫고 있어. 만약 우리가 인수를 거부했다가 은행 자금줄을 다 막아 버리면 우리가 무슨 수로 살아남겠어?.”

대기업들이 계열사를 늘릴 때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아….”

“방법이.”

“우리가 돈 모은다고 뾰족한 수가 날 것 같진 않네요.”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 날 경영자로 그대로 두고 경영에도 최소한으로만 관여한다고 하더라. 말 그대로 우리 회사를 자신의 품에만 품겠다는 말이야.”

“고민해 볼 문제네요.”

“그래서 너희를 부른 거야.”

“사장님은 벌써 반쯤 결정하신 것 같은데. 아니십니까?”

“솔직히. 우리가 회사를 일으키고 고작 3년 차다. 작년 매출액은 고작 29억이었고, 물론 성장하고 있지만 일정 이상 커나가려면 대기업의 그늘이 필요해. 어차피 계획하고 있던 일이기도 했다. 일부 지분을 대기업에 헌납하고 함께 커나갈 작정이었지. 조금 이르긴 하지만… 그리고 완전한 인수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기도 했지만… 기회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박 사장과 함께 회사를 설립하는 데 도움을 줬던 멤버들의 고개도 끄덕이고 있었다.

“강수안은 강운의 장남이고 다음 회장으로 확실시되는 사람이지. 어쭙잖은 회사면 모르겠는데, 재계 1순위 강운의 그늘이다. 강운이라면 우리 회사 2백, 3백억 규모가 아니라 수천억짜리 회사로 충분히 성장할 수 있어.”

“좋습니다. 저는 찬성하겠습니다.”

“저도 찬성하죠.”

“대신 고용 보장은 인수 계약 문구로 꼭 넣어 주셔야 합니다. 그럼 저도 찬성하겠습니다.”

“고용 보장은 꼭 서류로 남기겠다. 걱정 마라. 끝까지 나만 믿고 따라와 다오.”

다음 날 김현성 사장은 박영우 사장에게 긍정적인 연락을 받고, 인수를 서둘렀다.

고용 보장에 대한 내용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으며, 상당한 금액의 인수 대금을 지불했다.

* * *

김현성 사장은 인수 계약을 마치고 다음 날 수안에게 보고했다.

“인수금액은 100억으로 책정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지분 전부를 가져오지 않고 5%의 지분을 박 사장과 창립 멤버들에게 기존 비율과 같이 나눠서 넘겨줬습니다.”

“잘하셨네. 그럼 가서 한번 살펴보자고.”

“직접 가시려고요?”

“앞으로 크게 키울 회사야. 공장 주변에 확장성도 살펴보고, 직원들 근무 여건도 개선해야지.”

“차량 대기시키겠습니다.”

“배 이사도 같이 가자고 해.”

“예. 실장님.”

* * *

팬탁은 작은 규모의 공장이었다.

“너무 작은데….”

주변을 봐도 가득 들어찬 다른 공장들 때문에 확장에 문제가 있었다.

우선은 경영진을 만나는 것이 우선이다.

“어서 오십시오. 강수안 실장님.”

“반갑습니다. 박병우 사장님.”

수안은 사무실에서 잠시 커피를 마시며 가벼운 대화로 분위기를 주도했다.

“박 사장님, 이제 주머니 빵빵해지셨다고 해서 경영을 소홀히 하시면 안 됩니다.”

“하하하. 덕분에 사정이 좋아지긴 했지요.”

“은행에 잡힌 아파트 담보는 해결하셨지요?”

“어이쿠. 거기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하하하. 대부분 아파트 담보 잡아서 회사 자본금 마련하지 않습니까. 대충 짐작이었는데 정말이셨나 보네요.”

“제가 유도신문에 홀랑 넘어갔군요.”

“공장 견학을 부탁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바쁘게 돌아가고 있지만 안 될 것은 없습니다. 가 보시죠.”

수안은 공장에서 삐삐기판을 조립하고 납땜으로 바쁜 사람들을 지켜보다 흠칫했다.

“…후드. 후드는 어디 있습니까?”

“후드요? 혹시 저거 말씀하십니까?”

공장 내부에서 발생하는 먼지를 빨아들여 외부로 배출하는 공기 순환 후드가 공장 천장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당장 사람들 멈추라고 하세요. 당장.”

“아. 예. 모두 작업 멈추고 나오세요. 정지! 정지!”

“갑자기 왜 그러지?”

“그러게….”

수안은 사람들이 빠져나간 공장을 그대로 두고 박 사장을 사무실로 잡아끌었다.

“사장님. 납연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십니까?”

“그래서 후드를 설치하지 않았습니까… ”

“천장 후드로 빨아들이면 뭐 해요? 이미 유해한 연기는 밑에서 다 먹어 버렸는데!”

“음….”

“당장 개인 자리 앞부분에 개별 후드를 설치하세요. 그리고 납땜 장치에 따로 연기를 빨아들이는 장치도 만드시고요. 그래야 직원들이 건강하게 일할 수 있습니다.”

“시일이 걸릴 텐데… 설비를 구비하는 동안 공장은 돌아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

“마스크라도 착용시키고 일을 시키세요. 대충이라도 후드를 연장해서 각자 자리에 만드시고요! 저러다가 직원들 다 쓰러집니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진 마세요. 분명 이상 증세로 병원에 갔던 직원들이 있을 겁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병원에 가던 친구들은 있었는데….”

“그 직원들은 원인을 몰랐겠지만 나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인수한 회사 직원들이 이런 환경에서 일하는 것 용납 못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어휴. 부끄럽습니다. 제가 가족처럼 생각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정작 이제 회사를 인수하신 실장님보다 못했습니다….”

“나머지는 부하 직원들에게 맡기시고 박 사장님은 개발팀 불러서 개발 회의 시작합니다. 김 사장님하고 배 이사님은 제가 가져온 서류 들고 회의 들어오세요.”

““예. 실장님.””

‘경영은 최소한으로 손댄다고 하시더니. 벌써부터 이 지경이면….’

앞날이 걱정되는 박 사장이다.

개발팀이라고 해 봐야 대단한 인원은 아니었다. 작년에 겨우 29억의 매출을 올린 회사고 올해 매출 규모가 커지면서 들어온 직원들 셋은 햇병아리들이었다.

“지금 나눠드린 자료 2페이지를 보시면 팬탁에서 출시한 삐삐의 디자인이 보이실 겁니다.”

투박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팬탁의 삐삐가 2페이지에 인쇄되어 있었다.

“이 부분부터 시작하죠.”

“음.”

“아직 삐삐는 대중화되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 시기는 금방 도래합니다. 기업과 병원을 시작으로 점점 커나가게 될 겁니다. 그럼 삐삐를 구매하는 연령 폭에 변화가 생깁니다. 다음 3페이지부터 봐주세요.”

3페이지부터 향후 삐삐를 사용하는 연령대의 변화와 폭증할 구입 수량이 그래프로 한눈에 보여지고 있었다.

“지금 팬탁이나 다른 회사들의 디자인도 다르지 않습니다. 디자인은 투박하고 기능에 치중하고 있죠.”

“저희 디자인이 나름 깔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다른 회사의 삐삐 디자인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사업 초창기. 생각보다 많지도 않다.

“마지막 장을 봐주십시오.”

“헙!”

“오오~”

여러 색상의 깔끔한 삐삐 디자인 도안이 인쇄되어 있었다.

“대학생, 고등학생 가리지 않고 삐삐를 구매하게 될 겁니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죠. 그리고 회사원 의사들이라고 해서 예쁜 삐삐를 원하지 않을 것 같습니까? 어차피 내용물은 다 비슷비슷해요. 그렇다면 우린 디자인과 컬러로 승부해야 합니다.”

“후아….”

박 사장은 경영에 참견한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생각을 지워 버렸다.

‘강 회장이 총애하는 이유가 있었어. 괜히 강운의 장남이 아니야.’

“급하게 도안을 그리느라 지금은 여기 나눠드린 디자인이 전부입니다만, 새로운 디자인이 나오는 대로 팬탁에 보내드리겠습니다. 팬탁은 제가 고안한 디자인을 심사숙고하셔서 새로 변형하셔도 좋습니다. 선택은 팬탁의 몫입니다.”

“…직접 디자인하셨습니까? 이 세련된 디자인을요?”

“그럼 누가 합니까?”

그림도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배운 수안이다. 머리에 있던 디자인을 옮기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시간이 부족해 많은 디자인을 넘기지 못하지만 틈틈이 디자인을 완성해 넘기면 매번 새로운 삐삐 디자인을 공급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신뢰를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삐삐의 내구성은 물론 기능까지 동급 최강으로 만들어야겠죠. 원가가 올라가는 부분은 감수하십시오. 한번 우리 팬탁의 삐삐를 사용해 보면 다시는 다른 회사 제품에 눈길이 가지 않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만 되면 우리가 삐삐 시장을 장악할 수 있습니다. 차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도 충성 고객을 확보한 다음이라면 사업이 땅 짚고 헤엄치는 것만큼이나 쉬워지죠. 우리가 천년만년 삐삐만 만들어 먹고살 것 같습니까? 삐삐단말기 사업은 우리가 시장을 장악하기 위한 첫걸음일 뿐입니다.”

“후아.”

“회사의 손해나 적자는 신경 쓰지 말고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십시오. 박 사장님. 괜히 회사를 우리가 인수한 것이 아닙니다. 회사의 존속에 대한 책임은 회사를 소유한 우리가 책임집니다.”

“예. 실장님. 제시하신 목표 확실하게 이해했습니다.”

“개발 회의는 여기까지 하죠. 김 사장님.”

“예. 실장님.”

“박 사장님하고 자주 연락하면서 필요한 부분 지원하시고, 공장 이전 추진하세요. 이 정도 규모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전국 삐삐 시장을 다 먹고 그다음까지 준비하려면 지금보다 10배는 넘게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주변 땅도 미리 확보할 수 있는 곳이면 더 좋고요.”

“우선 팬탁 직원들 대우와 복리후생부터 다른 인수 회사들에 맞추겠습니다. 부지는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부동산은 제가 꽉 잡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부동산 매입과 건물 매입을 위해서 끌어들인 김현성 사장이다.

“좋습니다. 박 사장님.”

“예. 실장님.”

“우선은 좁지만 여기서 버티고 있으세요. 공장 부지 찾고 지으려면 1년도 부족합니다. 김 사장이 적당한 곳으로 찾아 둘 테니 나중에 옮기시고, 필요한 지원이 있으면 언제든지 요청하십시오. 대신 경영만큼은 내 회사다 생각하시고 타이트하게 운영하시길 부탁드립니다. 방만한 경영은 제가 질색하는 터라….”

“맡겨 주십시오.”

“난 팬탁을 강운 전자만큼 키워 보고 싶어요.”

“아….”

원대한 미래라고 할 만했다.

‘그래서 강운 전자에서 삐삐를 만들고 있어도 우리 회사를 인수하신 거야….’

“잔소리는 여기까지만 하죠. 김 사장님 배 이사님. 갑시다.”

“예. 실장님.”

“차 대기시키겠습니다.”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박영우 사장은 더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공장 진입 금지. 오늘은 생산 멈추고 임시 후드 작업부터 진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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