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마트 (23/304)

스마트

-정리는 잘하셨죠?

“덕분에 손해는 나지 않았어.”

다른 기업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만 강운모 회장은 느긋했다.

이미 흔적까지 완벽하게 지우고 자금을 세탁해 따로 숨겨두었다.

이번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는 곳은 사채업자들이 될 것이다.

잔뜩 감춰둔 차명 계좌들을 어쩌지 못하고 이리저리 뛰지만 많이 건지진 못한다.

차명이라도 명의자가 살아 있으면 어떻게든 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으로 명의를 했거나, 없는 사람으로 만든 계좌는 살릴 방법이 없다.

-다행입니다. 고생한 비서실에 선물이라도 돌려야겠네요.

“크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어휴. 제가 괜히 설레발이었네요. 회장님이 알아서 잘하실 텐데.

“그보다 김일삼 개혁 드라이브가 어디까지 이어질 것 같으냐.”

-당연히 끝이 아니죠. 또 비슷한 일을 진행할 겁니다.

“그건 나도 알아. 중요한 것은 어떤 분야로 향할 것인가. 이것이지.”

-비서실은 놀아요? 회장님께 보고 안 합니까?

강 회장은 최 실장을 한번 노려보고 다시 말했다.

“비서실에서 예측한 것도 있지만 교차 확인 차원에서 물었을 뿐이다.”

최학주의 고개가 푹 숙여진다.

-그렇죠? 우리 비서실이 그렇게 무능할 리가 없죠.

“됐고. 네 생각이나 풀어놔 봐.”

-이번 금융 실명제 발표로 지하 자금은 금과 부동산으로 몰릴 겁니다. 당연히 예측되는 일이죠.

“흐음.”

-금은 어찌 손댈 수가 없는 일이지만, 부동산은 다릅니다. 얼마든지 정책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

“부동산이라.”

-하지만 이번처럼 급하게 하진 않을 겁니다. 내후년 초에 발표하고 1년 정도는 유예 기간을 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금융 실명제는 이미 실명으로 사용하던 일반 국민들에게 전혀 피해가 없으니 전격 실행할 수 있었지만 부동산은 다릅니다. 유예 기간이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부동산 실명제.”

-예. 부동산 실명제가 김일삼의 다음 개혁 드라이브입니다. 부동산 탈세를 막고 투기를 방지하는 정책이 될 겁니다.

“알았다. 끊는다.”

삑.

핵심 정보만 날름 듣고 전화를 끊어 버린 강 회장이 최 실장에게 말했다.

“다 들었지?”

“…예. 회장님.”

“아들놈은 앉아서 세상을 손바닥 보듯이 들여다보고 있는데, 비서실은 그 많은 정보를 취합하면서 이런 것도 몰라?”

“…죄송합니다.”

“다시 제대로 파악해 와.”

“예. 회장님.”

* * *

마시던 커피는 차게 식어 버렸지만, 가슴은 뜨겁게 달아오른다.

“아버지가 날 신뢰하기 시작하셨어.”

다른 누구도 아닌 기업 총수의 신뢰였고, 아버지의 신뢰였다.

“신뢰를 받았으니 그에 제대로 보답해야겠지?”

수안은 전화기를 들어 배영성을 불렀다.

“배 이사. 김현성 사장하고 내 방으로 와.”

-예. 실장님.

회사 내부에서는 실장으로 호칭을 정한 수안이다.

사장 위에 존재하는 실장이었다.

“이번엔 어디 회사를 인수하실 생각입니까?”

“척하면 척이네.”

배영성은 수안이 이렇게 부르면 항상 새로운 일거리를 부여받았기에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둘이 들어와 자리에 앉자 수안이 신문을 펼쳐 보여 줬다.

“여기. 이제 우리도 제조사를 확장 인수할 때가 됐지.”

김현성 사장이 신문에 체크된 기업 이름을 보고 말했다.

“팬탁? 무선 호출기 회사를요?”

“내가 어디 현재 상황만 보고 회사를 선택하던가?”

김현성 사장은 아직 모르지만 배영성은 수안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어디까지 보고 계십니까?”

“우선은 국내 시장을 강운과 나눠 먹고 싶어. 물론 훗날엔 강운 그룹이 전 세계 시장을 제패하게 만들 거야. 그리고 미래 시장은 휴대폰 시장까지 보고 있어.”

“지금은 삐삐가 대세 아닙니까? 휴대폰은 잘 터지지도 않고 비싸기만 해서….”

1993년만 해도 휴대폰은 거리에서 찾기 힘들었다. 다만 삐삐 사업자가 13개로 증가하면서 일반인들에게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작년 92년에 145만이 가입되어 있었고, 95년에 천만 명을 넘어서는 사람들이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98년 PCS 사업이 시작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컴퓨터에 집중해야 할 때가 아닌지.”

회사는 SJ 컴퓨터를 인수해 이미 컴퓨터 판매를 시작하고 있었다. 더불어 90년 초에 시작한 한컴을 인수해 소프트웨어 시장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김현성 사장은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때라고 여기고 있었다.

“강운 그룹에서 발표했잖아. 변화하려면 자식과 마누라 빼고 다 바꾸라고.”

수안이 했던 말을 그대로 써먹은 강 회장이다.

본래 다른 기업 총수가 써먹었어야 하지만, 수안이 아는 모든 것이 강운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도 변화해야지. 그리고 컴퓨터만 바라보다가 다른 기회는 다 놓칠 거야? 어차피 우리가 인수한 회사에 경영도 맡겨 놨잖아. 알아서 잘할 사람들이야. 그사이 우리는 다른 기회를 계속 만들어야 해. 그게 경영자가 할 일이야.”

“실장님 생각이 그렇다면 저희는 따라야죠.”

“우리 실장님은 항상 옳은 결정만 하시는 분이시죠.”

“믿어 줘서 고맙긴 한데, 내 의견을 반박하는 것도 언제든 환영이야.”

“인수하면 우선은 삐삐 시장부터 확보해야겠죠?”

“그래. 제대로 만든 삐삐를 팔아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미래에 시작할 PCS 사업을 시작할 거야. PCS 개발에 많은 돈이 투여되어야 하고, 더불어 향후 통신 시장도 먹어야 해. 이거 간단한 일 아니다. 엄청난 이권이 걸려 있어.”

“맡겨 주십시오. 먼저 팬탁 정보부터 파악하고 경영진을 만나 보겠습니다.”

“김 사장은 곧장 시작해. 부족한 돈은 미국 지사나 일본 지사에서 충당하고.”

“아직 여유 자금 충분합니다. 국내 주식 시장에서 버는 돈도 있으니까요.”

“김 사장이 잘하고 있는 건 알아.”

“실장님이 지시한 대로 할 뿐입니다. 저야 숟가락만 얹은 거죠.”

“좋아. 김 사장은 나가 보고 배 이사는 잠깐 남아.”

“예. 실장님.”

김현성 사장이 나가고 수안은 배영성에게 진짜 미래를 설명했다.

“삐삐는 오래 못 가. PCS 폰이 98년에 대세로 자리 잡을 거야. 그때부터 삐삐는 완전히 내리막이야. 물론 그전까진 충분히 먹고 빠질 수 있겠지. 97년에 삐삐 사업부를 떼어서 매각하는 것도 좋고.”

“삐삐 시대는 이제 시작인데….”

“그 뒤로 더 빠르게 변화해. 특히 우리나라의 변화가 심각하게 빨라.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PCS 폰이 나오니까. 그 뒤에도 마찬가지야. 그렇지만 해외 휴대폰 제조사를 따라잡긴 힘들어.”

“음….”

“진짜는 그 뒤에 와.”

“진짜가 따로 있습니까?”

“스마트 폰.”

“똑똑한 휴대폰입니까?”

노키아는 스마트폰을 경시한 대가를 치르고 전 세계 시장을 주름잡다가 퇴출당한다.

거인이 몰락한 원인이 바로 스마트폰에 있었다.

“전화, 문자메시지는 물론이고 카메라까지 포함되어 있어. 세상 모든 것을 스마트폰 하나로 해결해. 해외에 있는 사람과도 얼굴을 보면서 통화할 수 있어. 그것도 길거리에서. 게다가 게임도 할 수 있고, 문서 작업, 그림도 그릴 수 있지. 스마트 폰으로 못 하는 게 없어. 내 손안의 작은 컴퓨터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

“허. 엄청난 물건이네요. 가격도 비싸겠죠?”

“현재 물가로 삐삐 가격이면 충분해. 저렴한 대량 생산이 당연한 세상이야.”

“누구든 사겠군요.”

“미래엔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간 어린애들도 들고 다녀.”

“환장하겠네.”

환장할 일이지만, 미래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관련 기술을 확보해야 해. 계획은 내 머리에 다 들었지만, 기술은 연구해야겠지. 명확한 목표가 있으니, 개발이 어렵진 않을 거야. 팬탁을 잡아서 스마트폰까지 개발해야 해. 순서는 삐삐, PCS, 일반 휴대폰, 그리고 스마트폰이야.”

“그리고 꾸준하게 수입이 발생할 통신사도 필요할 것이고요.”

“그렇지! 물건은 일회성으로 판매하지만, 통신사는 매월 통신 요금을 받아 내잖아.”

“인수할 방법을 찾아봐야겠습니다.”

“그리고 통신사는 삐삐 통신사부터 시작해서 향후 휴대폰 통신과 TV 케이블, 인터넷 케이블을 연계해서 판매할 계획을 잡아야 해. 우선은 삐삐통신사부터 인수하는 방향으로 가자고.”

“예!”

수안은 배영성을 내보내고 혼자 남았다.

“애플과 삼디에서 스마트 폰을 빼앗아 옵시다. 회장님. 크크.”

수안은 애플사와 삼디 전자에서 출시할 스마트폰을 구경만 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차근차근 기술력을 확보해 완벽하게 만들어진 스마트폰을 누구보다 먼저 세계 시장에 선보일 생각이었다. 93년 팬탁 인수는 그 첫걸음이다.

‘그 안에 들어갈 소프트웨어 애플리케이션과 반도체 칩도 빼먹을 수 없지. 선점만 하면 돈이 될 테니까.’

페이스북이 훨훨 날아다닌 이유가 바로 이 선점 효과에 있었다.

물론 잘 만든 프로그램이지만, 애플사에서 기본 설치를 해 주지 않았다면 그 정도로 많이 스마트 폰에 깔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번엔 내 SNS가 들어갈 거야. 초코톡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겠지.’

수안은 미래의 스마트폰 산업을 남김없이 먹어 치울 작정이다.

* * *

“네? 인수요?”

멀쩡한 회사에 와서 갑자기 회사를 인수하고 싶다고 하면 누군들 이렇게 묻지 않을까.

“갑작스러운 말일 수 있다는 것 충분히 이해합니다.”

“갑자기고 자시고 간에. 사업을 시작한 지 이제 고작 3년 차에 불과한 우리 회사를 뭘 보시고….”

91년 3월 창업하고 93년 8월인 현재는 만 2년 5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무선 호출기를 만들어 내수시장에 판매하고 있었다. 그리고 충분히 급속한 성장을 이루고 있긴 했다. 작년 29억의 매출을 올렸으나 올해 매출액은 100억까지 가능했다.

“지분은 박 사장과 함께 회사를 설립한 멤버들이 전부 가지고 계시죠?”

“아. 네. 제가 대부분을 갖고 있고 나머지가 일부….”

“저희는 SJ 컴퓨터와 한컴을 소유한 회사이기도 하죠.”

“아! 요즘 뜨고 있는 SJ 컴퓨터와 한컴!”

저렴한 컴퓨터를 표방하며 팬티엄 컴퓨터를 보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엔 한컴이 기본적으로 설치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 회사는 강수안 씨가 대주주로 계십니다. 회사에선 실장님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강수안? 강수안?!! 강수안!!!”

강수안이라는 이름은 누구에게든 익숙했다.

“맞습니다. 강운 그룹의 장남이자 올림픽 2연패의 주인공이죠.”

“강운의 강수안….”

“생각이 조금은 바뀌지 않으십니까?”

“그럼 회사가 강운 그룹 산하로 들어간단 말입니까?”

“아직은 아니지만,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첫째 도련님을 향한 회장님의 애정이 각별하시다는 걸 많은 분들이 알고 있고, 나중엔 분명히 강운 그룹의 총수가 되실 겁니다.”

“아…. 거부는 힘들겠군요.”

강운이라는 이름이 박 사장의 어깨를 내리누른다. 거부했다간 회사 자체가 풍비박산 날 수도 있는 일이다.

김현성 사장은 박병우 사장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굳이 해소해 주지 않았다. 상상은 자유였다. 그리고 그 상상이 인수에 도움이 된다면 놔두는 것이 좋은 일이다.

채찍은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맞았으니, 이제 당근을 제시할 차례다.

“저희는 기업을 인수하고 박 사장님을 내쫓을 생각이 없습니다. 고용도 보장하죠. 박 사장님의 경영에 참견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우린 대략적인 계획과 목표, 즉 미래 비전만 제시합니다.”

“…제가 계속 경영한다고요? 강운에서 경영자를 파견하지 않고요?”

“지금 회사는 오직 강수안 실장님이 소유한 상태입니다. 강운의 지분이나 입김은 전혀 없죠.”

“호오.”

“저는 강운 그룹보다 강수안 실장님을 더욱 신뢰합니다. 실장님은 불패의 투자가입니다. 강 실장님은 박 사장님께 많은 기대를 하고 있으며, 박 사장님을 통해 원대한 미래를 계획하고 계십니다. 저는 박 사장님이 우리 회사의 울타리에 들어오셨으면 합니다.”

“원대한 미래. 저도 들을 수 있을까요?”

“음… 이 부분은 기밀에 속하는 부분입니다. 투자가의 미래 예측은 자산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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