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붕괴 (22/304)

붕괴

형제는 삼풍 백화점 매각에 속도를 붙였다.

서로 동상이몽을 품고 있지만 목표는 같았기 때문이다.

강운 그룹의 자산 가치 평가단이 가장 먼저 진행한 일은 건물의 안전 점검이었다.

삼풍의 입김을 무시할 수 있는 안전 점검에 특화된 인물들이 안전 점검을 시작했다.

서울시청 건설계 공무원까지 대동한 공식 안전점검이었다. 여기에도 강운의 입김이 가득 들어갔다.

“4층짜리 건물로 허가를 받아 놓고 무단으로 1층을 더 올렸어?”

“기둥 다 어디 갔어? 이러고도 건물이 무사해?”

“여기저기 금 간 거 봐라… 당장이라도 무너지겠는데?”

설계부터 시공과 유지 관리까지 총체적인 부실이 드러나고 있었다. 지은 지 고작 4년밖에 되지 않은 건물이 이 모양이었다.

강운에서 파견된 직원들이 공무원에게 물었다.

“이거… 시청에서 허가하지 않았습니까?”

“시청에선 4층까지만 허가했는데….”

“그럼 불법이네요?”

“…그렇습니다. 불법입니다.”

“그리고 기둥 다 없애고 공간을 확장했어요. 불법으로 5층을 만드는 바람에 하중이 더 커졌고, 138톤짜리 냉각탑도 있네요. 이거 무너지면 서초구청장이 책임집니까, 아니면 서울시장이 책임집니까?”

“그, 그건.”

“시청에서 어떻게 조치하는지 강운에서 지켜보겠습니다.”

서울시청과 서초구청은 빠르게 영업정지 명령을 내렸다. 고 이 회장이 없으니 강운의 힘을 막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언론에도 대서특필 됐다.

[삼풍 백화점 부실 시공 드러나 영업 정지 명령.]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삼풍 백화점이 불시 안전점검에서 최하점을 받고 영업정지 되었다. 시에서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수 있는 수준이라며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부득이 영업을 정지하고 정밀 점검을….

이 역시 강운의 힘이다.

최학주는 다시 첫째 이상훈을 찾아가 말을 바꿨다.

“삼풍 백화점을 이대로 매입하긴 힘들겠군요. 전 회장님은 어떻게 그 모양으로 백화점을 지어 놓으셨답니까? 지금 언론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안면 몰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래도 건물을 보수하면….”

“지금 영업 정지 상태 아닙니까. 그리고 보수가 아니라 아예 때려 부숴야 한다는 얘기가 시청에서 흘러나오고 있어요. 보수한다고 될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거 잠깐이라도 가지고 있다가 무너지면 누가 책임져야 하겠습니까?”

“하지만… 매입하시기로 하셨지 않습니까!”

“이 상태로는 도움을 드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나중에 땅값이라도 받고 매각하시려거든 그때 다시 불러 주십시오. 그리고 다른 계열사는 아무리 살펴봐도 마땅한 물건이 없군요.”

최학주는 부회장 사무실에서 나가며 말했다.

“땅값이나 나올지 모르겠네… 저거 부수려면 돈이 얼만데.”

* * *

둘째도 같은 소식을 들어야 했다.

백화점이 영업 정지되고 들어갈 수 없게 되어 다른 건물에서 최학주를 맞이하고 있었다.

“…지금 못 사겠다 이 말씀입니까?”

안면을 바꾼 최학주를 향해 으르렁댔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 최학주다.

“그럼 영업 정지된 백화점을 뭐 하러 삽니까? 사장님은 다 무너져 가는 건물을 되살릴 재주 있습니까? 돈 들어갈 곳이 한두 군데도 아닐 것 아닙니까? 그리고 보수로 가능한 일도 아니더이다. 미리 공무원을 통해 알아보니 시청에선 건물을 아예 허물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답니다.”

“강운 그룹에서 시청을 어떻게든 구워삶으면….”

“이미 언론에 다 퍼져 버렸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무마합니까? 그리고 BH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시청 공무원이라고 별수 있습니까? 강운이 손을 쓰기에도 한참 늦었단 말입니다.”

BH는 블루하우스의 약자로 청와대를 칭한다.

“청와대 말입니까?”

“BH가 또 있겠습니까? 이번 대통령은 대현 왕 회장과 악연이 깊습니다. 건설사를 제대로 손봐줄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번 일은 이대로 진행하기 어렵습니다. 뭐라도 도움을 드리고자 했지만 세월이 수상해 몸을 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거 아니면 제가 어떻게 이상훈과 경쟁을 합니까.”

최학주는 이상필이 붙잡는 손을 밀어내며 말했다.

“땅이라도 매각하시려거든 말씀하시고요. 커미션은 조금이라도 챙겨 드리죠.”

“땅… 땅이라….”

* * *

최학주는 이상필을 만나고 돌아와 강운모 회장을 대면하고 있었다.

“거의 끝나갑니다.”

“그럼 마지막 작업 시작해.”

비서실에서 새로 만든 시나리오로 선택된 삼풍 백화점 인수 작업이다.

“예. 회장님.”

출입이 금지된 삼풍 백화점은 어느 날 밤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

갑작스러운 붕괴였다. 구급차와 경찰차가 출동하고 혹시나 안에 있을지 모를 사람들을 수색했지만, 이미 출입 금지가 내려진 건물이라 남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TV 뉴스며 신문이며 할 것 없이 무너진 삼풍 백화점을 집중 보도했다.

-이곳은 삼풍 백화점 붕괴 현장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하루에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오가던 백화점은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만약 계속해서 영업을 하고 있었다면 얼마나 큰 희생이 있었을지 짐작도 어려운 아찔한 순간입니다.

다행히 정부에서 실시한 불시 안전 점검으로 적기에 백화점 영업을 중단하고 출입을 봉쇄했기에 참사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 일로 정부는 서울시 전 건축물과 교량에 대한 일제 안전점검에 돌입하기로 했으며, 불법 증축과 설계 무단 변경이 드러나면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담당 공무원의 안전 점검에 부실이 드러나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철저히 조사하고 엄중 처벌할 방침을 밝혔습니다.

“우아… 이걸 이렇게 마무리하시네….”

수안은 TV로 삼풍 백화점 붕괴 뉴스를 보고 있었다.

아직 무너질 때가 아니었던 삼풍 백화점이 무너져 버렸다.

그것도 A동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B동까지 모두 내려앉았다.

이것은 누군가 무너트렸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았고,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수안의 시선이 아버지가 항상 머무는 서재 쪽으로 향했다.

‘하여튼 결단력은 대단하셔. 꼬인 매듭을 단숨에 잘라내시네.’

대현 왕 회장에게 앙갚음하고 싶어 하는 김일삼 대통령이 이런 일을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이번 일제 안전 점검은 대현에게 상당한 출혈을 안길 것이다. 또한 흉물스럽게 무너져 버린 삼풍 백화점 자리를 강운이 매입할 여지까지 생겼다.

‘가격도 똥값이겠어.’

이제 수안에겐 상관없는 일이다. 삼풍 백화점이 아무런 희생 없이 무너진 것으로 충분하다.

아버지께 바라던 일은 이걸로 끝이었다. 나머지 이익은 아버지의 몫이다.

배영성과 최장호는 초 흥분 상태였다.

“지, 진짜로 무너졌습니다. 왜 더 빨랐을까요?”

“그게 정말 무너질 줄은….”

“내가 본 미래를 의심하지 마. 무너질 때가 아닌데 무너졌어. 누군가 개입했다는 뜻이야.”

“…누가 개입을.”

“누구긴 누구겠어? 우리 이후에 작업하던 분이지.”

둘의 뇌리에 떠오르는 인물도 한 사람밖에 없었다.

“회, 회….”

“거기까지. 입에 올리지는 말자.”

“넵!”

장호가 바짝 얼어서 답하고 배영성은 조용히 되물었다.

“그런데… 이걸 꼭 무너트릴 이유가 있었습니까?”

“어차피 안전 점검을 통해 총체적인 건물 부실이 드러났잖아. 지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건물을 부수겠다고 하면 절차가 복잡해. 재건축이 쉬운 일은 아니잖아. 그리고 매입하기 전에 무너트려야 더 싼 가격에 살 수도 있지. 흉물스럽게 남을지도 모를 백화점을 새로 짓겠다고 하면 서울시가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않겠어? 이래저래 절묘한 방법이야.”

지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건물이 무너졌으니 보수해서 사용한다는 선택지는 사라져 버렸다. 삼풍 그룹은 남은 건물 잔해를 자신들의 손으로 정리해야 했다. 서슬이 시퍼렇게 버려진 정부의 칼날이 삼풍 그룹을 향하고 있었다.

“아….”

“우린 희생이 없었다는 것에 만족하자. 그걸로 족하잖아?”

“맞습니다. 도련님.”

“게다가 계획대로 건축과 교량에 대한 일제 안전 점검이 시작되었어. 청와대에서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대형 건설사들 이번에 피똥 쌀걸?”

“성수대교도 걸리겠죠?”

“당산철교도 걸릴 거야. 안 무너졌으면 모르는데, 무너트린 게 신의 한 수였지.”

정부에서 시작한 건축물 일제 점검을 통해 수많은 문제점이 드러났다.

빌딩과 아파트, 상가 건물을 포함한 많은 건축물의 부실 건축이 드러났고, 자재를 줄이고 건축비를 절감한 건설사들은 철퇴를 맞았다.

건설사와 결탁해 뒷돈을 받아먹던 공무원들도 이번 조사로 걸려 들어갔다.

성수대교와 당산철교가 포함된 것은 물론이다.

건축물 점검으로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정부는 탄력을 이어받아 준비된 일을 공표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금융 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이 이후로 모든 금융 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 45분. 국무 회의를 마친 김일삼 대통령은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해 금융 실명제 실시를 전격 발표했다.

금융 실명제의 발표로 정치권과 재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증시는 발표 직후 이틀 동안 8.2%가 폭락했다. 하지만 단기간에 안정을 되찾았고, 한국 경제에 대한 대외 신뢰도가 높아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한 정경유착의 고리였던 불법 정치 자금이 크게 줄어들었고, 비실명 계좌를 통한 탈세와 자금 세탁도 어려워졌다. 검찰의 자금 추적이 용이해지면서 정두인, 노태환 전 대통령의 뇌물 수수 등 대형 비리 사건이 잇따라 적발되기도 했다. 갈 곳을 잃은 지하 자금은 금과 부동산으로 몰렸다.

하지만 금융 실명제가 실시되기 이전에도 대부분의 일반 국민들은 이미 실명으로 금융 거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특별히 큰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부동산 실명제 되시겠군.”

1995년 1월에 발표하고 다음 해 6월 30일까지 유예 기간까지 주는 자비로운 법이다.

신문을 덮은 수안은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겼다.

금융 실명제로 대부분의 기업은 난리가 났지만, 강운 그룹과 수안의 국내 투자 회사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후르릅.

“좋네.”

* * *

강운 그룹 회장실. 강운모 회장도 신문을 보고 있었다.

“금융 실명제가 이렇게 전격적으로 발표되다니….”

“회장님의 선견지명으로 저희는 전부 정리를 끝냈습니다. 다른 총수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라고 합니다.”

“김일삼이 개혁 드라이브를 너무 강하게 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

“이 정도로 만족할 정부가 아닙니다.”

“또? 뭐가 있을까?”

“…찾아보겠습니다.”

뭔가 더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실체를 알지 못하는 비서실이다.

“됐어. 수안이 사무실에나 연결해 봐.”

“도련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잠시만….”

번호를 기억하고 있던 수안의 사무실 전화로 곧장 연결했다.

“도련님? 저 최학주입니다.”

-아. 실장님.

“회장님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회장님.”

강 회장은 최 실장이 들으라는 듯이 스피커 모드로 전환했다.

“나다.”

-예. 회장님.

“금융 실명제. 네 말대로 됐구나.”

‘회장님이 아니라 수안 도련님의 혜안이었단 말인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