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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질 (20/304)

부채질

수안은 어제 있었던 사건의 전말을 듣고 헛웃음을 흘렸다.

“허! 허허!”

그 나이에 내연녀가 있을 줄도 몰랐고, 노구의 몸에 마약까지 손대고 있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

“저희도 회장이 약을 하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내연녀의 집에 그렇게 자주 들락거릴 줄도 몰랐고요. 모든 일이 저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약쟁이는 확실히 처리한 거야?”

수안의 물음에 장호가 답했다.

“치사량의 20배를 넘게 주입했습니다. 절대로 살 수 없습니다.”

“아직 기사 안 났어?”

“예. 그룹에서 막고 있을 겁니다.”

“음… 궁금하지만 우선은 참자. 우리가 움직일 때는 아니니까.”

배영성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물었다.

“그래도 첫 단추는 잘 꿰어졌죠?”

“첫 단추고 나발이고… 이런 큰일을 나도 모르게 처리해?!!!”

상황 파악 끝났고, 궁금증은 모두 해결된 다음이다. 이제 제멋대로 일을 처리한 두 사람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오래 걸린다며! 나한테 보고한다며?!”

“죄송합니다. 도련님이 아시면 개별 행동을 하실까 봐 말씀드릴 수 없었습니다.”

수안이 따로 움직일 생각이긴 했다.

지금까지 밖에 보여 준 능력보다 더 큰 힘을 숨기고 있는 수안이다.

복면을 하고 경호원들을 단숨에 처리할 수도 있는 능력이 있었고, 100미터를 9초대가 아니라 더 빨리 달려 도망칠 수도 있었다.

만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초능력자의 힘과 다를 바 없는 능력이었다.

“하아….”

그렇다고 자신의 능력을 다 까발릴 수도 없는 일이다.

“출발해.”

“예….”

차가 다시 출발하고 수안이 입을 열었다.

“배 이사랑 장호는 같은 아파트로 들어가.”

둘에게 집을 선물하겠다는 뜻이다.

““도련님!””

“됐어. 이 정도 일로 내 입 아프게 하지 마. 압구정이 괜찮더라. 지은 지는 좀 됐어도, 주변에 학교도 많고 접근성도 좋아. 향후 미래에… 엄청나게 오르기도 할 테고. 2020년 정도면 40억까지 가는데, 지금은 3억도 안 하지 아마?”

수안이 말하는 아파트는 43평짜리 대현 아파트를 말함이다.

“우어….”

“나중엔 매물이 없어서 못사는 놈이니까 그냥 받아. 배 이사는 일본 투자 회사 자금 돌려 빼서 아파트값 치르고 얼른 매입해.”

“옙!”

“감사합니다!”

수안은 막막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일이 이렇게 해결될 수도 있음이 놀라웠다.

‘…모든 일이 너무 공교로워.’

기회를 보고 있었더니 알아서 기회를 만들어 줬고, 약으로 죽일 생각을 했더니 이미 약을 하고 있었다.

‘새로 태어난 것부터가 엄청난 행운이었는데, 내가 하는 일에도 행운만 가득한 것 같아.’

수안의 생각대로 자신이 하는 일에는 항상 행운이 뒤따르고 있었다.

전생엔 뭘 해도 불행으로 이어졌다면 현생은 뭘 해도 행운이 함께한다.

[사랑받는 아이야. 너의 잘못된 운명에서 불행을 거둬 주마.]

이것도 누군가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 * *

이번 일은 이것으로 일단락이다.

“큰일 했는데 고작 이것밖에 못 해 줘서 미안하다. 나중에 제대로 보답할게.”

“보상을 바란 적 없습니다. 도련님.”

처음엔 이번 일로 얻을 것이 없다고 했지만, 스스로 미래를 안다는 비밀을 공유했고, 이제는 살인까지 공모한 사이였다. 비밀을 유지하는 데 돈만큼 믿음직한 것은 없었다.

“그런 것 치고는 대답이 씩씩하더라?”

“푸흐흐. 곧 결혼하는데 신혼집을 어떻게 하나 고민하긴 했습니다. 하하하.”

“그리고 이번 주말은 봉사활동 가자.”

“또 그 고아원으로 가십니까?”

“한 군데를 진득하게 후원하는 편이 여러 군데 분산하는 것보다 나아.”

“후원만 하시면 될 텐데….”

많은 돈을 후원하면서도 종종 직접 방문해 봉사까지 하고 있었다.

“애들이 귀엽잖아. 그리고 못된 짓을 했으니 좋은 일도 해야지.”

“아휴. 못된 짓은 저희가 했지요. 저희도 이번에 가서 아이들과 많이 놀아 주겠습니다.”

지난 생의 잔재였다.

자신이 재벌가에서 태어났으니 본래의 정금용은 어떻게 된 것인지 무척 궁금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정금용이라는 인물은 없었다.

세상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자신의 부모였던 이들은 멀쩡히 살아 있었고, 자식은 없었다.

둘이 알콩달콩 살아가고 있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섰다.

‘나 때문에 불행했던 모양이야….’

자신의 존재가 전생의 부모에게 불행을 가져왔다고 생각했다.

정금용을 찾다가 남은 것은 미카엘라 수녀님이 계시던 희망고아원이었다.

금용이 고3까지 살아온 장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애들이 얼마나 날 잘 따르냐? 그런 애들 두고 어떻게 발길을 끊어?”

나이가 차서 어쩔 수 없이 고아원을 떠나야 했지만, 남아 있던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던 금용이다. 당시엔 험한 세상 살아가느라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지금은 충분히 돈도 많았고, 부족한 것이 많은 아이들을 얼마든지 지원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에 보답하지 못한 미카엘라 수녀님의 은혜를 이제 갚아 나가고 있었다.

“준비하겠습니다.”

“저번에 보니까 공이 많이 부족해 보이더라. 축구공하고 농구공하고 넉넉하게 준비하고 사이즈 맞춰서 축구화랑 유니폼도….”

“부족한 것 같아서 미리 보냈습니다. 미카엘라 수녀님이 좋아하신다는 과일도 때마다 보내고 있습니다.”

“…잘했네.”

따로 챙기지 않아도 알아서 잘 챙기는 배영성이다.

“이제 해외 지사 투자 보고 드려도 될까요?”

“사무실 가서 하자. 이제 그래도 되잖아?”

“흐흐. 그렇죠.”

국내 투자 회사를 맡고 있는 사람도 수안의 사람이다. 신뢰가 높아져 해외 투자사의 일을 공유하고 있었다.

“김현성 사장과 같이 보고하겠습니다.”

“그래. 그래도 큰일 끝냈더니 기분이 홀가분하네.”

“저도 그렇습니다.”

“저도요!”

“장호가 제일 고생했어.”

“하하하.”

“장호는 빨리 결혼해. 이제 집까지 마련했으니까 미룰 것 없잖아?”

“배 이사님이 얼른 해야 저도 하죠.”

“배 이사. 속도 좀 내야겠네?”

“…올해 넘기지 않겠습니다.”

“크흐흐. 항상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

* * *

수안은 다음 날 신문에 등장한 부고 기사로 삼풍 그룹 회장의 죽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급성심근경색이라… 틀린 말은 아니겠지.”

그 자리에 같이 있었다던 내연녀와 마약 얘기는 한 글자도 없다.

경찰의 수사나 병원에서의 검사도 깔끔하게 무마시켰다는 뜻이다.

슬슬 두 아들의 상속 분쟁이 수면 위로 올라 올 것 같았다.

* * *

“야. 이상필. 네가 뭔데 끼어들어?”

“상훈 형님. 나도 아버지 아들 아니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 내가 나서야지. 게다가 나도 그룹에 이름을 올린 임원 아닙니까? 나도 삼풍 백화점 사장이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마주친 둘이다.

첫째 아들 이상훈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충격에 허둥지둥하는 사이 둘째 아들 이상필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아버지가 알고 지내던 권력자들에게 연락을 넣고 마약 사건이 표면화되지 않도록 경찰과 병원에 손을 쓸 수 있었다.

“그래. 경찰이랑 병원은 잘 처리했어. 그래도 내가 상주다. 너는 회사에서 자리 지키고 있어.”

장례식장에 얼굴도 비추지 말라는 말에 상필의 목소리가 커졌다.

“형님!”

“어디다 대고 자꾸 형님이래?”

“아무리 배다른 자식이라지만 너무하잖소!”

죽은 회장이 첫 아내에게서 얻은 첫째 아들과 두 번째 아내에게서 난 둘째 아들이다.

“호적에 올랐다고 해서 적자인 내 위상이 작아지진 않아. 넌 첩의 자식이고.”

“말끝마다 첩 얘기 좀 그만하십쇼. 그리고 형님 말대로 내가 첩의 자식이래도 호적에 올라 있소. 법적으로 내 몫은 있는 거요.”

“뭐어! 너 말 다 했어? 임마!”

“그래도 복잡하게 법원까지 가진 맙시다. 누군 힘이 없어서 형님이 헛소리하는 걸 들어 주고 있는 줄 아쇼?”

“너 이 새끼가….”

“이 새끼 저 새끼 찾지 마시고… 내가 새끼면 형님도 같은 아비에게서 나온 같은 새끼요.”

“휴우. 내가 알아서 챙겨 줄 테니까 먹고 떨어져.”

“하! 들어나 봅시다. 뭘 챙겨 주시려고?”

“빌딩 하나 내줄 테니까….”

“누구 코에 붙이라고 빌딩이오? 나 참 어이가 없네.”

삼풍 그룹은 대기업 반열에 들 수도 있는 그룹사였다.

빌딩 하나로 끝내기엔 이상필의 야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욕심이 과하면… 제 명에 못 사는 법이다.”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하는 거요? 아니면 본인 얘길 하시는 거요?”

“뭐 임마!!”

상필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이상훈이 너나 내 경고 허투루 듣지 마.”

“슬슬 본색을 드러내시려고?”

“큭. 본색 같은 소리 하네.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죽는다고 경찰이 움직일 것 같냐? 이번에 못 봤어? 너 죽어도 소리 없이 묻어 줄 사람이 쌔고 쌨어. 어디서 펜대만 잡던 놈이 엉겨 붙어?”

한 걸음 불쑥 다가와서 하는 말에 첫째 아들의 고개가 살짝 내려갔다.

이상필은 어려서부터 운동을 하고 어깨들과 어울렸기에 풍기는 기세가 사뭇 잔인했다.

“…….”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분만큼은 동생에 비해서 힘이 약했다.

아버지의 군부 인맥은 둘째에게 이어졌고, 자신의 힘은 삼풍 그룹 내부에 있었다.

“이제 슬슬 정신이 돌아와? 내가 형님 대접해 줄 때 적당히 고개나 끄덕이고 있어. 쥐도 새도 모르게 골로 가는 수가 있으니까. 앙?”

“…….”

둘째 이상필이 상복을 입고 밖으로 나가자 첫째 이상훈도 얼른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래도 내가 첫째야 임마. 아직 우리나라에선 첫째가 먼저라고.”

* * *

강운모 회장도 삼풍 그룹 회장의 부고를 보고 받았다.

“삼풍 그룹 이 회장이 죽었어?”

“예. 회장님. 사인은 심근경색이라고 했지만, 알아보니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인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내연녀와 같이 국가에서 금지한 약물을 주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강운 그룹 비서실의 정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강운 그룹 비서실에까지 감추긴 힘들다. 중앙 정보부에서 차출한 인물들을 대거 고용되었기에 첩보 능력까지 출중했다. 경찰과 병원에서 비튼 정보를 찾아내는 것도 이들에겐 손쉬운 일이었다.

“그 나이에 기운도 좋아.”

“조화는 미리 보냈습니다.”

“얼굴은 비춰야겠지. 평소 모르던 사람도 아니고.”

“다른 일정을 미뤄 두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그날 저녁 강 회장은 아들을 서재로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앉아 봐.”

“예. 아버지.”

“저녁에 같이 장례식장에 갈 일이 생겼다.”

“삼풍 그룹 말씀이시죠?”

“부고 기사를 봤나 보구나.”

“예.”

“거인이 쓰러졌으니 가 보긴 해야지.”

“알겠습니다. 가서 만나야 할 분이 많겠군요.”

“그래. 두루두루 안면을 익히는 자리가 될 게다.”

‘마무리는 고인의 명복을 빌어 주는 장례식장이 제격이지.’

이번 사건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수안이다.

아버지와 함께 장례식장에 간 수안은 향을 피우고 절하고 상주와도 맞절을 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 뒤로 수안은 아버지 곁에 붙어서 재벌가 사람들과 안면을 익히는 시간을 가졌다.

“강수안 선수를 여기서 보는군. 강 회장님은 뿌듯하시겠습니다. 한국대 입학에 사법 고시까지 단번에 패스했다죠?”

“오. 강수안 선수. 지난 올림픽은 정말 대단했어.”

“강수안….”

“강수안….”

수안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수안은 끝없이 이어지는 칭찬에 계속 인사하고 얼굴에 작은 미소를 지어야 했다.

수안은 재계 인사들과 인사하면서도 상주인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을 눈여겨봤다.

둘은 옆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서로 대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기계적으로 인사하고 문상객이 오면 따로 빠져나와 인맥 만들기에 바빴다.

저마다 자신이 아들임을 어필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강 회장은 아들이 보는 곳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

“보기 흉할지 모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 네. 아버지.”

“삼풍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이미 물밑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게다.”

수안은 아버지의 마음에 슬슬 부채질을 시작했다.

욕심을 불어넣는 것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떨어질 것도 있겠군요.”

“응?”

“서로 더 갖기 위해 싸움을 시작하면 크게 분쟁이 생기는 물건이 있기 마련이죠. 예를 들면… 삼풍 백화점. 너무 가치가 높아서 둘 다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겁니다.”

“포기하지 않는데 떨어지긴 뭐가 떨어져? 자잘한 계열사라면 모를까.”

“둘 다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라면… 상대가 갖지 못하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니까요.”

“……!”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지 못한 강 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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