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행
배영성은 수안에게 말한 것과 달리 빠르게 움직여 화학 약품을 구입했다.
사실 몇 가지 화학 약품은 일반인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거기에 약간 전문적인 배합 방법만 알면 제조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훗날 화학과 교수도 일반인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화학 약품으로 마약을 만들어 판매했다가 잡힌 일이 있을 정도다.
사후 부검으로 조사해 봐야 기존 마약류 성분만 검출될 것이다.
“증거로 남길 분량도 확보했고….”
“그럼 갑시다. 형님.”
사석에선 배영성을 편하게 대하는 장호였다.
최장호는 이미 배영성에게 전반적인 얘기를 듣고 합류해 있었다.
누군가 미래를 본다는 것은 쉬이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장호도 영성과 함께 지금까지 수안을 겪어 왔다. 오히려 수안이 미래를 본다는 말을 들으니 지금까지의 믿기 어려운 지시들과 그로 인한 성과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사전 조사는?”
“집에 경호원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회장이 자택에 없는 날입니다.”
“그런데 어딜 가자는 거야?”
“어디긴요. 내연녀 집이죠.”
“뭐?”
“노친네가 다 늙어서 기운도 넘치더라고요. 집에는 출장이라고 핑계를 대고 가끔 그리로 갑니다. 경호원까지 다 떨구고 갑디다.”
절호의 기회가 저절로 만들어졌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은 쉽게 예상하기 힘든 일이다.
아무리 불안이 가득한 사람이라도 끽해야 교통사고 정도를 예상한다.
살인 예고가 있지도 않았는데, 이를 대비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
“조용히 수면 가스 살포하고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쇼.”
“뒤는 도련님이 봐준다고 하셨어.”
“그런 거 바라지 맙시다. 형님이 말했잖수. 오로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일이라고.”
“그랬지.”
“그러니 우린 우리 일을 하는 겁니다. 뒷일까지 생각하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우.”
배영성은 조용히 차를 몰았고, 장호가 말한 위치에 도착해 기다렸다.
최장호는 차 안에서 쌍발 망원경으로 회장이 들어간 집을 감시했다.
“불 꺼졌고….”
잠시 뒤 다시 말했다.
“다시 켜졌고. 조루 새끼였네.”
“뭐? 그걸 어떻게 알아?”
장호는 여전히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불 끄고 그 짓 한 다음에 뒤처리하려고 다시 불을 켠 겁니다. 다시 불이 꺼졌으니 넉넉하게 30분 뒤에 진입하면 됩니다. 타깃은 나오지 않았으니 안에 있는 것은 확실하고요.”
“기술자가 괜히 기술자가 아니네.”
“음… 잠깐 저쪽 건물에 올라가서 내부 확인하고 올 테니까, 형님이 잠깐 보고 있어 봐요. 타깃이 나오는지만 보면 됩니다.”
“오케이.”
장호는 주변 다른 건물을 보다가 슬쩍 담을 넘어 옥상으로 가서 다시 망원경에 눈을 고정했다.
“얼래? 크흐흐. 왜 불을 안 켜고 플래시를 켜나 했더니.”
어렴풋하게 보이는 열화상 망원경에 둘이 하고 있는 일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조금 더 감시하던 장호는 발소리를 죽여 얼른 담을 넘었고, 다시 차에 탑승했다.
“둘은 잠들었어?”
“아뇨. 딴짓을 하는데요?”
“딴짓?”
“물건은 괜히 만든 것 같수.”
“자꾸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얘기해.”
장호는 회장과 내연녀 둘이 이미 마약에 손대고 있었고, 약을 서로에게 주입하고 있었음을 말해 줬다.
“허어! 이미 약을 하고 있었어?”
“지금쯤 끝났겠네. 둘 다 보내버리고 올게.”
“그래야 깔끔… 아니야. 여자는 남겨. 그래야 누구도 침입하지 않았다는 증인이 될 거야.”
증거를 남기지 않는 것도 좋지만, 아예 하나가 살아 있다면 사고로 보이기 쉬웠다.
“음… 그게 더 좋겠네. 역시 형님이 잔머리는 최고야.”
“됐고! 움직여.”
장호는 차 안에서 장갑을 낀 다음 주변 인적을 확인하고 쓱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 주차된 차는 회장의 차량이었고, 가까이 가서 안을 살피자 누군가 타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빌라로 자연스럽게 진입한 장호는 문 앞에서 잠금장치를 풀고 조용히 문을 열었다.
역시 완전히 약에 취해 곯아떨어진 둘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일은 확실하게.’
둘의 코에 준비한 마취제를 흡입시켜 완벽하게 기절 상태로 만들고 둘이 사용하던 주사기와 하얀 가루를 찾아냈다.
‘빙고.’
‘주님, 오늘 약쟁이 하나가 주님 품으로 돌아갑니다.’
첫 주사가 회장의 몸에 주입되었다.
‘보시고 마음에 안 드시면 악마에게 넘겨주셔도 좋습니다.’
두 번째 주사가 또 들어간다.
‘하지만 반품은 안 받겠습니다.’
마지막 주사가 회장의 몸에 주입되었다.
1cc가 넘어가면 건장한 성인도 죽일 수 있는 약물이 주사기 가득 세 번이었다.
삼풍 그룹 회장은 이제 내일 뜨는 해를 볼 수 없다.
‘신이 아닌 이상 살릴 수가 없지.’
주사기를 원래 자리에 놓은 장호는 자신이 건드린 물건이 있는지 다시 확인하고 발자국까지 체크하며 빠져나왔다. 증거는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깨끗하게 남지 않았다.
조용히 발소리를 죽인 장호가 차에 타자 배영성이 떨리는 손으로 차를 출발시키려고 했다.
“형님. 라이트는 켜지 마시라니까….”
사전에 교육을 받았음에도 저도 모르게 켜려고 했다. 장호가 막지 않았으면 우리가 여기 왔다 간다고 번쩍번쩍 광고를 할 뻔했다.
“아. 미, 미안.”
차가 출발하고 한참 지나 도로에 진입하자 배영성이 물었다.
“제, 제대로 됐어?”
“형님이 만든 것은 도로 가져왔소. 거기 다 있더이다. 증거 하나도 남기지 않았으니 누군가 의심받을 것도 없소.”
약도 둘이 사용하던 기존의 약을 사용했고, 지문과 족적도 남기지 않았다.
아무리 경찰이 조사해도 나올 것은 없었다.
“후하… 됐다. 이제 됐어.”
“도련님은 어디 계시는데요? 보고부터 해야죠. 뒤 봐주신다며.”
“도련님께는 내일 가자. 아직 아무 얘기도 안 했어.”
“뭐요? 그러면서 뒤를 맡겨?”
“뒤는 상관없다며?”
“그래도 그렇지! 이 사람아! 나 곧 결혼할 여자도 있다고!”
“누군 없냐? 이제 시작이야. 나머지는 도련님과 내가 맡으마.”
“…그 건물이 남았죠?”
회장의 죽음은 기정사실이지만, 무고한 시민들을 몰살시켰던 백화점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욕심쟁이 아들놈들이 절대로 가만있을 리가 없어. 그 일은 도련님이 하신다.”
“그런데. 형님 애인 있었수? 왜 나한테 얘길 안 해?”
“형수님이라고 불러 짜샤.”
“오호라. 결혼까지 할 생각인가 보오?”
“오늘 일이 잘 풀렸으니 생각해 봐야지.”
“나도 그렇수. 오늘은 아주 완벽한 하루였지.”
미션을 훌륭하게 완수한 둘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되돌아갔다.
* * *
그리고 다음 날.
회장을 모셔가기 위해 내연녀의 집으로 갔던 황 비서는 회장이 잠에서 깨지 않자, 몸에 손을 댔다.
“……!!!”
짜르르 솜털이 곤두섰다.
시체는 손을 대자마자 손끝으로 알 수 있다.
황 비서는 서늘하고 차가운 감촉과 굳은 몸을 느낄 수 있었다.
얼른 옆에 잠들어 있던 회장님의 내연녀를 흔들었다.
“야! 일어나! 일어나라고!”
“하흠…. 뭐야? 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렇게 깨우니?”
“조용히 해. 뒈지고 싶지 않으면.”
잔뜩 내리깐 황 비서의 목소리에 내연녀가 움찔했다.
“뭐, 뭐야?”
“너… 어제 회장님하고 뭐 했어?”
“너라고? 방금 나보고 너라고 했니? 너?”
평소 회장의 위세를 등에 업고 황 비서를 자신의 비서처럼 부리던 여자다.
짝. 짝.
“아악!”
황 비서의 손이 내연녀의 양쪽 뺨을 오갔다.
이젠 회장님이 죽었으니 내연녀의 뒷배는 없었다.
“정신 차리고 똑바로 봐, 이년아.”
흔들리는 골을 부여잡고 옆을 보자 푸르뎅뎅하게 변해 버린 회장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 우리 회장님 얼굴이 왜….”
“어제 자기 전에 뭐 했어?”
“그냥. 잠만.”
짝.
“악!”
“똑바로 말 안 해!”
“뽕… 조금 했는데요….”
“뭐? 약?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리고 그냥 잤어요! …그런데 회장님은 왜…?”
내연녀는 아직 회장이 죽은 것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회장님이 이 꼴이 됐는데… 옆에서 잠만 퍼 잤다 이거야?”
퍽. 퍽. 짝. 짝.
“아악! 나 죽어! 꺄아악.”
퍽. 퍽!
한참 분을 풀던 황 비서는 얼른 전화기를 찾아 연락했다.
“비상이다. 빨리 첫째 도련님 찾아서 데려와. 내가 연락 드렸다고 말씀드리고! 알았어? 위치는… 자주 가시는 빌라. 알지?”
그리고 얼른 전화기를 돌렸다.
“안녕하십니까. 저 회장님 비서 황기철입니다…. 아 네. 문제가 생겨서 연락 드렸습니다…. 회장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으윽….”
큰 소리에 귀를 잠깐 뗐던 황 비서는 다시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어제 약이 과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 그 약 맞습니다. 저는 계속 말려 왔는데…. 예…. 죄송합니다…. 경찰 말고 병원부터… 예. 알겠습니다.”
방금 통화는 둘째 도련님이다. 황기철은 잠깐 생각 끝에 둘 사이에 줄타기를 시작한 것이다.
비서실로는 첫째 도련님을 부르고 본인은 둘째 도련님에게 연락해서 자신이 누구 편인지를 인지시켰다. 둘 중에 누가 물려받더라도 자신의 입지를 공고하게 만든 것이다.
“후우….”
하지만 황 비서는 자신의 입지가 공고해져 봤자 이미 무너져 가는 기업이라는 것을 알 수 없었다.
* * *
수안은 대학 방학 시즌이라 국내 투자 회사에 출근하며 지내고 있었고, 오늘도 무거운 얼굴로 최장호가 운전하는 대형 밴에 탑승했다. 옆 좌석에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배영성이 타고 있었다.
“…뭐야?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아?”
수안은 아무리 생각해도 배 이사와 장호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 탐탁지 않아, 다른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덕분에 밤에 잠도 잘 오지 않는다. 그 와중에 사람을 죽이겠다던 배영성이 싱글벙글 웃고 있으니 이상할 법도 했다.
“좋은 일 있습니다. 곧 결혼할 것 같습니다.”
배영성은 바로 얘기하지 않고 다른 핑계를 댔다.
“…그래? 진짜로?”
“네. 마흔 넘기 전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배 이사가 올해 마흔이잖아?”
“만 나이로 39이죠.”
“만 나이는 개뿔…. 어쨌든.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어. 그 일은 없었던 일로 하자.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될 것 같아.”
곧 결혼까지 한다는데 위험한 일을 맡길 수는 없었다.
“다른 방법이요? 흐흐.”
“삼풍 그룹 일은 나한테 맡기고 배 이사는 결혼이나 준비해. 이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어디 있겠어?”
“크큭.”
최장호가 운전하다 말고 웃음을 터트렸다.
“푸훕.”
배영성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져 버렸다.
“뭐야? 왜 그렇게 웃어들?”
배영성이 그제야 수안에게 사실을 고했다.
“일은 끝났습니다. 어제 결행했고,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
“뭐어?!!!”
“장호가 생각보다 능력이 좋습니다. 시기도 완벽했고, 주변 상황까지 너무 공교로웠죠. 딱 죽을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장 차 세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