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 & 삼풍
“그래. 성수대교뿐 아니라 리비아 대수로 공사까지 맡은 그 동아 그룹 말이다. 이번에 만나려고 했던 아이가 바로 동아 그룹 아이였다.”
“…다음에는 꼭 상대가 어느 집 자제인지 여쭤봐야겠네요.”
성수대교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음은 자신이 지금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동아 그룹이 탐탁지 않은가 보구나.”
“아무리 대단한 그룹이라도 최일석 회장의 자손이라면 안 봐도 뻔하지 않습니까.”
덕분에 핑계는 아비의 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네가 재계 총수들까지 벌써 파악하고 있느냐?”
“특히 노태환에게 비자금을 건네준 일은 이번 대통령 재임 중에 드러날 일이죠. 재벌들 대부분이 전임 대통령들에게 비자금을 준 일은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건설사를 가진 재벌이 안 줬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올해는 수안이 일전에 말한 그대로 김일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첫해였다.
김일삼은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부터 하나회를 해산하고 쿠데타의 가능성을 일소해 버렸으며, 제5, 6공화국의 전직 대통령들을 구속하라는 요구에 시달리고 있었다. 수안의 말이 현실이 된 것이다.
“…또 그 소리구나.”
“우리도 그리 깨끗하진 않겠지만, 제가 말씀드려 미리 챙기셨을 테니 흔적을 많이 지우셨겠죠.”
“…….”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할 말이 없었다. 다른 총수들이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과는 달랐다. 수안의 말대로 혹시나 하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증거를 말살한 덕분에 두 전직 대통령이 수감된다 해도 큰 걱정을 덜었다.
“그래도 차명 계좌는 전혀 낌새도 없는데….”
아직 당시에 중점적으로 수안이 설파하던 차명 계좌에 대한 법안은 감감무소식이다.
“그래야 효과가 극대화되겠죠. 현 대통령이 넉넉하게 기회까지 주면서 법을 발효하겠습니까?”
“…그럼 언제로 생각하느냐.”
“지금이 벌써 7월이니… 다음 달에 기습 발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청와대 경제수석도 모르는 일이거늘….”
예전 수안의 말에 의심 가득한 강운모 회장은 미리 청와대에 은밀한 손길을 뻗어 두고 있었다.
“김일삼이 괜히 정치 9단 소리를 듣겠습니까? 경제수석이 경제인들과 소통할 것임은 불문가지입니다.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을 캐보시면 답이 나올 겁니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공무원들 중에 자리를 비운 사람들을 찾아보시면 윤곽이 잡히시겠죠.”
전생에 김일삼은 하위 공무원을 해외 출장으로 돌리고 모처에 잡아 둔 다음 초안을 만들어, 기습적으로 발표했었다.
“…넌 그걸 어찌 알고?”
“…저라면 그렇게 할 테니까요. 경제수석도 모르게 초안을 만들어서 기습적으로 국무 회의를 소집하고 대통령 긴급 명령을 하달할 겁니다. 그렇게 하면 지하 검은 자금은 그대로 묶여 버릴 겁니다. 허공으로 날라 버리는 거죠.”
금융 실명 거래에 관한 법률은 1982년 12월에 이미 제정되어 있다. 다만 전산화 등의 준비 기간을 고려해 1986년 1월 1일 이후 대통령령이 정하는 날 시행하는 것으로 유보해 놨을 뿐이다.
대통령의 명령만 내려지면 곧장 실행되는 것이다.
“흠….”
이제 수안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언제나 약속을 지켜왔고 지금까지 미래를 예측한 말은 모두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너는 다음 달로 예상한다 이 말이지?”
“예상을 넘어선 확신입니다. 9월까지 넘어가지 않습니다.”
“알았다. 최대한 정리해야겠군.”
“아직도 반쯤 남겨두신 모양이죠? 미리부터 정리하셨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끄응. 반 남은 건 또 어떻게 알았누?”
“아버지 아들 아닙니까. 저도 확신 없는 일에 전부를 걸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확신은 없으나 의심이 되고 그 의심이 나름 합리적이라 판단했다면 반을 걸었을 겁니다. 아버지처럼 말이죠.”
20년 넘게 봐 온 아버지의 성격이다. 수안도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 말 안 해도 네가 내 아들임은 온 국민이 알아.”
“푸흐흐. 어쨌든 비서실이 바빠지겠네요. 아직 7월 초에 불과하니 한 달은 넘게 남았을 겁니다.”
수안이 비서실까지 언급하자 얼른 말을 돌렸다.
“요즘 술자리가 잦더구나. 돈 필요하면 미리 얘기하고.”
“제가 법학과 선후배 술 사 주는 거 들으신 모양이죠?”
“잘하고 있다.”
“아버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저는 학연으로 붙들고 있으니 이 모양이구요.”
사법 연수원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접근하는 사람들이 바로 기업에서 나온 인물들이다. 그중 발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대현 그룹과 삼디 그룹이다. 강운 그룹은 세 번째 정도였다. 많은 돈을 지급하고 싹부터 키워나가는 강운 그룹 법조 장학생들은 대현, 삼디와 더불어 법조계를 틀어쥐고 있었다.
“됐다. 최 실장에게 얘기해 놓을 테니 알아서 가져다 써.”
“저도 돈 있어요.”
“그 돈은 네가 키운다는 회사에나 써.”
“그럼 염치 불구하고 최 실장님께 받아 갈게요.”
“나가 봐.”
“예. 또 불러 주세요.”
수안이 나가자마자 강운모 회장이 전화를 들었다.
“차 대기시키고, 최 실장 회사로 불러. 비서실 전원 들어오란다고 전해.”
-예. 회장님.
* * *
방으로 올라온 수안은 웃음기를 지우고 장고에 돌입했다.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막아야 할 것인지 고민스러웠고, 이어 생각난 대 재난까지 고민이었다.
바로 1995년 06월 29일 발생하는 삼풍 백화점 붕괴사건이다.
성수대교 붕괴 덕분에 떠올랐다. 당시 공장에서 열심히 공돌이로 일하던 정금용도 TV 뉴스로 사건을 접하고 기함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금용이야 백화점에 갈 일도 없는 노동자였으니 남의 일이나 다름없었지만, 애꿎은 인명이 걸린 일에 안일하게 대처한 당시 삼풍 백화점 지도부의 무책임한 태도가 분노를 일으켰었다.
“도대체 건설을 왜 이따위로 한 거야? 감리는 뭐 하고?”
사전에 부실 공사를 신고해서 보강 공사를 하라고 해도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 놈들이라면 애초부터 부실 공사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공무원들과도 밀접하게 결탁한 건설사들은 부실 공사 신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오히려 공무원들이 알아서 무마할 일이다.
“부서질 것은 부서져야지. 그래야 무너질 회사가 무너지지. 그렇다면 방법은….”
성수대교는 트럭 몇 대만 수배해서 당일에 막아 버리면 될 일이다. 극심한 교통체증이 발생하겠지만,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곤란함을 겪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삼풍 백화점은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아오. 그 노친네 말도 안 통하게 생겼더라.”
삼풍 그룹 창업주 본인이 군부 및 중앙 정보부와 결탁하고 인맥을 활용해 굵직한 건설 공사를 따낸 인물이다. 그렇게 부동산 시장에서 성공하고 삼풍 백화점과 삼풍 아파트로 정점을 찍었다. 국내 제일의 초호화 명품 백화점이 바로 삼풍 백화점의 위상이었다.
“…무료로 보강 공사를 해 준다고 해도 백화점 영업을 못 해 손해라며 지랄하겠지?”
아직 성수대교 붕괴까지 1년이 넘게 남았고, 삼풍 백화점 붕괴까지는 2년이 남았다.
시간은 충분했다.
“…한번 작업 진행해 봐?”
수안의 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 * *
강운 그룹 비서실이 남은 차명 계좌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동분서주하느라 수안에게 신경을 못 쓰는 사이. 수안은 배영성과 작당 모의를 하고 있었다.
“도련님 말씀은…. 국내에서 테러를 하자는 말씀이세요? 그것도 멀쩡한 다리를 무너트린다고요? 성수대교를?”
“다리뿐 아니야. 삼풍 백화점도 포함시켜야지.”
막을 수 없다면 먼저 터트리면 된다.
아무도 없는 시간에 무너지면 인명 피해는 완벽하게 막을 수 있었다.
약간(?) 과격한 방법으로 계획하고 있었다.
“왜요?”
“어차피 무너질 건축물이니까. 사람이 다치기 전에 미리 쾅! 하고 무너트리면 아무도 안 다치잖아.”
“다리하고 건물이 이유 없이 왜 무너져요…. 잠시만 좀 보겠습니다.”
배영성은 항상 가지고 다니던 플래시를 품에서 꺼내 수안의 눈을 벌리고 동공을 비추며 관찰했다.
“약을 하신 것 같진 않은데….”
탁.
“치워! 내가 약이나 빨고 다닐 놈이야?”
“그럼 그게 무슨 소리냐고요?”
“배 이사.”
“네. 도련님.”
수안은 잠시 눈을 감고 조용히 분위기를 잡았다.
‘…내 비밀을 말하지 않으면 배 이사를 설득할 방법이 없어. 수백 명의 목숨보다 비밀이 중요하진 않아….’
올림픽에 대한 욕심을 접고 남은 것은 기업을 경영하는 것에 있었다. 이제 가만히 있어도 좋은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성수대교와 삼풍 백화점에 관여한다면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비밀을 공유할 것인가… 비밀을 지키고 희생자들을 지켜봐야 하는가….’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고민을 끝낸 수안이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맨날 올라갈 주식 집어내고 앞으로 일어날 일 때려 맞추는 게 이상하지 않았어?”
“그야… 도련님은 어려서부터… 잠깐. 다른 이유가 있으셨던 겁니까?”
수안은 누가 듣지도 않는데 작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나 미래를 알고 있어. 꿈인지 뭔지 모르지만… 내가 본 미래가 다 맞아 들어가고 있어.”
“…….”
“알아. 물론 안 믿기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예측한 상황 중에 틀린 거 있어? 있으면 배 이사가 말해 봐.”
“어, 없죠….”
없었다. 지금까지 수안이 예측한 미래 중에 틀린 일이 없었다.
국내 강운 그룹 계열사에 미래 비전을 제시해 기록적인 성장이 가능하게 만들었고,
해외 투자 회사의 수익률도 믿기 어려울 만큼 높았다. 국내에 설립한 투자 회사가 인수한 기업들도 잠깐 사이에 기록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돈을 쓸어 담는 중이다.
“외부에 강운 비서실 같은 단체를 운영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미래를 예측하겠어? 미래를 보고 왔으니 가능한 일이란 말이야!”
배영성은 지금까지 옆에서 지켜봐 왔기에 수안의 말이 허황되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정말로 미래를 보셨다는 말씀이세요?”
“내가 배 이사한테만 얘기하는 거야. 아버지 어머니한테도 이건 얘기 못 해. 이 비밀은 죽을 때까지 지켜줘야 해. 이 비밀은… 정말로 중요하다고.”
“…그럼 다리와 백화점 얘기도 미래에서. 아니, 꿈에서 보셨다는 말씀이세요?”
“내년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로 49명이 한강으로 추락하고 32명이 사망해. 사망자들 중엔 출근하던 직장인과 학교에 등교하던 중학생들도 다수 있었어. 그리고 다음 해 1995년 06월 29일 삼풍 백화점 붕괴. 당일 백화점에 있던 사람들 중 500여 명이 사망하고 부상자, 실종자도 많아. 내가 본 미래야. 지금까지 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으어어어….”
배영성의 턱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사망자 숫자가 엄청났다.
“확정된 미래지만. 난 바꾸고 싶어. 배 이사 도움이 절실해.”
“으윽.”
배영성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뜨고 물었다.
“도련님이 정말로. 정말로 미래를 보신다는 말씀이죠?”
거짓이길 바라고 다시 묻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된다면 좋겠지만, 제멋대로야. 보이지 않는 것과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더 많아.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본 미래 중에 이뤄지지 않은 것은 없다고 했잖아. 내가 본 미래의 모습이야. 확실해.”
“확신… 하시네요.”
“확신? 난 확신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사실로 느껴져.”
수안이 전생에 보고 들었던 뉴스들이다.
당시엔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나이가 먹은 다음엔 그저 과거의 작은 편린으로 남은 일이지만…. 지금은 현실이다.
그것도 사건이 발생하기 전.
재난을 막을 수 있는 기회였다.
“…후우. 후우.”
“성수대교에 트럭을 세워서 당일 통행을 막을 생각도 했었어. 아까 말했던 다리 폭파도 여러 대안 중에 하나야. 삼풍 백화점은 도무지 방법을 모르겠거든. 그래서 1차로 다리를 폭파시키며 테러리스트의 존재를 부각하고 삼풍 백화점은 사전 테러 경고만으로 그날 백화점을 비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 정 아니면 일부라도 폭파시켜서 사람들을 대피시킬 수 있으면 좋겠고.”
과격한 수안의 계획에 배영성이 기겁했다.
“자, 잠깐 혼자서 막 나가지 말고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