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대교?
쩔렁.
두 개의 금메달이 아버지 강운모 회장의 목에 걸렸다.
“지난번 말씀 드린 것처럼 약속 지켰습니다.”
“허….”
청와대 일정까지 끝내고 집에 돌아온 수안이 오자마자 큰절을 하고 한 일이다.
“수고 많았다. 수안아. 이번에도 어쩜 그렇게 잘 뛰었어. 그래….”
수안은 어머니 말에 괜히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어머니 목이 허전하네. 다음 올림픽도 나갈까?”
“더는 나가지 마. 이제 너도 네 자리로 돌아와야지.”
아버지의 강한 부정에 수안도 순순히 동의하며 말했다.
“그냥 해 본 말이에요. 이제 안 나가겠습니다. 조만간 조용히 은퇴할 생각입니다.”
“대신 회사에서 실업팀을 계속 지원하고 네가 후발 주자 양성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면 이해하겠지.”
“거기까지 생각하셨어요? 현명한 판단이세요.”
“우리 회사 육상 실업팀 위상이 장난이 아니야. 네가 추천한 황형조가 마라톤 금메달을 딸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잘해야 은메달이나 딸 줄 알았더니… 몬주익의 영웅이라는 칭호까지 받다니.”
100m, 200m 육상도 대단하지만, 마라톤에 비할 수는 없었다.
42.195km를 뛰는 마라톤은 일견 잔인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지독한 경기였다.
황형조의 마라톤 금메달 덕분에 수안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나눠 받을 수 있었다.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진 수안보다 새로운 육상 금메달리스트이자 마라토너인 황형조가 언론의 입맛에 더 맞았던 것이다. 덕분에 수안은 꽃목걸이를 목에 걸고 수많은 취재진에 둘러싸인 황형조를 적당히 띄워 주며 자신은 뒤로 빠질 수 있었다.
이래저래 고마운 형이다.
“그 전부터 두각을 나타냈잖아요. 금메달은 당연하죠. 황 선수에게 포상이나 두둑하게 해 주세요. 회사 광고도 몇 개 할당해 주시고요. 황 선수 발에 부상이 있어서 다음 올림픽까지는 힘들어 보여요.”
대회 당일에도 족저근막염을 앓고 힘들어하던 황형조 선수다. 고통을 감수하고 죽는다는 각오로 뛰었기에 완주하고 우승까지 할 수 있었지만, 다음 올림픽은 힘들었다. 옆에서 지켜본 수안이 가장 잘 알고 있다. 한동안 선수 생활은 유지할 수 있지만, 다음 올림픽까지는 무리였다.
“걱정 말거라.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리할 테니. 그런데 다음이 걱정이구나. 황 선수가 부상이라면….”
“이봉준 선수를 찾아서 데려오세요. 그가 다음 마라톤을 준비할 겁니다.”
“이봉준?”
“황형조 선수와 동갑내기 마라토너예요. 다음 올림픽 마라톤은 이봉준이 책임집니다. 최소 은메달은 보장하죠.”
“허. 육상계에 있더니 선수 보는 눈만 키웠구나. 네 후계자는 있고?”
장거리 마라톤 선수를 추천했으니, 단거리 선수도 추천하라는 말이다.
“아직 없습니다. 이 부분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마라톤은 한국인 체형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경기지만 단거리 육상은 아프리카계를 못 뛰어넘어요. 곧 자메이카나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육상을 주름잡을 테니까요.”
“적당히 지원을 이어 가야겠구나.”
“네. 그래도 우리 회사에서 지원하면 제가 모르던 선수를 발굴할지도 모르죠.”
“너만 한 선수가 있을지도….”
“그건 과욕이시고요.”
“뭐 이 녀석아?”
“지금부터는 빙상을 준비하셔도 되겠어요.”
“…피겨 말이냐?”
“네. 피겨요. 지금부터 준비해야 인재를 발굴할 수 있어요.”
지금은 고작 세 살배기 아기일 김연하 선수다. 그 전에 피겨 전용 아이스 링크를 선물하고 싶다. 부족한 지원, 어려운 환경이 아니라 시작 전부터 완벽하게 준비하고 부족함 없는 지원을 보장하고 싶었다.
“흠….”
“꼭 강운 그룹이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제 회사를 키워서 지원해도 되니까요.”
“뭐?”
“운동선수로 지내보니 우리나라 체육계가 얼마나 썩었는지 확실하게 알았거든요. 제대로 된 지원이 없으면 기록이 나오지 않는 게 당연해요. 피겨를 지원하면 그에 맞는 성과를 보일 것이 틀림없어요. 아버지가 하지 않으시면 제가 하면 됩니다.”
“…쇼트트랙도 아니고 하필이면 피겨라니. 피겨는 돈으로 만들 수 있는 종목이 아니야.”
여전히 피겨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아버지였다.
“아직 선수 발굴이 되지 않았으니, 여유는 있습니다. 선수를 발굴하면 그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말대로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 피겨는 예술적인 부분이 필요한 경기다. 우리나라에서 가능할지 아직 판단이 서질 않아.”
“예.”
국내 회사를 빨리 키워야겠다고 마음먹은 수안이다.
자산을 불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김연하를 키우기 위한 다짐이었다.
* * *
아직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부담스러울 황 형을 위해 잠시 언론에 같이 얼굴을 비추고, 수안은 슬며시 뒤로 빠졌다. 이제 강수안 선수가 아니라 강수안 학생으로 돌아갈 때다.
“주원아, 오늘도 한번 돌자.”
“또?”
“술을 하루만 먹겠어? 어제 먹었다고 오늘 안 먹어? 오늘 먹었다고 내일 안 먹겠어?”
“…돈이 한두 푼 깨지는 것도 아니고.”
“지금 내 앞에서 강운 그룹 재력을 의심하냐?”
“큭. 그런 건 아니고.”
“빨리 찾기나 해.”
“오케이.”
수안의 동기인 주원은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가며 선후배들이 어디서 술을 먹는지 찾아내기 시작했다.
수안은 주원이 찾은 가게를 찾아가 선배들에게 인사하고 한 잔 얻어 마신 다음 술값을 계산했다.
“선배님들 편히 드십시오. 다음엔 몰래 오지 마시고 저나 여기 주원 후배에게 언질이라도 주십시오. 술값은 걱정 마시고요.”
“브라보!”
“후배가 재벌이라 이럴 때 좋구나!”
“하하하. 제가 올림픽으로 번 돈이 한두 푼이겠습니까? 아버지 손 안 벌리고 얼마든지 대접할 수 있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한국대 근처에서 술을 마시던 법학과 선후배들의 술자리를 찾아다니며 술값을 계산했다.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향후에도 판검사를 평균 30% 이상 배출하는 명문인 한국대 법학과였다. 지금부터 인맥을 쌓아두면 나중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지금의 투자가 강운 그룹 법조 장학생을 키우는 것보다 나을 터였다.
술집을 두루 돌아다니던 수안은 왠지 낯익은 얼굴을 봤다.
‘얼래? 저 사람도 한국대였어?’
하도 사람들을 만나 버릇해서 모르는 사람과 합석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수안은 원래 일행이라는 듯이 그 사이에 비집고 들어갔다.
“친구들. 나도 한잔합시다.”
“헙! 강수안 선수!”
단번에 수안을 알아본다.
“선수는 무슨, 이제 선수 아니야. 나 법학과 91학번 강수안. 그쪽은?”
“하하하. 이제야 얼굴을 제대로 보내. 난 미학과 91학번 방수혁.”
BTC라는 국내 보이 그룹을 미국 빌보드에 랭크시킬 능력자가 이곳에 있었다.
“오! 동기! 먹고 죽자! 오늘 술값은 내가 낸다!”
“우아! 우리 강수안 선수한테 얻어먹는 거야?”
딱 봐도 미대생으로 보이는 미모의 여대생들도 함께 있었다.
하지만 수안의 눈에 여자가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방수혁이다.
“이모! 여기 맥주 다섯이랑 안주 추가!”
“소주가 빠지면 섭하지.”
“소주도 2병 추가!”
“다들 먹고 죽자!”
술자리를 끝낸 수안은 방수혁을 살뜰히 챙겨 집으로 돌려보내고 훗날을 기약했다.
“엔터테인먼트가 이렇게 얻어걸리네.”
대중에 큰 영향을 끼치는 분야였다. 처음엔 큰돈이 되지 않아도 영향력 확장에 필수적이었다.
“나중엔 돈이 되기도 할 테고 말이지.”
술자리에서 수안에게 추파를 던지던 여생물들의 실망은 신경 쓰지 않았다.
수안은 여자에 관해서는 부모님만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 * *
“한번 만나 볼 테냐?”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가 수안을 서재로 불러 다짜고짜 물었고, 기다리던 수안은 냉큼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휴. 언제 불러 주시나 했습니다. 만나 봐야죠.”
이제 겨우 대학교 3학년. 수안의 나이 22살이다.
어린 나이였지만, 일찍 결혼해 가정의 안정을 찾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난 생에 반백의 나이를 먹도록 결혼하지 못한 노총각의 한이 반영되었다.
“상대가 궁금하진 않고? 어느 집안인지, 얼굴은 예쁜지… 궁금할 게 많을 텐데?”
어머니는 수안이 상대를 궁금해하지 않음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집안이야 우리 집보다 나은 집은 아닐 것이고, 얼굴은 예뻐 봐야 다 거기서 거깁니다. 나머지는 부모님께서 알아서 잘 고르셨을 테니, 저는 어른들이 보지 못한 내면을 봐야지요.”
강운모 회장은 아들이 항상 한발 앞서 나간다고 생각했다.
“너는 항상 아비 말문을 막아 버려.”
“죄송합니다.”
“주말에 호텔 레스토랑을 비워 뒀으니 가서 보고 와. 꼭 그 아이여야 하는 것도 아니니 편하게 보고 왔으면 한다.”
“예. 아버지. 저는 부모님만 제대로 모신다는 사람이면 족합니다.”
“…뭐?”
“시부모 알기를 개떡같이 아는 여자라면 제가 사양입니다. 제가 거짓말은 귀신같이 알아채거든요.”
“아버지는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 부모님만 제대로 모시면 된다고?”
“네. 어머니. 저는 사랑하는 부모님을 평생 모시고 살 겁니다. 그러니 제 안사람이 될 사람도 그래야죠. 아버지 어머니께서도 그러셨잖아요.”
“여보. 얘가 이런 애예요.”
“흠흠.”
재벌 부모라도 자식의 사랑에는 감동하는 법이다.
많은 돈으로 나이 들어 수발들어 줄 사람을 구해도 결국은 남이다.
자식이 끝까지 부모를 모신다고 말하고, 그 마음이 진실해 보이니 감동이 더 크게 다가온다.
‘부모님을 절대로 남의 손에 맡기지 않겠어.’
수안은 혼자 사는 것이 사무치도록 싫었다. 어떻게 생긴 부모인데 떨어져 산단 말인가.
아무리 마누라가 좋고, 자식이 좋다고 해도 낳아주신 부모님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번 만남은 없었던 일로 하자. 아무래도 네 엄마랑 더 상의해 보고 결정해야겠구나.”
“그게 좋겠어요. 여보. 제가 착실한 아이로 찾아볼게요.”
수안의 깊은 효심이 첫 선을 무산시켜 버렸다.
“그래도 한 번 보기는 해야 하지 않을지… 벌써 약속까지 잡아 두셨지 않습니까.”
“됐다. 괜히 어린 애 만나 봐야….”
자신의 아들도 어린 나이였지만, 아들과 같은 생각을 하는 여자애가 있을지 확신하기 힘들었다. 강운가 이름에 걸맞는 며느리를 얻고자 한다면 같은 재벌가의 일원이어야 할 것인데, 재벌가에서 나고 자란 아이가 아들의 기준에 맞을 리 없었다.
“당신… 찾을 수 있겠어?”
“아휴. 아들이 우리 선택에 따른다고 해도 걱정일 줄은 몰랐어요.”
“우리 가족이 늘어나는 일 아닙니까. 아무리 신중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저는 더 기다릴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근심을 안고 서재를 나섰고, 수안은 아버지와 대화를 이어 갔다.
“그쪽 집에는 내가 알아서 잘 말하마. 어린 나이가 마음에 걸리기도 했어.”
“제가 22살인데 어려 봤자….”
“만나려고 했던 아이는 18살이다. 이제 고2이지.”
“음. 4살 차이면 나쁘진 않네요.”
지금은 어려서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만 2년만 지나도 20살이다. 2년 뒤 24살이 되었을 수안과 비교하면 대단한 나이 차는 아니었다.
“고2 여자애가 잘도 시부모 모시고 살겠다고 하겠다.”
“…어림없겠죠. 그래도 미리부터 가정교육 잘 받고 큰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 부분은 나이 먹는다고 바뀔 것도 아니고요.”
딴에 틀린 말은 아니다.
“정신머리 똑바로 박힌 총수들을 찾아봐야겠군.”
부모를 보면 자식을 안다고 했다. 강운모 회장은 자신의 기준에서 벗어나 아들을 기준으로 맞춰 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고른 아이가 아들의 아내가 되고 자신의 며느리가 될 일이다.
“현 총수 일가로 범위를 좁히시면 힘드실 텐데….”
“그럼 어쩌라고?”
이래도 저래도 자꾸만 트집이었다.
강운모 회장은 아들이 진정으로 자신의 의견을 따른다는 말인지 의심될 지경이다.
“적당한 기업, 적당한 가업을 영위하고 있어도, 우리가 키워 주면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 정도 급은 되잖아요. 처가가 될 회사 덕을 봐서 강운이 클 것도 아니고요. 그런 도움 없어도 우린….”
올해 이미 거대한 제국을 형성한 삼디 그룹이나 대현 그룹과 비등해진 강운 그룹이다.
내년이면 확실하게 재계 서열 1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대현 왕 회장이 대선에서 현 대통령의 표를 갈라 먹으며 낙선했다. 스스로 큰 위기를 초래했기에 제대로 권력에 밉보인 형국이다. 앞으로 대현은 쪼그라들 일만 남았다.
삼디 그룹이 강점을 가졌던 반도체 사업 부분에서 승부를 보고 있는 강운 전자였다. 삼디 그룹의 명성이 희석되고 있었고, 은성의 가전도 따라잡는 중이다. 수안이 뒤에서 애쓴 덕분에 전 분야에서 성장을 거듭하는 강운 그룹 되시겠다.
“그래도 동아 그룹 정도면 우리에게 충분히 도움이 될 텐데?”
“…성수대교?”
성수대교 붕괴는 날짜도 잊어버리지도 않는다. 바로 내년 1994년에 사건이 발생한다. 10월 21일이 그날이다. 전생에 얼굴도 보지 못한 아비의 기일이었다.
그날 동아 건설이 만든 성수대교는 다리 상판이 한강으로 떨어져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