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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 환영식 (13/304)

입학 환영식

며칠 뒤 수안은 아버지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접견을 요청했다.

집 안에서도 아버지의 서재를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회장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도련님.”

“고마워요.”

“별말씀을.”

안으로 들어가자 서재에서 뭔가를 열심히 보고 계신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벌써 돈이 떨어지진 않았을 텐데.”

“제가 언제 아버지에게 용돈 달라고 하던가요? 히히.”

“그런데 강운 전자 주식은 왜 건드려?”

아버지는 벌써 알고 계셨다.

‘당연히 알 수밖에 없는 일이지.’

비서실 눈을 생각하지 않고 일을 벌였다. 아버지 귀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있는 회사 주식을 사고 싶은데, 강운 전자 외엔 눈에 들어오는 회사가 없었습니다. 대현이나 다른 회사들보다 강운 전자의 향후 가치가 높아 보였습니다.”

“이유는?”

“강운은 국내를 뛰어넘어 세계 무대를 주름잡을 테니까요. 제가 그렇게 만들 생각입니다. 그 전에 미리 주식을 확보해야 했습니다. 앞으로 여유 자금이 생기면 강운 전자를 꾸준히 매입할 생각입니다.”

“허! 결국 너는 네놈을 믿는다는 말이구나?”

“지금은 아버지를 믿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강운 그룹을 국내 최고로 만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허허… 흠… 그래. 오늘 보고자 한 이유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식의 칭찬이다.

강운모 회장은 터지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아내며 대화를 이어 갔다.

“이번에 아버지께 선물을 받아 보니, 차명 계좌를 사용하신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보통 많이들 사용한다. 권력에 돈을 건네기에도 편하고….”

현 재력가 대부분이 차명 계좌를 통해서 비자금을 조성하고 사용하고 있었다. 지금은 문제가 없지만, 곧 문제가 될 예정이다.

“현 대통령의 임기는 1993년 2월까지입니다. 그 이후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 넌 다음 대통령이 누구인지 안다는 듯이 얘기하는구나.”

가소롭다는 듯이 웃고 있는 강 회장이지만, 수안은 미래를 경험하고 돌아온 전생 자다.

“양 김이 있지 않습니까.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중에 누가 될지를 모르니 그렇지 않으냐. 그렇다면 네 생각은 정권이 바뀌며 차명 계좌를 건드릴 것이라 생각하는 게냐?”

차명 계좌를 건드린다면 현 정권과 반대편에 선 김대준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김일삼이 건드릴 겁니다.”

“…김일삼이?”

“김일삼이 괜히 삼당 합당을 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김대준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습니다. 표를 갈라 먹어 결국 남 좋은 일을 시키긴 했지만, 결국 현 정부에 붙으며 상황을 반전시켰죠. 김대준을 빨갱이로 몰아세우면, 김일삼이 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리고 현 대통령도 같은 당 소속인 김일삼을 밀어줄 것도 뻔한 일이죠. 다음 대통령은 김일삼입니다.”

“…좋다. 김일삼이 14대 정권을 잡는다 치자, 그런데 차명 계좌를 건드린다는 예측이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

“김일삼이 김대준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도 과거에는 김대준과 손잡았던 인물. 국가를 개혁하기 위해 뭐든 뒤집어엎을 인물입니다. 지하 자금과 차명 계좌를 손보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할 때 움직여야 제대로 거둬들일 수 있죠. 그리고 우린 이를 예상하고 움직여야 손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네 생각은 치기 어린 생각으로 보이는구나. 그는 이미 현 정부 인물들과 노선을 함께하고 있다. 그런 그가 과거 김대준과 함께했다는 것만으로 그런 개혁정치를 행할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칼을 숨기고 있는 인물입니다. 대통령이 되면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을 재판정에 세울지도 모르죠.”

“…뭐라?”

“5, 6공화국의 수괴인 정두인과 현 대통령인 노태환. 둘 다 구속하고 징역을 때릴 인물이 바로 김일삼입니다.”

“허! 군부와 여당에서 그 꼴을 보고 가만히 있겠느냐?”

“김일삼이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닌데, 거기서 멈추겠습니까?”

“그럼?”

“곧장 하나회까지 손을 보는 수순으로 갈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회는 신군부 주축인 쿠데타 세력입니다. 가만두는 것이 이상한 일이죠.”

“네가 하나회를 어떻게 알아?”

“지금 제가 하나회를 아는 것이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네 얘기는 지금 김일삼이 자신을 완벽하게 숨기고 적지에 숨어들어 있다 이 말이냐?”

“김대준과 사이가 멀어지는 것도 감수하고 스스로를 진창에 밀어 넣었습니다. 물론 오직 이것만을 위함은 아니었을 겁니다. 자신이 대통령직을 취하기 위한 사심도 들어 있겠죠. 하지만 신중히 생각해 보십시오. 정두인과 노태환의 세상이 끝나면 여기저기서 둘을 심판대에 세우고자 할 것입니다. 김일삼은 그저 그들의 요구에 못 이긴 척 따르면 그만입니다.”

“후우… 현 대통령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데….”

“그들의 사면도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사면?”

“다음 대통령도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임기가 끝나가는 시점에 이미 국민의 여론을 만들어 놓고 다음 대통령이 될 것이 확실한 김대준과 같이 사면을 허락할 겁니다.”

“허! 너는 미래를 보고 온 듯이 얘기하는구나.”

뜨끔했지만,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그저 예측일 뿐입니다. 멀리서 살펴보니 앞날이 저절로 그려졌습니다. 위기라 판단되어 아버지께 말씀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안으로 해외 비밀 계좌라면 여러 면에서….”

수안의 말이 이어졌지만, 강 회장은 스스로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능구렁이 노태환이라면… 거기까지 노리고 있을지도….’

자신이 따르던 대통령 정두인을 가차 없이 손절한 노태환이다. 이후의 행보도 능수능란했다. 국민들이나 재계 인사들이나 정두인의 강압적인 군부 정치에 거부감을 가졌기 때문인지 노태환은 오히려 따스한 정치를 한다고 느껴질 지경이다. 그 정도로 정치에 노련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너무 허황한 예측이다. 다음 대통령이 김대준이 될지도 모르잖아?”

대화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맞습니다. 이제 겨우 대학에 들어가는 제가 상상한 상황일 뿐이죠.”

아버지가 믿지 않는다 해도 수안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번 대화로 얻을 것은 다 얻었다.

“그래. 아직은 네 경험이 일천해 거기까지 생각하긴 무리다. 그래도 정치 상황을 면밀히 살피는 것은 경영자의 필수 소양이지.”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차명 계좌에 대한 사전 점검입니다. 김대준이 되건 김일삼이 되건 다음 대통령이 될 사람이 이 부분을 건드리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 정도는 일이 벌어지고 나서도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갑자기 걱정이 돼서 말씀드리고자 했을 뿐입니다. 저는 사법 시험 준비에 매진하겠습니다.”

“그래. 나가 보아라.”

“예. 아버지.”

‘이걸로 기초적인 믿음은 확보했어.’

지금 후계자 수업을 받는 중이 아니라도 점수를 딸 방법은 많았다.

수안이 미래에 대해 슬쩍 흘린 것은 차명 계좌에 대한 위험을 피하기 위함보다는 자신을 어필하기 위함이 컸다. 앞으로 그 일이 진짜로 벌어지면 아비가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강 회장은 서재에서 다시 서류를 들여다봤지만, 아들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정두인과 노태환을 심판대에 세운다? …그게 가능하겠어?”

현 정권의 실세를 징치한다는 것은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지하 자금을 양성화하는 것은 모든 정권이 비슷하게 원하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 차명 계좌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높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차명 계좌를 들추는 것은 김일삼, 김대준… 둘 다 진행할 수 있는 일이지….”

향후 누가 되건 문제가 될 일이라는 예측은 확률이 낮지 않았다.

“최 실장!”

“네. 회장님.”

밖에서 대기하던 최 실장이 얼른 들어와 대답했다.

“차명으로 관리하던 통장들 정리 시작해.”

“…전부 말씀입니까?”

“전부는 아니고 절반만. 나머지도 천천히 정리하는 방향으로 가자고.”

“예. 회장님.”

수안의 예측이 결국 힘을 발휘했다.

비록 절반이지만 나중에 한꺼번에 정리하는 것보다야 나을 터였다.

* * *

1991년 수안은 한국대에 입학했다.

“크흐. 내가 한국대에 들어오다니.”

대학 문턱도 못 밟아 본 전생이었다.

지금은 국내에서 최고로 대우해 주는 한국대의 법학과에 입학한다.

‘나중엔 경영이 대세가 되지만, 지금은 법학과가 가장 끗발을 날리고 있지.’

법학과 신입생의 입학을 환영하는 전통이랍시고 선배들이 양재기에 이것저것 섞은 소주와 막걸리를 먹여 댔지만, 수안에겐 먼 나라 얘기다. 야단법석인 가운데 수안이 있는 곳만 평온했다.

“후배님은 요걸로 드시고.”

작은 소주잔에 적당량의 투명한 소주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어휴. 우리 수안 후배에게 술 퍼먹였다간 동기들이 날 죽이려고 할걸?”

“그전에 저기 이모님이 눈에 불을 켜고 보고 있잖아. 금메달 따야 할 운동선수에게 술 먹인다고 하면 이모가 우리 쫓아낼지도 몰라.”

법학과 단골 술집 여사장님이 진짜 노려보고 있었다.

“야. 집에서도 난리다. 오늘 우리 아버지가 수안이 술 먹이면 호적에서 파버린다고 하더라. 내가 수안이 술 먹였다가 호적에서 제명되면 니들이 책임지냐?”

수안은 잠깐 맛이라도 볼 요량으로 술잔에 입을 가져가고 있었다.

한참 윗 학번 대선배 하나가 조용히 말했다.

“수안 후배님. 동작 그만. 손에든 술잔 내려놓는다. 실시.”

“실시….”

“기분만 내자 기분만. 소주잔에 물만 따라놔. 흐흐흐.”

선배는 다른 누군가에게 부탁받지 않았다.

스스로가 수안의 팬이었다.

다음 올림픽에서 트랙을 질주해야 할 금메달리스트에게 술을 먹인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암.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지. 금메달은 강 선수가 맡아 놨다고.’

“아휴. 내가 눈앞에서 강 선수를 보다니. 이따 사인 좀….”

“얼마든지 해야죠. 예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현시대에 가장 유명한 올림픽 스포츠 스타가 바로 강수안이다. 자신들이 아무리 사법 시험에 합격하고 판검사가 되어도 강운의 적장자인 수안에게 밉보일 수는 없었다. 거기다 운동선수에게 술을 강권하는 것은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대신 제가 사랑하는 선배님들께 한 잔 올리겠습니다.”

“하하하. 내가 강 선수의 술까지 받다니. 감격이다.”

“나도!”

“여기도 한 잔 부탁해.”

“지금 아니면 언제 강운 그룹 장남의 잔을 받아 보겠어?”

“하하하. 여기도 한 잔!”

다른 동기들의 질투 어린 시선이 있었지만, 그들도 수안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다. 질투는 날지언정 행동으로 날을 세우긴 부담스럽다. 강운가 장남의 입지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입지는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커다란 벽이다.

“내년 올림픽은 어쩔 생각이야?”

한 선배의 물음에 입학환영회에 모인 모든 법학과 학생들의 귀가 쫑긋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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