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
태식이 엄마는 남편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호들갑이다.
“여보! 빅 뉴스! 빅 뉴스!!”
“뭔데 그래? 나 방금 퇴근했잖아. 씻고 얘기하면 안 되나?”
“오늘 우리 태식이가 학교에 갔잖아!”
“그게 무슨 빅 뉴스야? 나이 먹으면 학교 가는 게 당연하지.”
“내가 오늘 거기서 누구 아들을 만났는지 알아?”
“나 참. 다짜고짜 물어보면 내가 어떻게 알아? 우리 부장님 막내아들이라도 왔어?”
강운 간판을 달고 있는 계열사에서 차장으로 일하는 그다.
그에게 체감되는 높은 사람이라면 직속 상사인 부장이나 이사밖에 없었다.
“부장님 아들이면 빅 뉴스거리가 되겠어? 좀 더 써 봐.”
“그럼… 이사님? 혹시 이사님이 혼외 자식이 있던가?”
이사들은 나이가 어느 정도 있기에 국민학교에 들어갈 자식은 없었다. 있다면 숨기고 싶은 혼외자일 수밖에 없었다.
“혼외자라니. 이사님도 아니야.”
“답답해 죽겠네. 속 시원히 얘기 좀 해 봐.”
“두구두구두구.”
“이 사람이… 누구 답답해 죽는 꼴 보려고 그러나….”
“무려! 강 부회장님의 맏아드님! 회장님의 장손!”
“허업!!!”
“게다가 우리 태식이 옆자리 짝꿍이라고!”
“저, 저, 정말이야?”
“진짜라니까! 1학년 담임선생도 바짝 얼어서 계속 눈치 보더라고.”
“태식이 어디 있어?!”
“태식이는 왜?”
“왜긴! 태식이보고 각별히 잘하라고 해야지!”
“설마 내가 그런 말도 안 했겠어? 단단히 일러 뒀어.”
“최고다…. 이건 일생일대의 기회야!”
“빅 뉴스 맞지?”
“당신은 어떻게 이런 엄청난 정보를 알았어?”
“도련님이 자기 입으로 얘기하던데? 자기가 회장님 손자이고 부회장님 아들이라고.”
“…직접? 그럼 다른 학부모도 다 들었어?”
“…응. 내가 강운가 도련님이 맞느냐고 물었거든.”
“이 사람아. 그런 건 우리만 알고 있어야지!”
“그런가?”
“당장 장난감 매장부터 가자. 다들 알면 빨리 움직여야 해.”
“거긴 왜? 태식이 사 주려고?”
“태식이는 뭐 하러 사 줘? 도련님 선물을 사야지!”
“태식이가 자기 것도 없이 선물하라고 하면 샘나서 배 아파할 텐데.”
“오케이! 태식이 것도 같이 사서 같이 놀라고 하면 되겠다! 그럼 더 친해질 거 아냐.”
“아들! 장난감 사러 가자!”
“오예! 아빠 최고!”
같은 반 아이들 집에서 대부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다음 날 수안은 책상 위에 자신의 키보다 높이 쌓인 선물 상자들을 마주했다.
“어… 이게 뭘까나.”
방금 도착한 태식이 옆에서 한마디 했다.
“나만 주는 건 줄 알았는데….”
태식의 손에도 커다란 선물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건 뭔데?”
“선물.”
“선물? 왜?”
“아빠가 친한 친구 주라고.”
“오오.”
“이게 뭐냐면 변신 로봇이야!”
태식은 수안이 받기도 전에 북북 포장지를 뜯어 장난감을 보여 줬다.
“머찌지? 너 가져!”
“너는?”
“나도 같이 놀라고 사 줬지롱!”
태식의 가방에도 같은 변신 로봇이 들어 있었다.
“와아….”
무표정한 얼굴, 감정 하나 들어가지 않은 탄성이었다.
‘내가 이 나이에 변신 로봇을 가지고 놀아야겠니?’
책상 위에 놓인 선물들도 극성스러운 또래 학부모의 결과물이었다.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은 몰랐네….’
오늘은 이미 발생한 일이나 더는 안 된다.
수안은 담임이 들어오자 힘차게 손을 들었다.
“수안아. 무슨 일이니?”
“잠깐 친구들에게 할 말이 있어서요. 앞에 나가서 얘기해도 될까요?”
“어. 음.”
“제 책상에 놓인 선물들 때문에요.”
담임선생의 눈에도 가득 쌓인 상자들이 들어왔다.
“혹시… 친구들이 줬니?”
“네.”
“아직 수업 시작 전이니, 잠깐 나와서 얘기해도 좋아.”
“감사합니다. 선생님.”
수안은 교탁 옆에서 인사부터 했다.
“반갑다. 친구들아. 나는 강수안이다.”
“…어.”
“안녕….”
“엄마 보고 시퍼….”
인사에 답하는 것도 어색한 1학년 코흘리개들이다.
수안은 대수롭지 않게 계속 이어 갔다.
“우선 선물은 고맙게 잘 받을게.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감사 인사는 이걸로 끝이다.
“대신, 집에 가서 꼭 엄마 아빠한테 얘기 드려. 앞으로 내 생일이든 명절이든 선물은 절대 받지 않는다고. 선물이 없어도 너희는 내 친구다.”
수안은 옆에 있는 담임에게도 말했다.
“선생님. 학급 알림으로 꼭 전달해 주세요. 친구들 부모님이 정확하게 아실 수 있게요.”
1학년 아이들이 부모님께 제대로 전달할 리가 없었다. 전달 과정에서 엉뚱하게 변질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래야겠구나.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면 되겠지?”
“네. 부탁드립니다.”
“맡겨 주렴.”
그 뒤로 누구도 수안에게 선물을 가져오지 않았다.
담임뿐 아니라 교장과 교감 그리고 이사회가 나섰다고 들었다.
수안은 또래를 넘어 학부모까지 생각하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이래서 힘숨찐이 대세였나?’
이미 밝힌 것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되돌아간다 해도 숨기지 않을 생각이다.
‘앞으로 내 인생에 후회는 없어. 내가 한 일은 내가 책임지고, 어려움은 내가 이겨낸다.’
별것 아닌 다짐일 수도 있지만, 인생의 모토나 다름없었다.
* * *
수안은 학교생활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미 대학 과정까지 모조리 습득한 다음이다.
두각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국민학교 시험은 말 그대로 우스웠다. 과외를 받지 않았더라도 만점을 받았을 수준이었고, 실제로도 만점이었다. 올백. 수안이 5학년 중간 시험을 마치고 받아 든 성적표다. 지금까지 모두 만점 행진이었다.
그리고 체육 시간에 다른 재능이 드러났다.
새로 들어온 체육 선생이 학생들에게 달리기를 시키며 의아해했다.
“이제 5학년이면서 왜 이렇게 빨라?”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데 수안은 2등과 현격한 격차를 보이고 결승선을 통과했다.
수안이 100미터를 다 뛰는 동안 2등은 겨우 50미터를 넘고 있었다.
멀리뛰기,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도 마찬가지였다.
“…수안이는 운동을 시키면 무조건 금메달인데….”
수안을 앞에 두고 하는 혼잣말에 수안의 귀가 쫑긋했다.
‘금메달? …군대 면제?’
정금용은 부모가 없는 고아라서 군대를 면제받았지만, 수안은 부모님이 멀쩡히 살아 있다.
물론 집안이 재벌이니 얼마든지 군대를 뺄 수 있겠으나, 이왕이면 정당한 타이틀을 얻어 군대 면제를 받으면 좋겠다 싶었다.
“선생님. 제가 금메달을 딸 수 있나요?”
“수안이 운동해 볼 생각 있니?”
“100미터 달리기 정도면….”
그나마 제일 빨리 끝낼 수 있는 종목이다. 마라톤은 너무 오래 뛰어야 하고 다른 종목들은 저마다 기술이 필요하다. 물론 육상이라고 해서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배우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터였다.
“육상부터 시작하면 되겠구나!”
“하지만 허락이 필요해요.”
“허락은 내가 받으마. 집으로 가자!”
자신이 이루지 못한 금메달의 꿈을 제자를 통해서 이룰 생각이었다.
“…저희 집에 오시려면 교장 선생님 허락부터 받으셔야 할걸요?”
“교장 선생님?”
체육 선생은 수안의 입으로 강운가에 대해 들어야 했다.
“히익! 강운가에 무슨 수로 허락을….”
체육 선생이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상 그런 말은 할 수는 없었다. 강운 그룹 장손을 육상 꿈나무로 키운다는 허락을 어찌 받는단 말인가.
“허락은 제가 받아 볼게요. 대신 훈련은 최소한으로, 대회 출전은 전국 체전을 통해 올림픽에 갈 수 있을 정도만. 그래야 올림픽에 도전하죠.”
“벌써 올림픽까지 생각하는 거야? 꿈도 야무지구나. 아프리카계 해외 선수들이 육상을 꽉 틀어쥐고 있는데….”
“저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잖아요. 병역도 있고요.”
“올림픽, 세계 선수권, 유니버시아드… 한국체대는 상관없으니 빼고.”
수안은 체육 선생이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알고 있었다.
올림픽 3위 이상, 세계 선수권 3위 이상, 유니버시아드 3위 이상, 아시안게임 3위 이상, 아시안 선수권 3위 이상. 한국체대 졸업성적 상위 10% 이내. 이것이 당시의 체육 요원 선발 자격이었다.
“이 정도만 해도 병역을 체육 요원으로 대체할 수 있지. 선수 등록하고 대충 몇 년 활동하면 되니까.”
“그렇죠. 그래도 이왕 노리는 것. 1등을 노려야 하지 않겠어요?”
“푸핫. 이 정도 기록으론 아직 멀었어. 될지 안 될지도 모르고.”
“저 천천히 뛰었어요.”
“…뭐?”
“힘 빼고 천천히 뛰었다고요. 100미터 다시 해요. 열심히 뛰어 볼게요.”
반 친구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혼자 100미터 트랙에 들어선 수안은 손발을 툭툭 털며 긴장을 지우고 자리 잡았다.
선생님의 깃발이 내려옴과 동시에 치고 나간 수안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수안이 결승선을 넘자마자 체육 선생은 기록을 확인했다.
“헙! 11초 45!!”
엄청난 속도였음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드러난 숫자라 더욱 놀라웠다.
“허억. 허억. 잘 나왔어요?”
결승선을 통과한 수안이 체육 선생 곁에 돌아와 있었다.
“수안아. 무조건 해야 해. 무조건!”
고작 국민학교 5학년 학생의 기록이 이 정도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며 몸이 성장하면 어디까지 기록을 단축시킬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앞으로 10년 뒤 100미터 세계 신기록은 무조건 수안의 것이었다.
올림픽 금메달이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자신의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키운 선수가 금메달을 딴 것으로도 메달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문제는 지금 국민학생인 제가 나갈 만한 대회가 없다는 게 문제 아닌가요?”
“제대로 된 대회가 없지. 특히 네 나이라면….”
12살이 나갈 만한 육상 대회가 없음이 통탄할 일이었다.
“천천히 해요. 저도 틈틈이 운동을 하고 선생님께 도움을 받을게요.”
“아아. 합숙하면서 기초를 확실하게 쌓아야 하는데.”
“쉽지 않다는 거 알잖아요. 중학교에 가서 생각해 볼 일이었네요. 집에는 제가 따로 얘기할게요.”
체육 선생의 꿈은 당장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체육 시간이 끝나고 자리에 앉은 수안은 자신의 몸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확실히 다른 또래 아이들과 달라. 키도 내가 제일 큰 것 같고….’
다른 또래 친구들이 다 꼬꼬마로 보인다.
‘힘도 제일 센 것 같고.’
팔굽혀 펴기를 열 개도 못 하는 녀석들이 대부분이다.
수안은 턱걸이를 배걸이로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쉽게 가능했다.
‘오늘 달리기도 온 힘을 다하지 않았는데.’
열심히 뛴다고 했지 온 힘을 다해 뛰겠다고 하진 않았다.
적당히 기록을 봐가며 뛰어야 했다.
자칫 세계 신기록이라도 나온다면 기자들이 떼로 몰려올 일이다.
‘잘난 부모님, 뛰어난 머리, 건강함 몸까지… 타고난 금수저로구나.’
감사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태어난 것도 감사한데, 이렇게 좋은 환경에 튼튼한 몸까지 주시니. 주님 감사합니다.’
누군가의 축복이 수안의 몸에 강하게 깃들어 있고, 스스로 운동하며 길러온 몸이 있었다. 수안의 신체 능력이 평범함을 넘어서는 것은 해가 지고 다시 뜨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수안은 88올림픽을 떠올렸다.
‘1988년이면 내가 17살. 충분히 나갈 수 있겠네?’
출전조건이야 그 전에 맞추면 그만이다.
‘형 금메달 하나만 따자.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