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입학 (6/304)

입학

수안은 쑥쑥 자랐고, 시간은 흘러갔다.

그사이 아비는 경영 능력을 인정받아 후계자로 확정되었고, 할아버지의 모든 것, 즉 강운 그룹의 모든 것을 오롯이 이어받았다. 크고 작은 분쟁이 있었지만, 수안은 거기까지 신경 쓰고 참견할 수 없는 나이였다. 지금 해야 할 일은 김일곤 교수에게 많은 것을 배우는 일이다.

훌쩍 자란 수안이 김일곤 교수와 마주 앉아 차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수안아.”

수안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코코아를 내려놓고 말했다.

“예. 김 교수님.”

“네가 벌써 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다니.”

“그러게요. 인생 참 빠르죠?”

지난 4년간 김일곤 교수가 직접 수안을 가르쳐왔다.

수안의 나이 8살. 이제 국민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됐다.

“네 나이에 인생을 논하기엔 이르지.”

“저도 그러고 싶지만….”

전생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정금용으로 49년을 살았기에 현재 수안의 나이까지 더하면 57살에 이른다. 충분히 인생을 입에 담아도 되는 나이였다.

“학교에 가면 네 또래들과 만나게 될 거야. 그 아이들은 네 본 모습을 무척 어색해할지도 모른다.”

“아시잖아요. 제가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러지 않는다는 거.”

.

.

.

김일곤 교수도 나중에서야 알았다. 방에서 따로 선생들을 만나서 하는 말투와 가족들을 대하는 말투가 전혀 달랐다. 할머니와 어머니에게만 아이처럼 혀 짧은 소리를 내는데 항상 어색하게 들렸다.

특히 어느 날은 상당히 충격을 받았는데, 수안이 어린 동생들과 함께 조부모와 부모님을 앞에서 율동과 노래를 하고 있었다.

“곰 세 마리가 한집에 있어. 아빠 곰 엄마 곰 애기 곰….”

수안은 깜찍한 표정과 율동을 노래에 가미해 이 무대를 지켜보는 모든 이의 눈에 하트를 만들었다.

방금 들어온 김일곤 교수만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나중에 수안이 김일곤을 발견하고 얼굴을 굳혔다.

과외를 받는 방에 들어와서 하는 소리도 가관이었다.

“…잊어 주세요. 교수님.”

“잊기는… 잘하던데?”

“하아…. 제가 이러고 삽니다.”

수안이 얼마나 부끄러워했는지 모른다.

.

.

.

“그래. 알지. 알아.”

“저도 유별나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것. 잘 기억하고 있어요.”

주머니의 송곳은 튀어나오기 마련이라 일곤이 평소에 자주 하던 말이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고 그 수준에 맞춰서 행동해. 네 사고 능력이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개념도 좀 탑재했으면 한다.”

“푸흣. 제가 개념이 없던가요?”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데….”

“제 나이에 벌써 익어 버리면 안 되죠. 흐흐흐. 저 이제 8살이잖아요.”

“그래. 네가 몇 살인지 또 깜빡했구나.”

8살 아이에게 다 익은 벼처럼 고개를 숙이라고 한 것부터가 잘못이다.

일곤은 아직도 수안과 대화하다가 문득문득 나이를 잊곤 했다.

수안이 지난 4년간 공부만 한 것이 아니었다. 수안은 지난 생에서처럼 아프고 싶지 않았다. 평생 건강하게 살고 싶었다. 잘 먹고 꾸준히 운동을 했기에 3학년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몸이 발달한 수안이다.

“그간 가르쳐 주신 스승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수안이 깊이 고개를 숙이자 일곤이 말했다.

“언제는 아직 안 익었다며?”

“군사부일체라 했습니다. 부모와 스승에게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은 군자가 할 일이 아닙니다.”

“푸흐하하. 내가 허투루 가르치진 않았구나.”

역사에 남을 천재는 아니었지만, 배움에 열정을 가진 어린아이의 습득은 생각보다 더 뛰어났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오랜 시간 집중력을 유지했다.

대입 시험을 준비하는 고등학생과 같은 수준의 집중력이었다.

“마지막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교수님이 아시는 젊은 의사 하나만 찾아주십시오.”

“의사?”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면허를 취득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운 사람으로요.”

“그런 의사를 뭐 하러…. 설마 네가 데려가려고?”

“예. 의대 들어갈 실력이면 기본 머리는 확실할 테고, 돈이 필요하니 제게 붙여 주시면 그의 생활도 나아질 겁니다.”

“의사로 쓰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리는구나?”

“제 곁에 두고 중히 쓰겠습니다. 의사라면 긴급 상황에 요긴하게 필요하죠. 곁에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부회장님께 재가를 맡아 보마.”

“표면적으로는 제 운전기사로 채용되겠지만, 앞으로 제가 크면 다른 자리를 맡을 수 있을 겁니다. 고작 운전기사로 쓰려고 의사를 달라고 하진 않았습니다.”

“의미심장하게 들리는데?”

“미래를 알 수 없으나, 계획은 얼마든지 세울 수 있지 않습니까.”

“너의 미래 계획에 넣을 인재라… 알았다. 적당한 녀석을 찾아보마. 대학 병원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놈들이 몇 있지.”

마침 대학 병원 레지던트 월급으로 집안을 건사하기 힘들어하던 녀석이 있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이 정도 부탁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네 덕분에 내 출셋길도 보장받았으니까. 다음 강운 병원 부원장은 내가 될 것 같더라.”

“아버지는 상벌이 확실하신 분이죠. 당연히 받으셔야 할 상입니다.”

“크큭. 너랑 대화하면 즐거워. 나도 모르게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게 된다.”

“저도 김 교수님과 함께한 시간이 항상 즐거웠습니다.”

“학교 가서도 그렇게만 해. 패러다임을 뒤집고, 창의력에 초점을 맞춰. 넌 세계를 이끌어갈 동량이다.”

“마지막까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스승님.”

“하하하.”

김일곤 교수는 강운 병원과 대학교 교단으로 돌아갔다. 이제 그가 따로 집에 찾아오는 일은 없을 터였다.

* * *

“우리 똥강아지가 벌써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다니.”

할머니는 수안이 국민학교에 들어간다고 하자 감상적으로 변하셨다.

“할머니. 동생들도 이제 금방이야. 내가 먼저 가서 적응하고 동생들 잘 챙겨 줄게.”

“아무렴. 맏이가 괜히 맏이가 아니지. 할미는 우리 수안이가 얼마나 믿음직한지 몰라.”

그럼에도 걱정이 끊이지 않는 할머니는 뒷말을 덧붙였다.

“혹시나 학교 가서 괴롭히는 녀석들 있으면 꼭 얘기하고. 알았지?”

“어머님. 강운 재단에서 운영하는 사립학교잖아요. 그럴 일 없어요.”

수안이 들어갈 학교의 주인이 바로 강운 재단이다. 강운가의 적자 강수안이 입학한다는 말에 재단 이사회와 교장, 교감까지 바짝 긴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애미야. 너는 수안이 동생들 교육이나 신경 쓰렴. 도무지 학습에 진척이 없으니 원….”

“네에….”

동생들인 수진, 수현, 수용은 항상 장남 수안과 비교 대상이 되었다.

‘비교할 대상이 따로 있지….’

자신과 동생들을 비교하는 것은 불합리했다.

인생 1회 차가 2회 차를 어떻게 따라온단 말인가.

동생들은 본래 아이들이 거쳐야 할 성장과 발달 과정을 아주 자연스럽게 따르고 있었다.

결코 못나지 않았다. 아주 평범할 뿐이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수안에 비해서 느린 동생들의 발달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 내가 동생들을 잘 알려 주지 못해서 그래. 동생들도 배우면 잘해. 내가 더 열심히 할게.”

“어이구. 우리 손주. 어쩜 동생들 생각하는 마음까지 이렇게 깊어.”

수안이 무슨 말을 해도 칭찬만 하실 할머니 되시겠다.

“그래도 우리 손주가 공부할 시간을 동생들에게 뺏기면 큰일이지. 애미야. 수안이 동생들은 따로 선생 불러서 가르쳐 보거라. 수안이 만큼은 어림도 없을 테니 적당한 선생을 붙이면 좋겠구나.”

“예. 어머님. 말씀대로 할게요.”

이미 선생을 붙여 수안을 제대로 길러냈으니, 나머지 동생들에게도 기대가 컸다.

하지만 그 기대는 실망만 안겨 줄 터였다.

* * *

학교 입구에 도착한 수안은 교장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교실 앞까지 갔다.

“여기가 수안 도련님. 아니 수안이가 앞으로 수업을 받을 교실입… 이다.”

나이도 많은 사람이 존대를 해서 편하게 말하라고 했는데도 여전히 고치질 못하고 있었다.

“수고하셨어요. 여기서부터는 제가 알아서 들어갈게요.”

따라온다던 어머니와 할머니까지 극구 만류한 수안이다.

교장을 데리고 교실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담임선생에게 일러놨으니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곧장 말씀을. 아니 고자질을. 아니….”

“고작 1학년인데 무슨 일이 생기겠어요? 일이 생겨도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니예. 명석하다는 말씀은 전해 들었죠.”

수안의 인내심이 슬슬 바닥을 드러냈다.

“거기까지. 이제 본래 자리로 돌아가시면 좋겠습니다.”

“옙!”

교장이 사라지고 조용히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드르륵.

교실엔 부모님과 함께 온 1학년 어린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아. 오늘부터 이 핏덩이들하고 같이 수업을 들어야 하는구나.’

수안은 앞으로 어린 아가들과 6년을 함께할 생각에 까마득한 기분이다.

그래도 예전 고아일 때와 지금의 상황은 비교할 수 없었다.

국민학교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오래전 일이지만, 고아라서 미카엘라 수녀님과 함께했던 입학일의 기억은 나름 추억할 수 있을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그땐 왜 나만 엄마가 없는지 싶었지….’

같은 학년 동년배들의 놀림을 받고서야 자신이 고아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했었다.

지금은 고아가 아니지만, 오래전 일을 보상받고자 어머니를 모셔오고 싶지 않았다.

‘미카엘라 수녀님… 저 이제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요.’

다짐이 무색하게 한숨이 나온다.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하아….”

‘중학교 3년에 고등학교 3년까지 다니려면… 어휴.’

국민학교 6년 뒤에 중고교 6년도 만만치 않은 시간이다.

교실 앞에 적혀 있는 대로 자리를 찾은 수안은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옆에 앉은 또래 남자애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나는 태식이라고 해, 넌?”

“난 수안.”

“야. 너는 엄마 안 왔어?”

“응.”

“왜?”

“동생들이 많아서 바빠.”

“우리 아빠도 바빠. 회사에서 높은 자리에 있거든.”

어린아이들이 자랑할 일은 부모 자랑 아니면 장난감 자랑밖에 없다.

“응. 좋겠다.”

“너는?”

“이 학교가 우리 집 거야.”

“……!!”

아이보다 옆에서 흐뭇하게 대화를 듣고 있던 아이 엄마가 화들짝 놀랐다.

“에이. 학교가 어떻게 너네 집 거냐? 거짓말.”

“그러게. 나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사실인걸?”

“너 자꾸 거짓말하면… 읍.”

옆에서 듣고 있던 엄마가 얼른 아들의 입을 틀어막고 말했다.

“가, 강운 그룹 도련님이신가 보네요?”

짐작되는 것은 이것밖에 없었다.

“맞아요. 할아버지가 강운 그룹 회장님이시고 아버지가 부회장님입니다. 저는 맏아들 강수안입니다.”

“흐읍!! 태식아. 수안이랑 친하게 지내야 한다. 알았지?”

태식이 엄마는 아들에게 귓속말로 단단히 일렀다.

수안은 처음부터 자신이 강운가 자손인 것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뭐 하러 숨긴단 말인가.

힘을 숨긴 찐따가 될 생각은 없었다.

있는 그대로 힘을 드러낸 재벌 3세가 될 생각이다.

태식 엄마의 질문과 수안의 답변을 들은 다른 엄마들도 저마다 자신의 자식들에게 알아서 단단히 당부했다.

강운 재단에서 운영하는 만큼 강운에서 일하는 직원의 자식들도 이쪽으로 많이들 들어온다.

국민학교 6년 그리고 이후에 중학교 3년과 고등학교 3년까지 강운 재단과 함께라면 탄탄대로였다.

‘힘을 드러내면, 편한 쪽으로 알아서 굴러가지.’

잠시 후에 들어온 1학년 담임선생도 수안이 앉은 곳을 계속 힐끔거렸고, 자신의 아이에게 관심을 쏟아야 할 다른 학부모의 관심도 모조리 수안에게 향했다. 뒤통수가 따끔거릴 지경이다.

‘약간 귀찮을지도 모르겠네.’

약간 귀찮은 게 차라리 낫다. 심하게 귀찮은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 *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