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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높이 (5/304)

눈높이

“늦네.”

금방 올 줄 알았던 과외 선생은 여태 소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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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외 선생이 다녀간 당일 아버지는 과외 선생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불콰하게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오셨다.

“으하하. 우리 아들이. 우리 아들이. 하하하.”

정신을 놓을 정도로 술을 마신 것은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말은 꾹 참을 수 있었다. 김일곤 박사가 아들의 미래를 위해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 사람이 바로 아들이라니! 보석이라니! 날개가 달렸다니!’

“어휴. 오늘은 무슨 일로 이렇게 드셨담.”

“좋은 일이야. 좋은 일. 하하하.”

수안은 멋모르고 아비 앞에 갔다가 어택땅을 당했다.

“아빠?”

“아들! 우리 아들이 아빠를 마중 나왔어? 잘난 내 새끼!”

꽈악!

갑자기 뛰어와 껴안는 아비의 힘은 네 살 아이가 견디기 힘든 것이었지만, 용케 참아냈다.

“으윽! 오늘도 수고하셔써요.”

고사리 같은 손이 아비의 등을 토닥거렸다.

“크하하. 하하하.”

아버지 귀에도 자신의 일이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생이 다녀간 모양이야.’

곧장 배움이 시작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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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며칠이 지났지만 김일곤 선생은 집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손꼽아 기다린다고 얘길 했는데… 괜히 어리광을 부렸나?”

그다음 날 김일곤이 찾아왔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수안아. 많이 기다렸니?”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은…. Soon이 아닌데요? 일주일이나 지났다고요.”

일곤은 타박부터 들을 줄은 몰랐다.

“…미안하다. 널 교육하기 위해 자료를 찾고 고민하다 보니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인사하렴. 네 수학 과정을 맡아주실 새로운 선생님이다.”

“…음, 반가워요. 수안 어린이. 그런데 어린이가 맞나?”

어린이가 아니라 그냥 아기라고 해야 맞을 것 같았다.

“반갑습니다. 선생님. 성함은 듣지 못했습니다.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와우. 인사가 똑 부러지네요. 나는 한국대학교 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이혜경이에요.”

“이 교수님이라고 칭하겠습니다. 부족함이 많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김 교수님이 왜 그렇게 칭찬을 했는지 알겠네요. 네 살짜리 아이랑 대화가 이렇게 잘 통할 줄은….”

“나도 처음엔 네 살짜리 아이와 대화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도 못 했어. 그러니… 내가 부탁한 대로 잘 부탁하네. 이 교수.”

김일곤은 이혜정에게 부탁의 말을 남기고 수안과 인사했다.

“오늘은 이 교수님이 수학을 가르쳐 주실 거야. 나머지는 내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전문적인 학습 커리큘럼을 만들어 네게 적용할 거야. 혹시 무섭거나 어색하진 않지?”

아직 네 살인 만큼 새로운 사람을 경계할 수도 있음이다. 수학 외에 다른 과목은 일곤이 직접 가르칠 생각이었다.

“좋네요. 딱 제 마음에 들어요. 제대로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나도 의학 박사이고 의대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 교수라고 불러 주면 좋겠구나.”

“아! 죄송합니다. 김 교수님. 앞으로 호칭을 제대로 하겠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죄송할 필요는 없다.”

네 살짜리 아이에게 교수 소리를 못 들었다고 사과까지 받을 생각은 없었다.

보통 아이라면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한참 어린 나이. 선생님이라고 불러 주는 것도 감지덕지해야 했다.

“앞으로 교수님이 제 교육과정을 전체적으로 총괄하신다는 말씀이죠?”

수안은 말하지 않아도 전체를 보며 윤곽을 그리고 있었다.

“그래. 맞아. 앞으로 수안이 네게 필요한 교육이 있다면 내 계획하에 유동적으로 변경할 수 있다. 원하는 교육이 있다면 언제든 내게 말해 주면 된다. 나는 매일 올 테니 언제든 얘기하면 되겠구나.”

“음… 우선 한 가지 요청이 있어요.”

‘벌써?’

“얘기해 보렴.”

수안은 자신이 지금까지 느낀 점을 토대로 가장 빠른 학습 방법을 찾아냈다.

그래서 자신에게 맞는 교육 방법을 요구할 참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수업을 들으며 공부하는 것도 상당히 좋은 일입니다만, 저를 교육하시려면 지난번처럼 사전 확인이 필요하실 겁니다. 당장 김 교수님도 아직 제 한계를 모르고 계시고, 저도 제 한계를 모릅니다.”

“와아….”

수학을 맡은 이혜정 교수가 옆에서 수안의 말을 듣다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말을 구사하는 수준과 논리가 성인과 다를 바 없었다.

일곤도 이혜정 교수와 같은 심정이었지만 벌어지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인쇄된 책자로 먼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네. 처음부터 끝까지가 모호하시면 국민학교 과정부터 대학교 과정까지라고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모든 교과목을 먼저 책으로 달라고? 그럼 너는 그걸 먼저 읽어 배워 보겠다는 뜻이니?”

“네. 교수님께서 주시는 책을 먼저 읽고 배워 보면 제가 어디까지 알 수 있는지 저도 파악할 수 있고, 교수님도 수준에 맞는 교육을 진행하실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커리큘럼을 만드시는 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

“…….”

이혜정 교수와 김일곤 교수가 서로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난 수안이 생각이 옳다고 생각해.”

김일곤 교수의 말에 이혜정 교수가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우선 벽을 마주하는 것도 좋을 테니까. 지금까지 수안이는 벽을 만난 적도 없을 거야. 그러니 저렇게 자신감에 가득한 상태고.”

“하아… 정말 말도 안 되는 학생을 만났네요.”

“수안아. 너의 뜻대로 해 주마. 내일 각 과목의 모든 책자를 보내 줄 테니 천천히 읽어 보거라. 그렇다고 무리해서는 안 된다. 우린 네가 그걸 다 알았다고 해서 칭찬할 생각은 없다. 배움은 시간이 필요한 법이야. 지름길은 없어. 쉽게 배우면 그만큼 쉽게 잊는다. 뇌는 자극받은 크기만큼 오래 기억하는 거야.”

“저는 낮에 낮잠도 자야 하는 네 살 어린이예요. 많은 시간을 배움에만 투자할 수는 없어요. 말씀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김 교수님.”

이혜정은 이 대화가 아이와 성인의 대화가 맞는지 싶었다.

그리고 가볍게 생각했던 수안의 과외에 점점 진심이 담기고 있었다.

“오늘은 제 차례 맞지요?”

“그래. 이 교수. 난 수안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려면 지금부터 발 빠르게 움직여야겠어.”

김일곤 교수가 나가고 이혜정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수학은 어디까지 배웠니?”

“…아버지 서재에는 수학 교재가 없었어요. 간단한 사칙연산만 알고 있어요.”

그 이상의 것은 새로 배울 생각이었기에, 적당한 수준에 맞췄다.

지난 생에는 일찌감치 수학을 포기했기에 틀린 말도 아니었다.

‘중학교 수학부터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네 살이면 사칙연산도 대단한 거야. 안 그래도 내가 여러 종류 교재를 챙겨왔으니까 같이 해 보자.”

“예. 이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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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수업이 끝나고 이혜정은 영혼이 탈탈 털린 표정으로 방문을 열고 나왔다.

‘미쳤어. 미쳤어….’

눈을 질끈 감고 마른세수를 했다.

애써 꾸미고 온 화장이 망가지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하아. 진짜 대학에서 가르치는 전공 서적들까지 가져와야 하잖아….”

도우미 아주머니들은 엉망진창으로 화장이 망가진 채로 집을 나서는 이 교수를 배웅했고 이 소식은 어머니 귀로도 들어갔다.

“…울어?”

“아무래도 그렇지 않았을까 싶었어요… 화장은 엉망이고, 완전히 얼이 빠지셔서 밖으로 나가더라고요.”

이혜정 교수의 번진 눈 화장이 도우미 아주머니들 눈에는 눈물을 흘린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수안이 걱정된 어머니는 막내아들을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맡기고 수안이 과외를 받던 방으로 향했다.

살포시 문을 열고 보자 수안은 누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집중하고 있었다.

“…수안아?”

“어? 엄마!”

수안은 활짝 웃으며 돌아봤다.

“어휴. 다행이다.”

수안이 침울해 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아들의 기분은 좋아 보였다.

“선생님하고 무슨 일 있었니?”

“수학 샘은 차케.”

“착해?”

“응. 마니마니 갈켜 주셔써.”

“우리 아들이 오늘 뭘 배웠는지 볼까?”

“여기!”

수안이 내민 종이에는 연립 방정식 그래프가 난잡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게 이름이.”

“십자가랑 교차점으로 해를 구하는 연립 방정식이라고 해써! 재미이써.”

종이에는 x와 y, 그리고 n이 포함된 공식이 주르륵 적혀 있었다.

공식만이 아니라 그래프까지 포함된 중학교 수준의 수학 문제들이다.

“…더하기 빼기… 아니, 숫자가 아니라?”

이랬든 저랬든 네 살짜리 아이가 배울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숫자랑 사칙연산은 쉬워서 재미 엄써. 이게 더 재미나.”

“…….”

“다음엔 더 재미난 걸 가져온대. 오늘 가져온 건 다 써 버려때.”

“아….”

“김 샘이 책도 많이 갖다 준대. 너무 좋아.”

“…쉬엄쉬엄해야지.”

“응. 나 배고파. 밥 먹고 동생들 보러 갈 거야.”

“식사 준비하라고 할게. 얼른 가자.”

“응!”

“혹시… 선생님 기분은 어때 보였어?”

“계속 입만 벌렸어. 파리도 입에 들어가려고 했어.”

“아… 그랬겠지.”

선생이 큰 충격을 받았을 것 같았다.

자기 아들이지만 엄마도 충격을 받았으니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나마 남편의 당부가 있어서 아들이 유별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었다.

아마 수학을 가르치는 교수도 감정을 숨기다 방을 나와서야 터져 나왔으리라 예상됐다.

수안은 맛있게 밥을 먹고 동생들과 놀아 준 다음, 할머니 감시 아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척하며 생각했다.

‘공부가 재미있다니….’

정금용으로 살면서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책을 봐도 졸리지 않았다.

전혀 모르던 수학 공식도 지금은 쉽게 배우고 이해할 수 있었다.

공식을 가르쳐 주는 선생까지 옆에 붙어 있으니, 막히는 부분은 금방 해결되었다.

다른 과목도 제대로 된 교재만 있다면 얼마든지 혼자서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곧 가져온다던 김 교수의 책들이 무척 기대됐다.

* * *

수안을 가르치던 수학 교수는 몇 개월의 시간만 가르치고 교단으로 돌아갔다.

앞으로 막히는 부분이 생기면 연락해서 물어보면 되는 일이었기에, 붙어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대학으로 돌아간 교수의 악명이 대학가에 퍼지고 있었다.

“야. 너도 F냐?”

“그래… 학고가 눈앞이다.”

“학사 경고?”

“저 교수 요즘 왜 저런다니? 왜 이렇게 학점이 짜? 적당히 C만 줘도 좋겠구만.”

“누가 안다니? 다음에 다른 교수한테 재수강이나 하련다.”

수안을 가르치다 대학생들의 시험지를 점검하던 교수가 주구장창 F를 남발한 것은 당연했다.

“네 살짜리 어린애보다 대학생이 못하면 어쩌자는 거야? 너도 F! 너도 F!”

이미 눈높이가 하늘을 뚫을 만큼 높아져 버린 이혜정 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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