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과외
먼저 엄마가 가족들 가운데 앉아 있는 수안에게 물었다.
“수안아. 한글은 어떻게 배웠어?”
“항글?”
“네가 읽은 책에 나오는 글자 말이야.”
“아! 항그리구나!”
‘모른 척하기도 쉽지 않네.’
“그래 한글이야.”
“그냥 일거써.”
“그냥?”
“응. 그냥.”
이런 일은 자세히 설명하거나 이해시킬 필요 없었다.
어린아이의 특권이다. 적당히 설명해도 알아서 이해할 어른들이다.
가족들은 서로 의논하기 시작했고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TV에 나온 아나운서의 말이나 신문을 통해 글을 배웠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스스로 배웠다는 뜻이다.
“…수안이가 정말 신동인가 봐요.”
책을 보고 글을 읽은 것이 아니라 한 구절을 통째로 외웠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말에 할아버지가 말했다.
“아예 선생을 붙여 볼까? 애미 생각은 어떠냐.”
“수안이는 이제 겨우 네 살인데….”
어머니가 거부하기 전에 얼른 소리쳤다.
“성생 좋아!”
차라리 선생을 만나 배움을 시작하면 당장 필요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을 터였다.
“수안이가 좋다는구나.”
“어차피 한글도 배우긴 해야 했어요. 혹시 엉뚱하게 배울지도 모르니. 선생님을 모셔 올게요.”
“제대로 된 선생이어야 한다. 천재는 천재가 가르쳐야 하는 법이지.”
“박사급 인물로 초빙하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어머니 대신 단단하게 답했다.
그렇게 전격적으로 과외 선생이 생겼다.
‘좋았어! 술술 풀리는구나!’
* * *
며칠 뒤. 아버지가 고른 박사급 과외 선생이 도착했다.
‘고작 네 살짜리 아이를 가르쳐야 하다니.’
아무리 재벌가라지만 과한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괜히 미리부터 욕심을 부려 가르치다가 크게 엇나갈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네 살이면 말이나 제대로 하는지 모르겠는데. 어휴. 이놈에 돈이 문제지.’
하지만 제시한 금액이 금액인지라 군말 없이 가르쳐볼 생각이다.
“안녕? 반갑다. 나는 김일곤이라고 한다. 수안이라고 했지?”
평범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온 네 살짜리 아이의 답은 범상치 않았다.
“반갑습니다. 김일곤 선생님. 강수안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어? …그, 그래.”
“제가 받을 교육의 커리큘럼은 짜오셨습니까?”
“커, 커리큘럼? 우선 수준부터 파악한 다음….”
“그게 좋겠군요. 제 수준을 파악해 주십시오. 한글부터 시작할까요? 아니면 수학부터 시작할까요?”
“…자, 잠깐 나갔다 와야 할 것 같다. 과자라도 먹고 있으렴.”
일곤은 문을 열고 나가서 이마에 흐른 땀을 닦고 있었다.
‘…뭐 저런 녀석이 다 있어?’
들어가자마자 나온 선생의 모습을 본 할머니가 과외 선생에게 다가왔다.
할머니는 혹시 몰라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안이 처음 본 선생을 보고 울기라도 하면 달래줄 요량이었다.
“선생. 무슨 문제가 있으시오? 수안이가 선생이 무섭다고 합니까?”
일곤은 안 그래도 보호자를 만나려고 나온 참이다.
“어, 어르신. 손자분이 정말 범상치 않습니다. 혹시 저 이전에 다른 과외를 받으셨습니까?”
“우리 수안이가 범상치 않으니 박사를 모셨지요. 혼자 아비의 서재를 들락거린 것 같긴 하지만 과외는 처음이라오.”
“그럼 부모님께서 따로 교육을 하셨거나….”
“전혀 없었다오. 수안이 태어나고부터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했으니…. 그리고 다른 이들도 우리 수안이를 가르친 것은 보지 못했소. 아이의 부모도 가르친 적이 없다고 말했고, 집 안에 있는 다른 누구도 가르친 적이 없다오.”
“허!”
“가족인 우리도 수안이를 보고 많이 놀랐으니… 선생. 잘 부탁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르신.”
* * *
다시 들어온 일곤은 단단한 다짐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한글부터 시작하자.”
일곤은 가져왔던 한글 걸음마 책을 꺼냈다.
“읽을 수 있겠니?”
“네.”
“해 보렴.”
수안은 어차피 거쳐야 할 과정이라 생각하고 한글 자음과 모음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기역, 니은, 디귿, …아, 야, 어, 여, 오, 요, 우, 유, 으, 이.”
“…다 읽을 수 있구나. 발음도 정확하다.”
“네.”
“그럼 이 책도 읽을 수 있겠니?”
그가 따로 읽으려고 가방에 넣어 둔 월간 문예지였다.
수안은 안을 들춰 살펴보다가 익숙한 이름을 찾아냈다.
“이건 토지네요?”
“…알고 있니?”
“제가 태어난 해까지 3년간은 현대문학에 연재되었고, 2부는 문학사상에서 연재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어요. 박경리 작가님의 엄청난 소설이죠. 발간된 1부는 아버지 서재에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어요.”
“아… 음….”
글을 읽으라고 꺼냈더니 책 속에 있던 작품의 역사를 읊어 버렸다.
“읽을까요?”
“됐다. 글을 읽을 수 있는 걸 확인했으면 됐지.”
“그럼 다음으로 파악할 부분은 뭐죠?”
“숫자다.”
“수학이 아니라요?”
“그래도 숫자가 먼저잖니….”
“1, 2, 3…. 99, 100. 선생님. 숫자는 어디까지 말해요?”
“…잠깐만.”
일곤은 얼른 종이를 꺼내 문제를 만들었다.
간단한 사칙연산이 포함된 10개의 문제였다.
“이걸 풀어 봐라.”
그래도 이건 모르겠지 싶었다.
“네.”
수안은 암산으로 더하기, 빼기, 나누기, 곱하기를 풀어냈다.
마지막 복합 연산 문제도 별거 아니었다. 10개의 문제를 푸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작은 손으로 연필을 잡아 숫자를 쓰는 것이 어려웠을 뿐이다.
“끝.”
채점은 수안이 푸는 동안 같이 진행했기에 따로 점수를 매길 필요도 없었다.
‘전부. 맞았어. 비틀어 버린 사칙연산까지 전부….’
“…….”
“다음은요?”
일곤은 다음에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뭐가… 좋겠니?”
“영어도 좋을 것 같아요.”
“…영어도 할 줄 아니? 외국어를 한단 말이야?”
“독해는 가능해요.”
“…읽고 해석한다고?”
“네. 아버지 서재에 외국어 서적이 많아서 배웠어요.”
일곤은 얼른 책장에서 외국어책을 꺼내왔고, 영자로 된 책을 줄줄 읽어 내려가는 수안을 눈앞에서 확인했다. 해석까지 완벽했다. 사전까지 끼고 서재의 책을 배워 온 수안이다. 그중에서 중요한 외국어인 영어는 특별히 신경 써서 공부했다.
“……!!”
일곤은 다른 책들을 우르르 빼 와서 펼쳐놨고, 곧 수안이 서재에 있던 모든 책을 외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미친!”
“네?”
“아, 아니다.”
일곤은 자신이 이 아이를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순 암기 능력을 테스트하는 시험까지 진행했다.
‘…희대의 천재라 말하긴 애매한데…. 네 살이 이 정도 하는 것도 천재라고 할 수 있겠지.’
어떻게 서재의 책들을 외우고 외국어를 배웠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아이였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다음번엔 제대로 된 교육 커리큘럼을 만들어 오마.”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선생님. I will wait for you. count on my fingers….”
네 살짜리 아이에게 들을 인사가 아니었다.
‘손꼽아 기다리겠다니. 그것도 영어로 표현해서….’
“오, 오냐… I will be back. soon.”
‘나 혼자는 어림도 없겠어.’
윗분과 논의가 필요했다.
* * *
수안의 아버지 강운모 부회장은 비서실을 통해 수안의 과외 선생으로 붙어줬던 김 박사가 찾아왔음을 들었다.
“그 사람이 왜?”
“긴히 의논드릴 일이 있다고 합니다.”
“허. 애나 잘 가르쳐 볼 것이지… 우선 무슨 소릴 하는지나 들어 보겠네. 들어오라고 해.”
“예. 부회장님.”
김일곤은 잔뜩 굳어서 부회장실로 들어왔다.
“앉지.”
“네. 부회장님.”
“오늘이 처음 아들을 만나는 날 아니었던가?”
“댁에서 뵙고 오는 길입니다.”
“수안이는 잘 배우던가.”
“사실 그 일로 뵙고자 청을 드렸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지?”
“아주 큰 문제가 있습니다.”
강 부회장의 상체가 쑤욱 나왔다. 아들에 문제가 있다는 말에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말해 보게.”
“수안. 아니 도련님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많은 지원이 필요합니다.”
일곤이 한참을 고민하고 내린 결론이다. 수안은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인재였다.
“보석은 제대로 된 세공사를 만나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자네. 지금 내 아들이 보석이라고 했나?”
문제라고 해 놓고 무슨 문제를 말함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보석도 그냥 보석이 아닙니다. 제대로 가르치시면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보석이 되어 빛나실 분입니다.”
“이제 고작 네 살인데?”
너무 과한 칭찬이라 인상이 절로 찌푸려진다.
내밀었던 상체도 다시 소파로 파고들었다.
“나이는 도련님께 아무것도 아닙니다. 혼자서 영어를 독파하셨습니다.”
“뭐, 뭐?”
소파가 다시 등에서 떨어져 상체가 불쑥 앞으로 나왔다.
“…모르셨습니까?”
“한글은 혼자 배웠다고 알고 있었지만….”
“한글은 물론이고, 부회장님 서재에 있던 모든 책까지 다 배우셨습니다. 그것도 혼자서요. 배웠다고 하기보단 외웠다고 하는 편이 맞겠습니다. 전부 줄줄 외우고 계셨죠.”
“허!”
“자칫 잘못하면 문제가 커질 것 같아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아들이 천재인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하하하.”
“천재는 세상을 너무 일찍 알게 됩니다. 부회장님.”
“…세상을 일찍 안다는 게 무슨 뜻인가?”
“천재가 자신이 뛰어남을 깨닫게 되면 두 가지 길을 걷습니다. 하나는 주변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재능을 찬란하게 꽃피우는 것이고….”
강 부회장은 다음에 올 말이 나쁜 말임을 확신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다른 하나는 배움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평범함을 가장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평범함을 가장한다?”
예상보다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자신의 또래 사이에서 자신이 너무 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적당한 수준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너무 유별나다고 해야 할까요? 그 정도 수준이면 선생부터 친구들까지 모두 괴물 보듯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험을 치르게 되어도 일부러 틀리고, 공부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등 뒤에 빛나는 날개를 스스로 꺾는 것입니다. 주변과 같아지기 위해서요. 자신이 유별나다고 하면 누가 좋다고 할까요. 자신의 재능을 꽃피운 천재들도 나중에 가서는 이와 같은 길을 걷는 천재가 많습니다. 결국은 그 천재는 일반인보다 못한 결과를 맞이합니다. 보통은… 자살로 끝맺음을 합니다.”
“그런!!!!”
평범함을 가장하는 것은 좋으나 날개를 꺾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게다가 자살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만약 도련님이 한미한 집에서 태어났다면 그리됐겠지요. 하지만 도련님은 이렇게 강 부회장님을 아버지로 두고 있습니다. 도련님을 제대로 키워내기 위해서는 부회장님의 지원이 절실합니다.”
“…의학 박사를 데려오길 천만다행이었군.”
김일곤은 국내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해외로 나가 다시 공부해 의학 박사까지 취득한 전문의였다.
강운은 일곤을 강운 병원의 과장급 교수 의사로 채용했고, 추가로 많은 돈을 주고 과외 선생으로 모신 것이다. 심리학에도 조예가 깊은 김일곤은 천재의 심리에 대해서도 정통했다.
“이런 케이스는 저도 처음입니다. 쉬운 일이 될 것이라 여겼는데, 일생일대의 기회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김 교수. 내 아들이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겠는가?”
“문학을 배운다면 문학의 거장이 될 것이고, 수학자나 물리학자가 된다면 세기의 석학이 될 것입니다. 의사가 된다면….”
부회장은 일곤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기업을 경영한다면?”
수안은 이미 강운의 경영자로 낙점되어 있었다. 부회장인 자신이 회사를 물려받으면 그 뒤는 장남인 수안 차례였다.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앞으로 한국에서 세계적인 기업이 탄생한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
“도련님께는 너무나 당연한 결과일 테니까요.”
“크하하하. 좋구나! 좋아!!”
소파 팔걸이를 내려치며 크게 웃음을 터트린 강운모 부회장은 비서를 불렀다.
“장 비서!”
“네. 부회장님.”
“여기. 김 교수님이 요청하는 것 전부 들어드려!”
일곤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푹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강 부회장은 일곤의 손을 찾아 두 손으로 꼭 쥐고 말했다.
“오히려 내가 고맙습니다. 김 교수. 앞으로도 우리 아이를 잘 부탁합니다. 특히… 스스로 날개를 꺾지 않도록 잘 보살펴 주시오.”
천재가 자살한다는 말이 못내 마음에 걸린 강 부회장이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이제 도련님은 자신이 유별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특별하지만 유별나지는 않은… 그 경계를 잘 찾아야 합니다. 부회장님께서도 이것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김일곤은 이제 수안의 수준에 맞는 교육을 진행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