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곳
강병호 회장은 집에서 나가며 손자의 얼굴을 보고 돌아와서 다시 얼굴을 봤다.
손자를 볼 때마다 흐뭇하게 웃으며 기꺼운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허허허. 내가 요즘 이 녀석 보는 맛에 퇴근 시간이 얼마나 기다려지는지 몰라. 저 버둥거리는 것 좀 봐. 힘이 넘치네. 허허허.”
일어나고 싶어 용을 쓰고 있는 수안이었다.
아버지 강운모 부회장도 회사 일을 끝내면 아들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우리 아들이 아주 복덩이로구나. 그 대쪽 같던 아버지까지 녹여 버렸어.”
‘재벌가에선 원래 이렇게 자식을 사랑하나? 이런 세상이 있는 줄도 몰랐네….’
모친의 살뜰한 보살핌과 할아버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없는 집안의 안주인이신 할머니가 계셨다.
“아이고. 우리 손주. 어쩜 이렇게 잘나셨을꼬.”
“어머님. 제가 할게요. 힘드셔요.”
“하나도 안 힘들다. 우리 손주가 너무 예뻐서 앞으로 기저귀는 내가 갈아 줘야겠다.”
“아휴. 제가 해도 되는데….”
집안의 모든 관심은 수안에게 향했고, 수안은 관심과 사랑에 벅찬 감격을 느끼고 있었다. 전생에 단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가족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한 감이 없지 않았다. 누구든 자신을 보면 눈에 하트가 박힌 것처럼 관심을 보이고 애정을 감추지 못했다. 수안은 집안일을 돕는 도우미 아주머니들의 사랑까지 독차지했다.
“난 가끔 우리 아들보다 도련님이 더 예쁘더라….”
“실장님도 그래요? 저도 그렇더라고요.”
[너는 사랑받는 사람이 될 것이니….]
누군가의 가호가 그에게 머물고 있었다.
덕분에 무지막지한 사랑과 관심이 그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아기의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갔다.
다음 해 어머니가 여동생을 낳았음에도 관심이 덜어지지 않았고, 다시 다음 해에 낳은 셋째도 여동생이었다.
수안은 아들을 선호하는 가풍 때문에 자신이 사랑받는다 생각했다.
‘아들만 예뻐하면 어쩐답니까… 여동생도 저렇게 예쁘구만.’
그 후 수안의 나이 네 살. 어머니가 이번에 낳을 동생은 아들이길 간절히 빌었다.
‘다음은 제발 아들로 부탁드려요. 삼신 할매.’
* * *
시간이 흐르고 흘러 수안의 나이 네 살이 되었다.
‘넷째가 곧 태어난다. 흐흐흐.’
어머니는 만삭이라 병원에 가셨다.
항상 바쁘다던 아버지가 언제 어머니와 동생들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거기까진 내가 알 필요는 없는 일이고….’
“할무이.”
“옹야. 우리 똥강아지 배고파? 심심해?”
“동생 궁금해.”
“수안이는 남동생이면 좋겠다고 했지?”
“응. 가치 놀고 시퍼. 소꿉놀이 시러.”
사실 네 살 주제에 이렇게 대화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일 년 전 일로 인해 이젠 가족들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수안은 일 년 전, 만2년이 지나고 세 살이 된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듣고 있었다.
입을 떼고 처음 한 말은 부모님의 기대를 약간 벗어났다.
“할무이.”
아빠, 엄마가 아니라 할머니였다.
“어이구 내 새끼. 할미 여기 있다. 여기 있어.”
하도 할머니가 끼고 살아 자신 앞에 있는 할머니를 처음으로 선택한 것뿐이다.
“아… 엄마는?”
“아빠도 여기 있다. 아들.”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고개를 휙 돌리고 말했다.
“엄마. 아빠.”
“옴마야!”
“하하하하.”
아기치고는 너무나 선명하게 엄마 아빠를 입에 올린 아기는 그 후로 계속해서 어른을 놀라게 했다. 남은 사람은 할아버지다.
“할부지 까까.”
“우하하하. 과자 공장을 사야겠구나!”
역시 할아버지는 스케일이 다르다.
“사룽해.”
“흑. 어머님. 아들이 우릴 사랑한대요.”
“영특하기 그지없구나. 우리 며느리가 신동을 낳았어.”
“남편을 닮아서 그래요, 어머님.”
“운모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의 자식들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수안의 아비인 아들이 다른 자식들에 비해 명석하긴 했지만, 수안과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내자 말이 맞아. 다른 자식들이 낳은 손자들도 저 정도는 아니었지. 하하하.”
수안은 약간 과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답답해서 더는 안 되겠다고.’
그래도 말문은 열어야겠기에 아기 흉내를 내며 말한 것뿐이다.
* * *
“수안아. 이제 네 남동생이 생겼다는구나.”
할머니가 전화를 받고 전해 주는 말에 수안은 두 팔을 번쩍 들고 소리 질렀다.
“우아!!!”
‘그라취! 삼신 할매 감사합니다!’
이제야 이 거대한 가문의 숨 막히는 사랑에서 반쯤은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봐야 우리 수안이만큼 사랑스럽진 않을 테지.”
“할무이. 내 동생 많이 사랑해 줘.”
“오호호. 물론이지. 수안이 동생이니 많이 사랑해 줘야지.”
‘그래도 강운의 모든 것은 네가 물려받아야 한단다. 수안아.’
할머니의 생각을 모르는 수안은 남동생의 탄생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었다.
* * *
4살 수안 아래로 줄줄이 태어난 동생들은 3살 여동생 수진에 만 1년을 살짝 넘은 2살 여동생 수현이 있었고, 이제 막 태어난 1살 남동생 수용이 있다.
정금용으로 살아가며 힘들고 어려울 때 형제가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많이도 생각했었다.
‘이젠 형제까지 이렇게 많다니.’
줄줄이 연년생으로 태어난 동생들 셋을 생각하면 절로 마음이 뿌듯했다.
물론 바쁘게 아이를 낳느라 고생한 어미의 안타까운 몸 상태는 걱정스럽지만, 재벌이 괜히 재벌이겠는가. 알아서 산후 조리를 빵빵하게 받고 계셨다.
“수안아. 수안이는 남동생 생겼다고 미워하면 안 된다. 알았지?”
병원에서 동생을 안고 돌아오신 어머니의 당부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동생 너무 좋아. 사랑해.”
꼬물거리는 아기는 볼 때마다 너무 사랑스러웠다.
자신의 피붙이인 동생이다.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수안이는 사랑이 너~ 무 많아서 걱정이 없어요. 동생 예쁘지?”
사랑한다고 했으니 당연히 동생이 예쁘다고 말할 줄 알았다.
“아냐.”
수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안 예뻐?”
어머니는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동생 잘생겼어.”
“그래도 우리 수안이가 제일 잘생겼어.”
굳었던 어머니의 표정이 다시 풀렸다.
“엄마가 제일 예뻐.”
“호호호. 그래서 동생이 안 예쁘다고 했구나? 어이구 내 새끼.”
어머니의 얼굴에 다시 환한 미소가 돌아왔다.
“오래오래 수안이랑 가치 살아. 엄마. 아프지 마.”
“엄마도 수안이 너무 사랑해!”
엄마를 사랑하지만 여동생들을 돌보느라 약간 관심이 멀어진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제 남동생까지 생겼으니 자신의 자유 시간은 더 늘어날 터였다.
요즘 수안은 몰래 아버지 강 부회장의 서재에서 놀고 있었다.
‘공부… 공부만이 살길이다.’
과거만 기억해서 살아가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앞으로 강운 그룹을 이어받아 제대로 경영하려면 공부가 필수였다.
어리지만 이미 글을 읽을 수 있었기에 서재의 책을 읽는 것도 무리가 없었다.
그 뒤로 수안은 몰래몰래 아버지의 서재로 가서 책을 훔쳐봤다.
무언가 배운다는 것은 결국 엉덩이 싸움이다. 여기서 하위 50%를 제치고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조건은 실행력에 있었다. 남들은 시작도 전에 미루지만, 실행력이 있으면 다시 나머지 중에 45%를 제치고 더 앞으로 나아간다.
여기에 좋은 머리가 더해진다면 상위 1%로 가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수안은 좋은 머리를 갖고 있었고, 뛰어난 집중력과 실행력이 있었다.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배우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제 거의 다 봤어…. 앞으론 책을 사 달라고 말씀드려야 하는데….’
그 전에 한글을 배워야 책을 사 달라고 할 것이 아닌가.
가문은 자신에게 기역니은도 알려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혼자 배워왔다.
학교에 가기 전에 한글은 떼고 가야 하건만 언제 교육을 시작할 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동안은 복습이나 해야겠네.’
의자를 밀어 책장 높은 곳에서 꺼내온 책을 밀어 넣고 내려오려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딸깍.
“엇!”
수안은 너무 놀라 올라선 의자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헙!”
눈이 마주친 상대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수안을 얼른 뛰어들어 안았다.
‘나이스 캐치… 아차. 이게 아닌데.’
서재에 들어온 사람은 수안의 아버지 강운모 부회장이었다.
“아, 아빠….”
“큰일 날 뻔했잖아!!”
강 부회장은 처음으로 아들에게 벌컥 화를 냈다.
‘울어라. 넌 지금 울어야 한다….’
눈물이 나올 것 같지 않아서 자기 암시를 걸어야 했다.
“후엥. 잘모해써요….아아앙.”
아들의 울음에 정신이 돌아온 아버지는 얼른 아들을 달랬다.
“어이구. 많이 놀랐지? 괜찮아. 괜찮아….”
“아아아아앙!!”
집안에서 사랑을 독차지한 수안의 울음소리는 온 가족을 불러 모았다.
“무슨 일이야?”
할아버지가 오셨고,
“수안아. 수안아!”
할머니도 출동했다.
“아들!!!”
마지막으로 어머니까지 서재로 총출동했다.
“별일 아닙니다. 수안이가 서재가 궁금해서 들어왔던 모양입니다. 의자에서 떨어지는 것을 제가 받아 냈습니다. 다치지 않았습니다. 잠시 놀란 것뿐입니다.”
아버지의 말에 할아버지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잘했다, 아들. 큰일 했구나!”
“아… 네.”
사업적으로 성과를 이뤄 보고해도 쉬이 칭찬 한번이 없던 회장님이다.
강 부회장은 아버지의 과한 칭찬이 무척 생소했다.
“우리 똥강아지가 서재가 보고 싶었구나. 할미한테 얘길 했어야지.”
“흐윽. 끅.”
“수안이는 아직 글도 못 배웠는데….”
“이제 가르치면 되겠지.”
수안은 기회라고 여겼다. 얼른 울음을 그치고 말했다.
“끕. 재미이써.”
“뭐? 재미있어? 이 녀석이!! 죽을 뻔한 줄도 모르고!”
아버지는 의자에서 떨어지는 것을 받는 행위가 재미있었다는 말로 들렸다.
“진짜 재미이써. 저기 재미난 이야기가 마나서 그래써.”
수안은 서재의 책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
“……!!”
“……!!”
“……!!”
모두가 알 만한 책으로 확답을 줘야 했다.
수안은 아무도 보지 않았지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두꺼운 책을 선택했다. 그 내용이 고스란히 뇌리에 남아 있었다.
“한 처으메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셔따. 땅은 아직 꼬를 가추지 모타고 비어 이써는데, 어두미 시면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이써따.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따….”
성서의 첫 구절이다.
“허윽!”
“차, 창세기!”
“에구머니나.”
할머니의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불교였지만 성서만큼은 알고 있었다.
누구든 알 수밖에 없는 창세기였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할아버지 강병호 회장이다.
“누구… 수안이에게 한글 가르친 사람 있느냐?”
“애미야. 네가 가르쳤니?”
시어머니의 물음에 수안의 모친은 얼른 답했다.
“아, 아뇨. 저 줄줄이 아이만 낳았어요. 수안이 가르칠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요. 아이들 보느라 바빴죠.”
아이를 갖느라(?) 바빴고, 아이를 낳느라 바빴고, 낳은 아이들을 돌보느라 바빴다.
아무리 수안이 장남이라지만 한글을 차근차근 가르칠 시간은 없었다.
“애비는?”
“제가 수안이 교육하려고 해도 시간을 낼 수가….”
회사 일에 바쁜 아들이 손자를 가르쳤을 리가 없다.
또한 집에 오면 아이를 갖느라(?) 바빴다.
“그렇지. 시간이 없지.”
할머니의 시선이 남편을 향했다.
“당신은….”
“내가 먼저 물었어. 이 사람아!”
할아버지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밖에 누구 없어?”
그 뒤로 집안 도우미 아주머니들이 줄소환되었지만, 누구도 수안에게 한글을 가르친 사람이 없었다는 것만 확인했다.
긴급 가족회의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