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마탑 방어전(5)
* * *
마법 보호막이 전부 지워진 현 상황, 리치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물론, 다시 마법 보호막을 씌울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전쟁 통에서 개체 하나하나 다 찾아서 손수 보호막을 씌워 주는 건 불가능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마법 보호막을 제거한 이상 이제 마법사들의 대규모 폭격이 쏟아질 것이다. 속수무책, 사면초가다.
“…….”
칠흑같이 까만 로브를 두르고, 휘황찬란한 지팡이를 땅에 짚고 서 있는 해골 마법사는 앞으로 어떤 수를 둬야 할지 묵묵히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
작전을 성공시킨 정령사, 로헨이 마탑 입구 앞에서 스스로 자축하고 있을 때, 마탑 정상의 사람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부드러우면서도,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공입니다.”
크리스 베네피쿠스가 작전 성공을 외치자, 이제 다들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자축할 수 있었다.
“히야~ 진짜 미친놈이었네, 정령사.”
마수 조련사, 줄리아는 통쾌하다는 듯이 꺄하하, 웃으며 소리를 질렀다.
“역시, 믿고 있었다. 그럼 나는 혹시라도 보호막이 남아 있는 녀석들을 처치하러 가지.”
무명은 한걸음에 높은 마탑에서 뛰어내렸다. 혹자가 보면 미친 사람인지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강력한 육체는 고작 추락 정도에 흔들리지 않는다.
“허허, 리치가 당황하는 모습이 안 봐도 보이는구만.”
랜서스 데이몬드 또한 흡족한 듯이 껄껄 웃었다.
“하지만, 아직 방심은 금물입니다.”
크리스는 아직 마음을 놓지 않았다. 이제 작전의 1단계가 성공했을 뿐, 몇 가지 위험 변수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중 하나는 순간이동이었다.
정령사, 로헨은 마탑 근처 호수의 물을 전부 끌어오고, 거기다가 물의 정령에게 자신의 마나를 전달해 더 많은 물을 끌어와서 공격했다.
일단은 불시 상황을 대비해 로헨의 마나를 조금이라도 절약하기 위한 계획이었지만, 마탑 호수의 물은 평범한 물이 아니었다.
“그래, 이제 순간이동으로 마탑 안에 들어올 수도 있겠지.”
랜서스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호수의 물에는 순간이동을 금지하는 마법이 걸려 있다. 저 호수가 존재해서 그 누구도 호수의 밖에서 마탑 안으로 순간이동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적 진영의 마법사들 몸에 묻은 순간이동 금지 호수물이 전부 마른다면, 분명 그들은 즉시 마탑 안으로 침입해오겠지.
하지만, 그때까지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즉시 공격합니다.”
확성 마법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키운 크리스가 총공격 명령을 내렸고, 마탑 전체에 크리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사실 마법사 사회가 그렇게 실력 지상주의는 아니다. 오히려 지금 크리스가 대표를 맡은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현존하는 마법사 중 가장 강력한 마법사는 확실히 크리스지만, 그렇다고 자존심 높은 늙은 마법사들이 순순히 따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시련은 전부 빽으로 해결된다. 뒷배가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다. 그의 뒤에는 랜서스 데이몬드가 있다.
전 용사 파티의 일원이었던 마법사이자, 대마법사, 마탑의 주인, 현자 등등… 그 수많은 수식언을 지니고 있는 마법사의 뜻을 쉽사리 거스를 수 있는 간 큰 마법사는 많지 않다.
그런 랜서스 데이몬드가 병상에 누운 지금, 크리스를 밀어주고 있다. 어쩌면 다음 마탑주가 될 수도 있는 인물에게 감히 누가 객기를 부린다는 말인가.
게다가 지금 같은 위급 상황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명령을 거부하며 시선을 집중시킨다? 이건 그냥 한심한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쩌면 지금은 리치의 습격으로 인해, 그 자존심 높은 마법사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는 흔치 않은 순간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자존심 높은 것과는 별개로, 실력만은 확실했다.
마탑의 주변에 수백 개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 마법진들은 죄다 언데드 군대를 향하고 있었고, 조금의 시전 시간이 걸린 뒤… 발사됐다.
“장관이군.”
랜서스가 내뱉은 네 글자는 그 경관을 정확히 묘사하고도 남을 만큼 간결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법진이 그려졌고, 그 마법진에서는 온갖 가지의 마법이 시전되었다.
칼날 바람 폭풍, 지옥불덩이, 얼음 칼날… 수많은 고위 마법이 무자비하게 난사됐다.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고, 화염 폭풍이 작렬하고, 눈보라가 날리고, 전장 곳곳에 번개가 내리쳤다. 조금 걱정되는 점은 저곳에 아군인 무명이 있다는 건데, 다행히도 무명은 멀쩡했다.
아무도 그의 정확한 힘을 파악하지 못했지만, 애초에 그는 불로불사인 데다가 상대가 마왕 수준이 아니라면 특별히 피해도 받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저런 마법들에도 흠집 하나 안 났을 언데드 군대였을 텐데, 마법 보호막이 벗겨진 것 하나만으로 전세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리고 그 전세를 뒤바꾼 핵심 인물은 바로 로헨이었다.
로헨이 없었으면 지금쯤 마탑은 어떻게 됐을지, 크리스는 상상하기조차 두려웠다. 마음속으로 로헨에게 감사를 보냈다.
때마침, 독수리를 닮은 커다란 새가 마탑 정상에 내려앉았다.
“자, 그럼 나도 가 볼게?”
마수 조련사, 줄리아가 독수리를 닮은 새 마수 위에 올라탔다. 몇 시간 전부터 이미 마수 소환 준비를 다 끝내 놓은 줄리아는 지금만 기다리고 있었다.
“꺄하, 드디어 복수의 시간이 왔네?”
독수리 마수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지상에는 흉악한 마수들이 곳곳에 생겨났고, 하늘에는 날개가 달린 마수들, 그리고 거대한 흰 고래, 모비 딕까지 출몰했다.
그리고 비행 마수들이 가장 먼저 공격한 곳은 언데드 군대의 최후방이었다.
“그러니까, 쟤네들이 순간이동할 수 있게 되기 전에 해치우면 되는 거잖아?”
새를 닮은 마수들, 그리고 벌레를 닮은 마수들이 달고 있는 주머니의 끈이 풀리고 무언가가 떨어졌다.
“폭탄벌레들이야~!”
공 모양의 자그마한 벌레 마수, 폭탄벌레. 그 한목숨을 불태워서 장대한 폭발을 만드는 이 마수가 한 마리도, 열 마리도 아니라, 무려 몇백 마리가 공중에서 떨어졌다.
적의 최후방을 노려 파괴시키는 폭격 부대. 그것이 이번 전투에서 줄리아의 역할이었다.
“줄리아는 물론 강한 전력이지만, 그녀의 마수 군대는 아직 전력이 부족해요.”
“당연히 그럴 테지. 그도 그럴 게, 저번에 네놈이 다 학살했지 않았느냐.”
크리스가 머쓱하다는 듯이 뒤통수를 긁었다. 마나를 담은 작살을 날려 줄리아의 보물 1호였던 마수인 성체 모비 딕을 원샷원킬하고, 마법 공격으로 인한 피해의 90퍼센트를 막아내는 골렘들도 학살했던 인간이 크리스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라도 마법 데미지의 100퍼센트를 막아내는 리치의 보급형 마법 보호막을 뚫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더욱 로헨에게 감사했다.
“이제 저도 가세해야겠군요. 큰 거 한방 준비해서 제대로 꽃아 주면….”
그 순간, 마탑 정상 중앙에 갑작스레 거대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어두운 오오라, 칠흑처럼 어두운 로브, 코가 썩어 들어가는 악취.
“다들…쥐새끼처럼…여기 모여 있었군….”
“이, 이렇게 빨리…!”
물에 저장되어 있는 순간이동 금지 주문이 벌써 풀리다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믿든, 못 믿든 그건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분명한 건 지금, 리치가 마탑 정상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
한편 작전을 성공시키고 신이 난 나는 잠시 나의 정령들과 자축한 뒤, 다시 마탑의 정상으로 향했다.
“아무리 그래도, 적 기지에 홀로 기습하는 게 말이 되나?”
크리스가 내게 마나를 아끼라고 한 이유는 간단했다. 보호막만 벗기고 끝이 아니라, 계속 싸우기 위해서.
그리고 그가 말을 덧붙였다. 순간이동이 가능하게 되면, 리치가 마탑으로 직접 올지도 모른다. 마법 보호막을 지우더라도 자기 자신의 것은 금방 재생시킬 테니 의미가 없다.
그러니, 혹시라도 리치가 나타날 가능성을 대비해 나는 다시 마탑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면 그냥 내 마나로만 물을 만들어서 공격했으면 애초에 상대가 순간이동으로 들어올 일도 없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호수의 물을 동원하지 않고 내 마나를 전부 썼다면 아마 나는 기진맥진해져서, 앞으로의 싸움에 전혀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크리스는 리치가 마탑으로 순간이동하는 리스크를 짊어지는 것보다 내가 전투 능력을 상실하는 게 더 타격이 크다고 판단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옳았다.
“다들…쥐새끼처럼…여기 모여 있었군….”
계단을 걸어 올라가니, 크리스와 랜서스, 그리고 몇몇 마법사들 사이에 거대한 덩치의 해골 마법사가 그 위엄을 드러내며 서 있었다.
흑마법사, 리치. 그에게 가까이 가기만 했을 뿐인데 주변이 으스스한 분위기와 음습한 기운으로 잔뜩 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둠에 물드는 듯한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크리스, 네 말이 맞았네.”
이 자리에 있는 인간은 죄다 마법사들. 아무리 강력한 마법을 쏘아 봤자 리치의 마법 보호막에는 소용없다.
하지만, 내가 온 이상 그 전제는 깨진다.
“마법이 아니니까.”
《마법을 흡수하는 강철의 건틀릿을 그대에게.》
《지옥의 업화, 생명의 불꽃이 더러운 시체들을 정화시키겠노라.》
아르마(?)는 눈치 빠르게 적에게 상성이 좋은 마법 무기를 바로 만들어 줬고, 내 옆에는 화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머리, 붉은 드레스를 입은 아리따운 아가씨가 나타났다.
“정령…정령…정려엉…!!!”
공기가 무거워졌다. 중력이 몇 배로 강해진 건지 어림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고작, 이 정도로는…!”
“중력 전환.”
크리스가 한 마디 주문을 외치자, 중력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한 손가락을 펴고 말을 이어갔다.
“당신에게 마법으로 타격을 못 입히는 것뿐. 그쪽의 주문을 해제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아.”
리치의 주문을 가뿐히 파훼했다. 그 덕에 내 몸은 한결 가벼워졌고, 이제야 주먹을 들 수 있었다.
“야, 마법사. 이 꽉 물어라.”
퍼억!
역시 마왕군 간부답다고 해야 할까. 내가 주먹을 날리자마자 그의 주변에 마나 방어막이 구축됐지만, 내가 끼고 있는 건틀릿은 상급 무기 정령의 건틀릿이었다.
《마법 흡수 건틀릿이다!! 천적이다!!》
내 주먹이 마나 방어막에 닿는 순간 그 마나를 고스란히 흡수해 없던 것으로 만들고, 그대로 리치의 몸에 직격했다.
“…크아아악!”
마법사들은 내구성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 이렇게 몇 방만 더 먹인 다음, 무명 스승님이 와서 라이프 베슬과 리치 사이의 연결을 끊어 버리면 끝이다. 이거, 어쩌면 계획보다 더 수월해질 수도 있겠다.
잠시 비틀거리던 리치가 곧 자세를 똑바로 고치고, 그 사악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누구…맘대로!!”
분명 마탑의 정상은 뻥 뚫려 있는데, 그의 목소리는 어디 동굴 안에서 말하는 것처럼 웅웅 울렸다. 리치가 진노해서 지팡이로 바닥을 툭 내려찍자, 주변 공기가 파르르 떨었다.
“다른 마법사들을 데리고 떠나. 랜서스 님도 데리고. 스승님 데려올 때까지 버틸 때니까.”
“그래, 여기서 끝낸다. 그렇지만 너 혼자 남겨둘 수는 없어.”
급박한 상황이다. 존댓말 챙겨가면서 예의 차릴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나는 자연스럽게 크리스에게 반말을 했고, 그도 이게 편하다는 듯이 그대로 반말로 대답했다.
“어차피 마법 보호막 때문에 도움도 안 되잖아. 썩 꺼져.”
“그건, 맞지만….”
한번 깨부순다고 끝이 아니다. 몇 번을 깨부숴도 다시 생겨나고, 또다시 생겨난다. 사실상 내 앞에 있는 리치는 마법사에게 죽지 않기 위해서만 진화한 생물처럼 보였다.
생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다시 팔을 뒤로 당긴 후,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제안이…있다.”
제안이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지금 상황은 우리의 확실한 우세, 협상 따위 할 필요도, 할 이유도 없다.
“받아들이지 않겠다. 들을 이유도 없어.”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크리스도 단호히 거절했다. 지금 열댓 명의 마법사와 대마법사 랜서스, 현존 최강의 마법사 크리스, 자칭하기는 부끄럽지만 역대 정령사 중 제일인 나도 있다.
협상 따위는 절대…!
“…이래도…말인가?”
리치가 손을 까딱 흔들자, 랜서스 데이몬드가 그의 앙상한 해골 손 앞으로 끌려갔다.
“스승님…! 개자식이…!”
“마법사의 긍지로써 이런 짓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네만… 제안은 단 하나… 휴전을 요구한다….”
혹시나 해서 옆을 돌아보니, 크리스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크리스, 알지?”
“스, 스승님을…!”
아무래도 내 말도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최대한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랜서스는 배제하고, 리치를 공격한다.’
랜서스 한 명 살리겠다고 이 기회를 놓치는 건 바보 얼간이도 하지 않을 짓이다.
인질? 웃기지도 않는다. 여기서 리치는 죽는다. 어떤 일이 있든, 무조건 죽이고 만다.
이런 말까지 하기는 좀 그렇지만, 어차피 랜서스 데이몬드는 이번 전투를 죽을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병에 걸려 숨을 거둘 날도 얼마 남지 않았던 인간이다.
크리스가 못 한다면, 나라도 해내야겠지.
“로, 로헨….”
나는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갔다.
“일단, 천천히 생각을….”
“크리스.”
“으, 응?”
아까까지의 그 카리스마 넘치던 전략가 마법사는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이곳에는 그저 아버지를 잃고 싶지 않아하는 어린 소년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어.”
그의 표정이 절망으로 무너졌다. 공허한 눈. 아, 알고 있는 눈이다.
저 눈을 본 적이 있었다. 언제였지….
그래, 마왕에게 용사 파티가 전멸당한 다음 날, 거울을 들여다봤을 때 보았던 푸른빛 머리칼을 지닌 소녀의 눈과 닮았다.
…내 눈이었다.
그때,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들렸다.
“제자야.”
“스, 스승님…?”
리치의 손에 잡혀 있는 마법사, 랜서스 데이몬드. 그는 지금 몹시 병약해 보였다. 아까보다 더.
“내 끝은, 내가 선택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렇지만, 아직 여기서 끝이라고 하기에는…!”
“추잡하게 짐이 돼서, 끝을 맺지 않은 채로 질질 끌고 싶지는 않구나.”
랜서스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고개를 높이 들었다.
“한때 끝을 탐구하던 지고한 마법사이자, 흑마법에 타락한 마왕의 졸개여.”
“랜서스… 무의미한 발악이다…!”
리치가 으르렁거렸다. 랜서스가 나를 보고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나는, 그 신호를 놓치지 않았다.
“이 늙은 몸 하나라고 해도, 몇십 년간 고매한 마법들을 써 왔던 몸이네. 이 육신 하나를 바쳐서 네놈을 영면으로 이끌 수만 있다면….”
“크리스, 보호 마법 전개해!!”
그렇게 말하며, 내 오른손 주먹이 리치에게 닿는다. 마법 보호막이 쪼개지고, 다시 새로운 마법 보호막이 생겨난다. 그리고 왼손 주먹으로 또 그걸 파괴한다.
그 사이, 아주 작은 틈. 일반인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간극.
“이득 보는 교환 아니겠나.”
그 찰나에, 마법이 폭발한다.
(?)용사 파티의 일원이자, 마탑의 주인, 대마법사의 칭호를 가진 자, 현자라고 불리는 자.
“스승님…….”
그러나, 그 모든 화려한 칭호보다는 역대 최강의 마법사의 스승이라고 불리는 걸 더 좋아했던 참된 마법사.
크리스 베네피쿠스의 아버지와 다름없는 자.
랜서스 데이몬드, 리치와 전투 중 전사(戰死).
“…아니.”
남자의 뺨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
***
“이래도 라이프 베슬 덕에 안 죽는 건가. 질기군.”
조각조각, 뼈로 분해됐는데도 불구하고 죽지 않은 리치의 갈비뼈를 바라본 뒤 로헨이 발로 그것을 툭 쳤다.
이 정도로 망가져 버린 이상, 순간이동도 못 쓰니 도망칠 수도 없다.
랜서스가 죽음을 각오하고 시전한 마법. 그게 발동하기 전에 도망쳤어야 했지만 이미 마법에 대한 공포는 리치에게 낡을 대로 낡아버린 유물이었다.
그야, 마법이 통할 리가 없으니까, 공격이 통하는 정령사인 로헨만 견제했지, 다른 이들은 그저 피라미로 봤을 뿐이었다.
그러나, 리치는 그 찰나를 눈치채지 못했다.
저 멀리 전장에서 리치와 그 자신의 수하들인 언데드들의 연결이 하나둘씩 끊겨가고 있었다.
섣불리 판단하기는 이르지만, 적은 아마도 리치와 언데드 사이의 연결을 끊는 방법을 찾은 것 같다.
리치와 언데드 사이의 연결은, 리치와 라이프 베슬 사이의 연결과 유사하다. 그런데 그걸 끊을 수 있는 자가 나타났다.
즉, 이제 정말 죽을 날이 가까워졌다는 말이다.
“…….”
이미 죽은 몸이지만 진짜로 죽기 직전이니 주마등이라도 스쳐 지나가는 건지,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최초의 마법사의 유일한 제자.
마탑을 세워 최초의 마법사의 업적을 정리한 자.
인류 최초로 불사를 실현한 자.
마왕군 간부, 흑마법사 리치.
한때는 데이비드 루윈이라 불렸던 젊은 마법사.
그의 첫 기억은,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