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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 잃어버린 정령사-38화 (38/40)

〈 38화 〉 마탑 방어전(4)

* * *

보고를 들은 우리는 황급히 탑루로 올라왔다. 그곳에서 본 리치의 언데드 군단의 규모는 상상 이상이었다.

줄리아의 마수 군단과 같은 군단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그 차이는 어마어마할 정도였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말이다.

“줄리아….”

“으, 응? 아니, 우리도 원래 전성기일 때는 저 정도 했거든?”

“너랑 처음 싸웠을 때도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줄리아가 토라진 듯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너 쟤보다 약하지, 하고 비교하니까 화가 난 듯하다.

그렇지만 그만큼 리치의 세력은 엄청났다. 숲에서 조금씩 몰려나오는데 그 수가 빠르게 불어나서 어느새 평원을 가득 메울 정도가 되었다.

배경이 푸른 초원이어서 그렇지, 어디 협곡이나 마기에 찌들어 버린 평원이었다면 더욱 장엄한 광경이 아니었을까 생각됐다.

“언제 시작할까요.”

“아직, 아직입니다. 최대한 많이 나왔을 때 휩쓸어 버려야 해요.”

벌레들을 모아서 한 번에 해치우는 것처럼, 지금까지 내가 써 본 정령술 중 최대 규모의 기술을 써서 적들의 마법 보호막을 제거한다.

저 정도 규모의 적들을 상대로 그런 대규모 정령술을 몇 번 행하는 건 아무리 나라도 꽤 부담이 된다. 그러니, 예외 없이 전부 한꺼번에 공격 범위 안에 집어넣어야 한다.

“죽이지는 못하지만, 마탑에 가까이 오면 마법으로 밀어낼 수는 있으니 끝까지 버틴 후 정령술로 공격하시는 겁니다.”

크리스도 조금은 긴장된 듯 아까 계획 설명 때도 했던 말을 반복해서 하고 있었다. 아쿠아를 재회한 후 첫 전투다. 나도 조금은 긴장이 됐다.

‘아쿠아, 이제 멀쩡하지?’

《물론이에요. 완전 멀쩡하답니다!》

한편, 다시 계약을 맺고 내 마나를 흡수한 아쿠아는 어느새 건강하게 회복되어 있었다. 사실 이 전투에 중요한 인물은 내가 아니라 아쿠아겠지.

《로헨이 나를 선택했으니, 그 믿음에 보답해야겠죠.》

적을 휩쓸어 버릴 정령으로 이그니스가 아닌 아쿠아를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이그니스의 살상력이 더 높긴 하다. 당연히 물보다는 불이 더 위험할 테니까.

하지만 이 전투에서 적을 처치하는 건 내 역할이 아니었다. 그러니 살상력은 더 낮지만 마나가 적게 들고, 공격 범위가 더 넓은 아쿠아를 이용한 것이다.

물론, 상급 불의 정령의 공격 범위는 굉장히 넓다. 그래봤자 넓은 땅을 불태우는 수준. 한 도시를 집어삼킬 크기의 해일을 일으킬 수 있는 상급 물의 정령과는 차이가 났다. 심지어 주변에 거대한 호수까지. 준비는 완벽했다.

혹자는 상급 정령이 해일 같은 자연재해 수준의 정령술까지 쓸 수 있는 건지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에도 언급했듯이, 상급 정령들 사이에도 개체마다 차이가 크게 났다.

그리고 나와 함께했던 정령들은 대부분 상급 정령 중에서도 최상위, 정령왕에 도전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뭐, 그 적폐 새끼들은 절대 도전 안 받아 주지만.”

도전할 수 있는 수준이라 해도 도전을 받아 줘야 싸움이 성립되는데, 그 정령왕이라는 작자들은 질까 봐 두려워서 절대, 절대 도전을 받아 주지 않았다.

한때는 나도 비겁하다고 욕했지만,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중간에 정령왕의 자리를 빼앗기는 것도 엄청난 굴욕이라고 생각하니 이해는 됐다.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다가 명예퇴직하고 싶다는 거겠지.

정령의 수명이 대체 몇 년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적어도 몇천 년은 되지 않을까?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 정령들이 정령왕이 되는 꼴을 보는 건 진작 포기한 상태였다.

“이제 거의 다 나온 것 같습니다.”

최전방에는 좀비나 스켈레톤 등 하급 언데드가 쏟아져 나왔다. 중반부쯤 되니 듀라한, 구울 등 중급 언데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최후에는 언데드 마법사들, 그리고 리치 본인을 호위하는 언데드 나이트들까지 등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전장의 최후방에서 흑마법사의 정점, 리치가 등장했다.

“삶을 추구해 인간성과 명예를 버린 추악한 자로다.”

뒤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랜서스 님…! 움직이실 수 있는 겁니까?”

“스승님!”

나와 크리스는 동시에 경악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던 노인이 양쪽에 두 명의 마법사의 부축을 받아 힘겹게 몸을 이끌고 탑루로 온 것이다.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말게나. 나도 다 뜻이 있으니.”

크리스의 눈빛이 불안에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 같은 인간인데, 몸도 안 좋은 양반이 저러면 당연히 걱정되겠지. 이해됐다.

“나의 끝을 맺을 장소는, 내가 선택하고 싶구나.”

대마법사 랜서스 데이몬드가 씩 웃었다.

“몇천 년을 살아온 존재다. 어쩌면 ‘끝의 마법’에 가장 가까이 도달한 자일지도 모르지. 그를 처치하며 끝을 맺는다면 실로 위대한 결말일 것이다.”

“끝의 마법….”

크리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마법사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것이 ‘끝의 마법’이다.

세상 모든 마법을 완벽히 이해하고, 마나의 본질을 깨달은 마법사가 볼 수 있는 최후의 마법.

최초의 마법사의 기록 속에만 그런 것이 있다고 나와 있었지, 실제로 이뤄낸 마법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마 저 리치도, 그 끝의 마법을 꿈꿨던 것 아니었을까요.”

크리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때 뛰어난 마법사였을지도 모르는 인간이 저렇게 타락해버린 것에 무언가 느낀 점이 있었던 것 같다.

“정령술을 시전하겠습니다.”

최후방에 적의 핵심인 리치가 등장했다. 그리고 최전방의 졸개 스켈레톤들이 거의 마탑에 도달할 정도로 가까이 와서 마법사들이 밀어내고 있었다.

“부디, 성공하기를 빕니다.”

크리스의 격려를 받은 나는 천천히 계단을 타고 내려와서 1층에 도달했다. 입구에 있던 마법사와 함께 순간이동을 시전해 입구 밖으로 나왔다.

고작 몇십 미터 앞에 수많은 언데드가 있었다. 호수의 중심에 서 있는 마탑. 그 탑 앞에 선 나는 호수 주변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언데드들을 묵묵히 쳐다보고 있었다.

­콰앙! 쾅!

마법사들의 마법이 적중했다. 그러나, 마법 보호막의 효과는 역시 굉장했다. 연기가 걷힌 뒤에 나타난 스켈레톤들의 뼈다귀에는 조금의 흠집도 없었다. 단지 그 충격 때문에 조금 뒤로 밀려났을 뿐.

“아쿠아.”

《모든 생명의 근원은 물. 그러니, 흑마법에 당해 영면을 맞이하지 못하는 불쌍한 자들에게 물을 끼얹어 줘야겠지요.》

“죽어도 죽지 않은 자들에게 안식을.”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은 호수의 한 지점에, 갑작스레 둥근 파형이 생겼다.

시작은 작은 파형이었으나 점점 커졌고, 그 커진 파형은 결국 호수 전체로 퍼져나갔다.

마침내 호수가 진동(??)했다.

호수의 물이 흔들리자, 그 진동을 받은 땅도 미친 듯이 흔들렸다.

물론, 고작 땅이 흔들리기를 바란 게 아니었다.

“온다.”

호수의 모든 물이 그대로 떠올랐다. 마치 세숫대야에 덜어 놓은 물을 손으로 퍼 올린 것처럼, 그대로 떠올라진 물은 해일의 형태로 모습이 변형됐다.

거대한 파도, 끔찍한 해일이 적을 덮친다.

­쏴아아아아아!

이게 물소리인지 싶을 정도로 거대한 굉음이 내 귀를 공격했다. 언데드들에게 귀는 없으니 청각 공격 효과는 없겠지만, 이미 목표는 달성했다.

적들은 해일에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우르르 떠내려갔다.

진형은 엉망이 되었고, 마법 보호막을 깰 정도의 적당한 마나를 담아 공격한 정령술을 마법으로 착각한 적들은 자신이 왜 피해를 입는지도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계획대로 그들의 마법 보호막은 완벽히 파괴되었다. 아마 범위에서 벗어난 극소수의 언데드들이 있긴 하겠지만, 녀석들은 무명 스승님의 몫이다.

그 녀석들을 해치우신 뒤 리치 본인의 마지막을 장식해 주실 것이다.

감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법 보호막이 벗겨진 언데드들은 분명히 당황해하고 있었다. 이럴 줄 몰랐다는 듯이.

“그래, 아예 걱정조차 하지 않았을 테지.”

마법사의 탑을 공격하는데, 마법 보호막을 두른 자신들이 공격당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이게 정령사다, 마법쟁이 놈들아.”

《후후, 정령이 세계를 지배한다!》

《다행이네요. 오랜만에 제정신으로 물을 다뤘는데, 성공적이었어요.》

《원래 언데드 같은 시체 태우는 데는 불이 딱인데….》

마치 자신이 해낸 듯이 기뻐하는 아르마(?)와, 오랜만의 실력 발휘가 만족스러웠던 아쿠아(?), 그리고 끝까지 자신이 나서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이그니스(?). 다들 작전 성공에 흥이 난 모양이다.

“거기 있냐?”

나는 내 뒤에 있는 마탑을 향해, 그리고 수많은 언데드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나를 노려보고 있을 리치를 상상하며 사납게 웃었다.

“이번엔 반드시 죽여 주마, 리치.”

***

“저…인간 년은…무엇인가…?”

한편, 리치는 믿지 못할 상황에 입이…아니, 턱뼈가 떡 벌어져 있었다.

상대는 마법사들뿐, 원군을 요청해 봤자 고작 인간 기사단 수준의 병력이 왔으리라고 생각했다.

신전의 사제들과 성기사들도 고려는 했었지만, 이 막대한 병력, 끝없는 물량 앞에서는 신성력이고 뭐고 견디지 못하리라 여겼다.

“마나…를 이용한 공격인데 먹혔다….”

모든 개체에 마법 보호막이 걸려 있으니,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도 쉽게 뚫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런데 강력하다고는 하지만, 고작 물세례에 그의 군대가 휩쓸리고 있다.

“정령이로군….”

리치는 차분히 생각했다. 이런 마나를 봤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고. 아아, 그래.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정령에게 사랑받는 소년, 로헨. 왜인지 지금은 소녀로 변해 있었지만 말이다. 아마 마왕님이 무슨 짓을 한 것 아닐까, 리치는 그렇게 추측했다.

리치 본인은 정령이 아니기에 느끼지 못했지만, 그의 마나가 정령들에게 일종의 마약과 같은 효과를 끼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떤 정령이라도 그의 계약에 꾀임 당하고, 심지어 정령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다. 먹으면 먹을수록 건강해지고 강해지는 마약이라니.

수천 년을 살아온 리치가 보기에도 그는 역대 최강의 정령사라고 인정할 수 있었다. 그 망할 용사 파티에게 죽은 적만 몇 번인가.

원래 용사 파티는 항상 용사, 성녀, 궁수, 마법사 4명이었지, 정령사가 저 용사 파티에 있는 건 처음이었다.

성검을 든 용사도, 성녀도 위협적이었지만 궁수나 마법사는 리치에게 그렇게 두려운 존재는 아니었다. 특히 마법사는 그의 밥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번에는 마법사가 아니고 정령사인 건지. 비겁하게 마나는 사용하고, 마법 비슷한 것도 쓰면서 정령술이라고 이름 붙이니 보호막을 무시하는 게 말이 되는가.

­아드득.

온몸의 뼈가 우두둑거렸다.

“그래도…병력의 손실은 크지 않으니….”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일까, 그의 수하 중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 개체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을 정도였다. 마치 힘 조절을 한 것처럼….

잠깐, 힘 조절?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리치는 주변을 돌아봤다. 그제야 깨달았다. 언데드들의 마법 보호막이 전부 해제되어 있었다.

“허, 한 방 먹었군….”

정확히 마나를 조절해서 마법 보호막만을 벗겨내는 수준의 공격이었다.

하긴, 이 정도 규모의 공격이라면 살상력을 내기는 힘들 것이다. 아마 보호막만을 벗겨내는 것이 한계일 터.

짙은 마나로 좁은 범위가 아닌, 얕은 마나로 넓은 범위를 타격한 것이었나, 리치는 이제야 정령사의 간악한 술수를 깨달았다.

“간단히…함락할 수 있으리라…생각했는데….”

마법 보호막은 소멸하였고. 판도가 뒤바뀌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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