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마탑 방어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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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리치의 군대가 공격해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탑을 돌아다니며 점검을 했다. 내 정령술이 정확히 먹힌다면 그 후 마법사들의 마법 세례가 쏟아질 텐데, 그 공격이 최대한의 효과를 내도록 준비해야 했다.
“위치를 조금 옆으로 옮기고….”
크리스의 주도하에 마법사들은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마탑을 지키기 위해서 나섰다. 이 마탑에서 연구하던 마법사들도, 소수지만 마탑 밖에서 활동하는 마법사들도 전부 마탑을 지키기 위해 온 것이다.
“마탑은, 마법사들의 영혼과 같은 장소입니다. 자신이 마법을 배운 자라면 누구든 마음속의 고향으로 두고 있는 게 마탑이죠.”
그만큼 마탑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마탑에 있는 마법사라고 다 위대한 건 아니지만, 위대한 마법사는 모두 마탑에서 나왔다는 격언이 있을 정도다.
“최초의 마법사가 죽은 뒤, 그의 업적을 정리하기 위해 그의 제자가 마탑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죠.”
너무나도 오랜 세월이 지나 마탑의 처음에 관한 진실은 남지 않았지만, 최초의 마법사의 제자가 마탑을 만들었다는 게 정론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 제자 마법사는…?”
“네, 그렇게 정리하고 나서는 홀연히 마탑을 떠났습니다.”
정말 순수하게 스승의 업적을 정리하고, 위대한 마법들을 남긴 마탑을 어딘가에 숨긴 후 스스로 마탑을 떠났다. 그 후, 세계에는 마법의 재능을 가진 자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초짜 마법사들 사이에서 이러한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숨겨진 탑에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을 찾아라!’
그렇게 마법사들이 모여 서로 대화도 나누고, 마법을 연구하고 하다 보니 자연스레 마탑은 마법사들의 공간으로 발전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흘러, 모든 마법사의 고향과 같은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크리스, 랜서스 님은 어디 계신 건가요?”
생각해 보니. 마탑에 왔는데도 대마법사 랜서스 데이몬드를 본 적이 없다. 그의 요청으로 국왕이 움직여서 나에게 지원을 부탁한 걸 텐데, 어째서인지 요청을 보낸 랜서스 데이몬드 본인이 나타나지 않았다.
“스승님은…따라오시죠.”
갑자기 크리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딘가 착잡해 보이는 모습이었는데, 늘 실실 웃으면서 농담하던 게 평소 그의 태도여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를 본 지 며칠 안 됐지만, 첫인상과는 다른 인간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변태 금수저 마법사인 줄 알았는데, 사실 흙수저 천재 마법사였다는 걸 알게 된 것만 해도 그랬다. 거기다가 마법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나 마탑 이야기를 할 때면 진지하게 변했다.
물론 변태라는 생각은 아직 변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소신은 있는 인물 같았다.
“사실, 스승님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크리스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나를 마탑의 맨 위층, 뭔가 위엄이 넘치는 거대한 문 앞에 데려왔다. 이곳이 대마법사, 랜서스 데이몬드의 방인가.
전에 그를 봤을 때는 노인이라고는 생각도 되지 않을 만큼 정정했었는데, 상태가 좋지 않다면 아무래도 병이 든 거겠지. 어째서 몸 상태가 나빠진 걸까. 긴장돼서 침을 꿀꺽 삼킨 뒤, 방문을 똑똑, 하고 두드렸다.
“들어오너라.”
들어오라는 허가가 떨어져서 방문의 손잡이를 쥐려고 했으나, 손을 뻗던 중 크리스에게 가로막혔다.
“잠시만요.”
나 대신 크리스가 문의 손잡이를 잡자, 손잡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진이 생겨났다. 자물쇠가 풀리듯이 여러 개의 마법진이 하나씩, 하나씩 해체되더니 마침내 철컥, 하는 소리가 났다.
“보안이 잘 되어 있어서 말이죠.”
철저한 마법 보안에 조금 놀랐지만, 왠지 부끄러워서 놀란 티를 내지는 않았다. 시골에서 막 왕국의 수도 같은 대도시로 상경한 촌놈같이 보일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정령사의 자존심이 있지, 마법 따위에 놀라면 안 된다,
문을 열고 나니 보인 것은, 힘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노인이었다. 하지만 그 푸른 눈에는 총기가 가득해서, 왠지 모르게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한 분야의 정점을 이뤄냈던 자다. 몸은 비루하지만, 그 정신은 소름 돋을 정도로 매서웠다.
“크리스, 어서 오거라. 그리고 그 옆에는….”
노인의 눈이 반짝였다. 무언가, 굉장히 흥미로운 것을 본 것처럼 말이다.
“허, 그 천재 정령사로군.”
대마법사, 현자, 마탑의 주인. 랜서스 데이몬드가 픽, 하고 웃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버거웠던 건지, 콜록, 콜록대며 피가 섞인 기침을 토했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어, 괜찮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가 뱉은 잔기침에 크리스가 화들짝 놀라며 달려들었지만, 랜서스는 별일 아니란 듯이 손을 휙휙 휘저었다. 저 정도 병이라면 치유 마법이라든지, 신관들에게 간호를 받을 만도 해 보이는데 왜 저렇게 있는 건지 의문스러웠다.
“정령사여. 어째서 내가 치료를 받지 않는지 궁금할 테지.”
정확히 내 심리를 꿰뚫은 노인, 역시 살아온 세월이라는 게 있는 건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치료를 받지 않고 마탑에서 나가지도 않는 것인지, 그 대답을 듣고 싶었다.
“네. 어째서…나가지 않으시는 거죠?”
내 질문에 랜서스 데이몬드는 잠시 생각에 잠겨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그 깊고 푸른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눈동자.
“죽음은, 받아들여야 하네.”
랜서스는 한숨을 쉰 뒤 말을 덧붙였다.
“생을 연명하고자 한다면, 할 수 있겠지. 신관들에게 치료를 받고, 온갖 가호와 치유 마법을 받으면서 하루하루를 더 살아가겠지. 하지만 그러면 저 리치가 다루는 언데드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그가 손을 까딱하자, 허공에 푸른색 빛이 모여들어 리치의 형상과 그의 수하인 언데드들이 그림처럼 나타났다.
“결국 그 수단을 다 써가면서도 살고 싶어질 게 분명하고, 그러면 마침내 불사자가 되기 위해 흑마법에까지 손을 대고 말 것 같아 두려워지더군. 그렇게 추하게 살아가고 싶진 않네.”
“그럼, 저 리치도….”
“그래. 원래는 지고한 마법을 연구하던 마법사였겠지. 하지만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변해버린 게야…. 끝은, 끝이기에 가치가 있거늘. 나는, 이왕이면 의미가 있는 끝을 맺고 싶네.”
나는 어째서인지 랜서스의 말을 들으며, 다른 남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인간의 정신이 견디지 못할 만큼의 오랜 세월을 살아와 결국 죽고 싶어 하는 불멸자가 떠올랐다.
“어째서 필멸(必?)은 불멸(?)을 꿈꾸는 것일까….”
노인의 한 마디에 크리스와 나는 정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추하게 살고자 발버둥 친 나머지 흑마법을 써가면서 삶을 연장시킨 리치. 그리고 평범한 삶을 꿈꾸며, 다른 이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는 것이 괴로워져 제발 죽고 싶다고 기원하는 불멸자, 무명.
같은 불사(死), 그러나 그 둘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났다.
“그나저나, 자네는 왜 여성이 된 건가?”
한동안 침묵이 유지되던 방의 분위기를 가장 먼저 깨트린 것은, 랜서스 데이몬드 본인이었다. 내 성별이 변한 것은 지금까지 몰랐을 테니, 당연히 궁금해졌겠지.
“자네 특유의 마나, 정령들이 사족을 못 쓰는 그 마나를 잊을 리가 있겠나. 그런데 어째서 몸이 변한 건지 궁금하군.”
“마왕의 저주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그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내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이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의 몸을 노인이 이리저리 훑어보고, 옆에서는 평범한 성인 남성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얼핏 보면 무척 이상한 장면 같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확실히, 미세하게 마왕의 마나가 보이는군.”
“마왕의 마나라, 그렇다면 역시 마왕의 저주인 걸까요.”
저주가 맞았다면, 어째서 신전에서 푸는 방법을 찾지 못한 걸까. 더욱 혼란이 가중돼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이건…정확히 저주라고 판명하기는 힘들어. 저주에는 ‘악의’가 담겨 있지. 하지만 자네의 성별을 바꾼 데에는…아무런 악의도 없네. 단순히 마법, 그것뿐이지.”
“악의가 없이 이런 짓을…?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는 방법도 있을까요?”
어느 정도 여자의 몸에 적응은 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남자의 몸으로 살아온 세월이 훨씬 더 길었다. 돌아갈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이제 납득하고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도 요즘 들어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돌아가는 방법은…모르겠네. 이건 나조차도 처음 보는 마법이야. 신체 변형이라기보단, 기본적인 인간의 구조를 바꾸는 듯한 마법…믿기지가 않네.”
“…….”
“하지만, 더 믿기지 않는 건….”
랜서스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마치, 기억 속 악몽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저 이게 전부 마왕의 장난일 뿐이라는 거지.”
“장난…?”
“그래. 이 짓거리에는 악의가 없다. 단순히 자네를 바꾸는 게 재밌어 보여서 벌인 짓일 뿐. 그의 시선에는, 정정한 사내를 가녀린 소녀로 변하게 만드는 짓이 꽤 흥미로워 보였나 보군.”
“재밌어 보였다는 거죠….”
쫙 폈던 손을 구겨. 주먹을 꽉 쥐었다. 쥐어진 주먹 안에서 땀이 새어 나왔다. 인간의 구조를 바꾸는 마법이라니, 나의 성별을 바꾸고, 확신은 못 하겠지만 고귀한 엘프 차기 여왕이었던 메리엘을 다크 엘프로 만든 것도…재미 때문인가. 그래, 아리아를 죽인 것도 말이지.
“죽일 겁니다.”
“…뭐라고?”
“마왕, 반드시 죽일 겁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 뺨에는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
“…스승님.”
“응? 무슨 일 있느냐?”
그에게 검을 배운 시간이 길지도 않고, 이제는 검을 주로 쓰지도 않으니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나와 티론을 제자라 생각하는 한 그는 영원히 나의 스승일 것이다.
“…아닙니다. 줄리아는 어디 있죠? 마수들을 보충하러 갔나?”
정령술이 적들을 휩쓴 후, 마법 세례와 함께 마수들을 이용해 적을 공격시킬 중대한 임무를 맡은 그녀다. 마수 조련사라는 이명답게 수천, 수만 마리의 마수를 길들여 날뛰어 준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마수 군단은 아직 힘이 부족하다.
“그런 것 같은데. 듣자 하니 마탑을 공격할 때 전력이 반절이 되고, 엘피디언 아카데미를 공격할 때 또 그 반절이 되었다면서.”
무명 또한 줄리아와 며칠 동안 대화하며 어느 정도 친해졌던 모양이다. 하긴, 마왕에게 악연이 있지 줄리아하고는 아무런 관련도 없으니까.
“설마, 도망칠 일은 없겠지?”
“도망치고 싶어도 못 도망쳐요. 엘프 여왕님께서 선물해 주신 팔찌 덕에 걔는 제 명령을 어기면 큰일 나거든요.”
“큰일이라니, 허.”
사실 나도 무슨 큰 일인지는 몰랐다. 여왕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진짜 큰 일이겠지…죽기밖에 더 하겠나라는 생각이었다.
“안녀엉~다녀왔습니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줄리아가 다른 마법사 한 명과 함께 순간이동을 통해 마탑으로 돌아왔다.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순간이동 해야 하네. 귀찮아~”
“뭐 하다가 온 거야?”
줄리아가 입을 가리고 후후, 웃었다.
“이 근처의 마수들을 깡그리 긁어모았지. 마법사들이 사는 곳이라 별로 없긴 하더라고. 그래도 하늘 나는 녀석들 위주로 구해 왔어!”
“든든하네. 근데 걔네들은 평소에 어디다가 두는 거야?”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다. 아니, 그렇게 많은 마수를 평소에는 어디에다 두고 다니는 거지? 특히 모비 딕 같은 거대한 마수들은 숨겨 두기도 힘들 텐데.
“아하? 간단해. 내 능력은 마수 조련, 그건 알고 있지?”
“당연하지. 아무 마수들이나 조련할 수 있다며.”
“응, 맞아. 그래서 말 그대로 조련된 마수들은 언제 어디에 있는 내 마음대로 소환할 수 있는 거지! 물론 즉시 소환은 안 돼. 몇십 분 정도 걸리거든.”
아하, 그런 거였군. 아무리 그래도 싸우던 도중 갑작스레 마수를 소환해대며 싸운다면 너무 사기지.
어떤 마수든 조련할 수는 있지만 힘들게 찾아다니며 하나하나 조련해야 하고, 갑작스러운 전투에는 약하고 미리 준비해서 침공하는 대규모 전투에 강한 등 그녀의 능력은 장단점이 명확했다.
그렇게 줄리아, 크리스, 무명과 대화를 나누던 중, 가냘파 보이는 여자 마법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시, 시작됐습니다!”
“네? 시작이라면….”
“리치의 군대가, 마탑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단 말입니다!”
저 멀리에서 죽어도 죽지 않는 하나의 거대한 악(?)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곧, 전쟁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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