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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 잃어버린 정령사-34화 (34/40)

〈 34화 〉 깊이, 깊이, 더 깊이

* * *

물의 정령, 아쿠아.

다른 정령만큼 전투력에 큰 도움이 되는 정령은 아니었다. 이그니스가 오만한 아가씨 같은 느낌의 아름다운 소녀라면, 아쿠아는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느낌을 주는 여성체였다.

아르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상급 정령들이라고 다 인간 형태인 건 아닌데, 왠지 내 정령 중에는 인간형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아쿠아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절대 화내지 않았던 걸로 유명했다. 그런 아쿠아가 저런 흉포한 짓을 했다는 건, 아마 이그니스와 같은 발작 증세.

“저 밖의 해일은 정령의 소행입니다. 제가 해치워야 해요.”

“호오, 이분이 소문의 그 정령사…?”

남자가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탑에 박혀서 학문만 파는 마법사들이라 해도 내 명성은 아는 모양이었다.

“네, 갑자기 발생한 저 현상의 이유는 물의 정령 때문입니다.”

“고매한 마법사들이 조사해 봐도 분명히 저건 마법 현상은 아니었습니다. 마법사들뿐이니 정령에 조예가 깊은 자도 없었고요. 로헨 님 덕에 한숨 돌렸네요.”

“제가 나가서 해결하고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그렇다면…부탁드립니다. 저는 게르혼 디그니트라고 합니다.”

자신을 게르혼이라고 소개한 뚱뚱한 마법사는 이 마탑의 중요 인물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런 사안을 직접 판단할 만큼은 권력이 있는 듯했다.

“근데, 나가려면 순간이동으로만 나갈 수 있거든요.”

그 말인즉슨, 나 혼자서가 아닌 마법사 한 명이 동행해야 한다는 것인데.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크리스가 발 벗고 나섰다.

“허, 크리스. 자네 지금 순간이동만 두 번 연속 쓴 것 아닌가? 피곤하지 않아?”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제가 마탑의 잉여 마법사들처럼 보이시나요. 현 마탑주, 대마법사 랜서스 데이몬드의 수제자인 제가?”

“자네 실력은 잘 알지. 무사히 다녀오게.”

“여인 한 명을 지킬 힘은 충분합니다.”

아니, 저게 계속 저러네.

“크리스 씨, 제가 몇 번이고 말하지만….”

“괜찮아요, 로헨 씨. 제가 지켜 드릴게요.”

진지한 눈빛으로 말하는 크리스. 그가 하는 말이 이제는 진심인지 장난인지 모를 지경이라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 제 손을 잡고….”

­파앗!

다시, 마탑 밖으로 순간이동 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잠잠해져 있는 호수의 수면.

“아무것도 없는데요.”

“좀 더 빨리 나왔어야 했나….”

아쿠아도, 아쿠아의 해일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거라.》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화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이그니스가 실체화했다.

“아쿠아, 찾을 수 있는 거야?”

《아마 한 번 발작한 뒤 잠시 지친 것 같구나. 로헨, 너를 느낀 이상 곧 다시 나타나겠지.》

“로헨 씨, 정령이라는 거도 결국 마나를 써서 움직이는 거죠?”

“그렇긴 하죠.”

크리스의 말이 맞았다. 정령이든 뭐든 결국 세계의 에너지인 마나를 사용해 움직인다. 마법에 재능이라고는 없는 일반인이라고 해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미약한 마나를 사용해 움직이니까.

하물며 일반인도 그런데 정령은 어떠하겠는가. 존재 자체가 신비한 정령은 움직이는 데 많은 마나를 소비한다.

계약한 정령은 그 계약자의 마나를 에너지원으로 삼아 움직이지만, 계약 상태가 아닌데 이 세계에 존재하는 정령은 오래 활동하지 못한다. 정령들의 세계인 정령계라면 계약자 없이도 아무 제약 없이 움직일 수 있지만, 그곳은 정령계일 뿐이다. 인간은 정령계에 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제가 감지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네? 감지한다고요?”

크리스가 잔잔한 수면에 천천히 그 손을 갖다 댔다. 그가 미약한 마력을 흘려보내자 호수 전체가 그 마력에 감응해 조금씩 흔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정령은 마나로 움직이는 존재, 그리고 그 마나를 다루며 사용하는 자들이 세계의 진리를 탐구하는 존재인 마법사들이다. 그 마법사 중에서도 나름 상위 수준인 크리스는 아쿠아의 마나를 추적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찾았습니다. 인간 정도 크기의 정령 하나가 호수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잠을 자고 있네요.”

“정말, 정말 무사히 있어 줬던 거구나….”

아쿠아를 다시 만나다니, 재회의 순간이 바로 앞으로 다가오니까 조금씩 긴장되면서도 무척 감격스러웠다. 살짝 과장하자면, 잃어버린 어머니를 다시 만난 느낌이었다. 어머니는 본 적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의문이 하나 생겼다.

크리스도 바로 정령이 호수 속에 잠들어 있다는 걸 알아챘는데, 다른 마법사들은 어째서 찾지 못한 건지 궁금했다.

크리스가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젊은 나이. 나이 많은 대마법사들보다는 부족하지 않을까? 그런데 어떻게 크리스는 이렇게 간단하게 찾은 거지?

크리스에게 그 질문을 하자, 그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제가 제일 뛰어나서 아닐까요?”

“풉, 정말요?”

또 헛소리하는 크리스. 자만심 넘치는 대사를 뱉으면서도 진지해 보이는 표정이 압권이었다. 웃기는 얘기를 하면서도 저렇게 진지할 수 있다니.

“아니면…저희가 찾는 목표가 정령이라는 사실을 제가 인지하고 있어서가 아닐까요?”

“그게 무슨 말이죠?”

“거름망 같은 겁니다. 다른 마법사들은 이 마나가 대체 무엇의 마나인지 확신하지 못했겠죠. 제가 떠나고 나서 갑자기 발생한 현상이면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은 걸 테니까요.”

내 표정이 잘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는지, 크리스가 작게 한숨을 쉬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저 마나가 정령의 것이라고 확신하고 추적하는 저와 저 마나가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추적하는 다른 마법사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죠. 한 마디로 이 현상이 정령 탓인 걸 확인해준 로헨 님 덕분이라 이 말입니다.”

아하, 역시 이번에도 내가 활약한 거구나.

근데 모를 수가 없었다. 물론 나도 그냥 마나를 느끼고서 아, 이건 정령이다, 이건 마법이다 이렇게 파악은 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그니스 덕에 이 주변에 아쿠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호수에서 해일이 닥쳐온다면 그게 무엇 때문이지는 어린아이더라도 추측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함께해온 정령이다. 저런 정보가 없었더라도 나도 내 정령들의 마나를 느끼면 바로 눈치챘을 것 같기도 하다.

“조금씩 약동하네요. 아무래도 정령이 다시 해일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해일이라니, 애초에 성립이 되지 않는 단어다. 호수에서 해일? 대체 무슨 해괴망측한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엄연히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정령은 그 자체로 자연의 은총이면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자연재해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는 존재기 때문이다. 나는 선악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이는 그런 정령에 매력을 느꼈지만, 아마 정령에게 피해를 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

《아쿠아가 깨어나면, 화염 갑옷을 두르고 바로 안으로 돌진하겠다. 계약자가 아쿠아와 이야기해라.》

“이그니스의 화염, 아르마의 갑옷이구나. 알겠어.”

《맡겨라, 계약자! 익사시키지는 않겠다!》

아쿠아가 잠들어 있을 때도 화염 갑옷을 두르고 저 깊은 곳으로 잠수해 그녀를 만나러 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잠들어 있는 정령을 만나봤자 바라보기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억지로 깨운다면 마나가 부족한 상태에서 발작을 일으켜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도 있어서 자제했다.

“하나, 둘, 셋. 지금입니다. 배리어.”

거대한 호수 해일이 저 멀리서부터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토끼를 집어삼키는 호랑이처럼, 쏟아지는 빗물을 마시는 축축한 토지와 같았다.

해일이 다가오는 동시에 나는 아르마의 갑옷을 입고, 이그니스의 화염을 둘러 물로부터 내 몸을 보호해 깊이, 깊이 잠수했다. 그리고 크리스는 잠수하지 않고 그저 해일을 막기 위한 배리어 하나를 펼 뿐이었다.

저걸로 충분하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내 일이 우선이었다. 불 갑옷 덕에 숨을 쉴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왠지 습관적으로 스읍, 해서 숨을 참은 뒤 물로 뛰어들었다.

­첨벙!

호수 속에는 아무런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게르혼 디그니트라는 마법사가 이 호수는 텔레포트 방지 주문을 걸기 위한 용도라고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걸 호수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저 커다란 물통 같은 느낌이었다. 안에 어떠한 생명체도, 어떠한 생태계도 없는데 이걸 호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깊이, 더 깊이 내려갔다. 햇빛이 비치지 않아 점점 내 시야는 칠흑으로 물들어갔다.

《빛의 정령, 윌이 그리워지는군.》

‘나도 그 생각 하고 있었어.’

빛의 상급 정령이라는 녀석이 고작 조명 취급인 건가, 생각하니 살짝 불쌍해졌지만, 어둠 속에 갈 때면 늘 윌이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름 불의 정령, 빛을 낼 수는 있지만 물 속이라 그저 미약할 뿐이지.》

이그니스는 실체화를 해제한 상태였다. 아무리 상급 불의 정령이라고는 하지만 화염이 물에 뛰어든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물론 죽진 않겠지만 그녀에게도 꽤 두려운 일이기 때문에, 대신 실체화를 풀고 내게 화염을 둘러 줬다.

‘저기, 보인다.’

거의 바닥까지 내려오니 드디어 아쿠아가 시야에 보였다. 푸른 머리카락, 푸른 드레스, 마치 유령같이 새하얀 피부의 아름다운 여성의 눈에는 매서운 핏발이 서 있었다.

“아쿠아, 아쿠아!”

하지만 내 말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발작하며 날뛰고 있는 상태, 바로 앞으로 다가가서 그녀의 몸에 손을 대야만 했다.

‘제발, 닿아라. 제발…!’

­툭.

내 손이 그녀에게 닿는 동시에, 나는 그녀에게 마나로 이루어진 계약 제안을 보냈다. 순간, 그녀의 눈에 선 핏발이 사라졌다.

“구해 줘, 로헨.”

괴로워 보이는 표정을 짓는 아쿠아. 그저 계약을 맺기만 한다면 될 줄 알았는데, 정신이 온전치 않은 그녀는 계약 제안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날뛰고 있었다. 물속에서 거센 소용돌이가 나를 덮쳐왔지만, 화염 갑옷 덕에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아쿠아에게 꼭 달라붙었다.

“미안해, 내가 마왕에게 이기지 못해서.”

“구해 줘. 구해 줘. 구해 줘.”

“미안해, 널 이제야 찾아내서.”

“구해 줘. 구해 줘. 구해 줘.”

“다시 한번, 날 믿어 달라고 해도 될까.”

아쿠아는 대화를 나누며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로헨, 로헨, 왜 이제야. 너무 아팠어, 너무 괴로웠어.”

“이젠 괜찮아.”

“고마워, 와줘서. 내가 널 잊었다는 게 너무 괴로워서, 너무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았어.”

“이젠 아무런 일 없을 거야. 편안해질 거야.”

다시 한번, 나와 함께해 줘.

그런 마음을 담아서 계약 제안을 보냈다.

“내가, 널 잊어버렸던 내가 로헨, 너를 다시 만날 자격이 있을까?”

“이그니스도 잊어버렸었는데, 뭘. 기억은 되찾았으면 되는 거야. 지금 내가 너를 되찾는 것처럼.”

“정말, 그래도 되는 거야?”

"물론이지. 몇 번이라도 다시 말해줄 수 있어."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계약, 감사히 받아들일게."

소용돌이가 사그라들었다. 그와 동시에 호수의 수면이 잠잠해지고, 크리스를 덮치고 있던 해일도 한순간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아쿠아가 내 품 안에서 편히 잠들었다.

세 번째 상급 정령이자, 두 번째 재회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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