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 잃어버린 정령사-33화 (33/40)

〈 33화 〉 마탑으로(3)

* * *

크리스가 우리 마을에 도착한 것은 그다음 날 아침이었다.

“누나, 또 가는 거예요?”

“하하, 그렇게 됐어….”

티론과 파헬과도 간단히 재회 겸 작별 인사를 했다.

“넌 참…그렇게 변해도 일 하나밖에 모르는구먼.”

“헤헤, 이번 것도 무사히 다녀올게요.”

한편, 줄리아와 크리스는 서로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마왕군의 간부가, 어디 뻔뻔하게 다시 마탑으로 오려는 거죠.”

“미, 미안하기는 한데…네가 죽인 아이들이 얼마나 되는진 아, 아냐…?”

“하, 먼저 공격해 오고는 지금…!”

크리스 주변의 마나가 막 요동치려 하는 느낌이 들어, 내가 나섰다.

“야! 줄리아, 내가 사과하랬지.”

“그래도…미안.”

주인인 내가 한 마디 하자 그녀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후, 저는 모르겠지만 다른 마법사들이 당신을 반기지는 않을 겁니다. 알아서 잘 숨어다니세요.”

“어? 이해해주는 거야?”

“어느 정도는 납득했습니다. 그녀의 능력은 분명 도움이 될 테니까요.”

크리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득이 된다고 해서 무조건 수용할 만큼 이성적인 사람들이 몇 없거든요.”

“왜죠?”

“뭐, 꼰대들이죠. …근데 생각해 보니 사실 제 집을 공격했던 사람을 포용한다는 게 이상한 걸 수도 있겠네요.”

어쨌거나, 크리스는 줄리아의 존재를 크게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듯했다. 반면 줄리아는 크리스를 볼 때마다 그 작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넌 또 왜 그리 떨고 있어….”

“너, 네 앞에 네 아들딸을 죽인 녀석이 있다고 생각해 봐. 그것도 고래잡이 작살! 이러면서 공격한다니까. 미친놈이 확실해.”

“근데 네가 선공한 거잖아.”

애완동물을 길러본 적은 없어서 그녀의 심정을 잘은 모르겠다.

“네 정령이라고 생각해 보든가.”

“으음…애완동물이 아니라 정령이라 생각하면, 조금 이해는 가네.”

만약 내가 먼저 시비를 걸었더라도, 그 보복으로 상대가 내 정령을 죽인다면…확실히 맨정신을 유지하기는 힘들 것 같다.

이게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방식인가.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네 마수들이 죽인 사람들에게도 가족이 있었을 테고, 너도 그들에게 똑같은 상처를 줬던 거니까.”

진지하게 일갈하자 줄리아도 더는 반박하지 못하고 꼬리를 내렸다.

“그럼 로헨 님, 마수 조련사, 불의 정령. 세 명만 데려가면 되는 겁니까?”

“아니, 한 명이 더 있어요. 아, 정령은 실체화를 풀면 나랑 일체화가 되는 형식이라 사실상 당신을 포함해서 4명인 셈이죠.”

“당신이요?”

“네~”

이상한 말장난을 걸어오려 하는 크리스의 수작을 단칼에 쳐냈다.

줄리아를 생각보다 쉽게 포용해주고 동반 순간이동 하는 데도 우리의 편의를 최대한 봐줘서 그에 대한 평가가 살짝 올라갔지만, 줄리아의 말대로 그는 정상이 아니었다.

여자를 밝히는 색골 마법사.

지금 내 머릿속에서 크리스는 딱 그 정도 이미지였다.

살짝 친절한 면모도 있었고, 관대한 모습도 있었지만 지금 저 모습을 보라.

“이런 시골 마을에 이 정도의 미녀가 있다니, 놀랐습니다. 혹시 저와 함께 마탑으로 가지 않으시렵니까? 같이 식사라도….”

“어, 누구세요…?”

또 마을 여인한테 추파를 던지고 있다. 오늘 아침에 벨크 마을에 왔는데 저러는 게 벌써 세 번째다.

첫 번째, 두 번째 까여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은 칭찬할 만했지만, 그래도 보기에 좀 추한 건 어쩔 수 없다.

“미안해요!”

“아, 흐윽….”

그래도 본인 입으로 ‘내가 귀족인데~’같은 대사는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거까지 하면 진짜 색욕에 미친 저질 귀족 같으니까.

마법사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는 셈인가.

“로헨 님, 잠깐만. 잠깐만 있다가 가도 되겠습니까?”

“네, 네에…스승님도 검을 챙기고 계시니 조금은 더 있어도….”

무명은 워낙에 짐 없는 나그네 느낌이라 바로 출발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생각 외로 챙길 검들이 몇 있는 모양이었다.

개중에는 세기에 남을 명검도 여럿 있다는데…솔직히 나는 잘 모른다.

“계속 도전하실 건가요?”

“도전이라뇨? 아, 음…로헨 님이 저와 단둘이 식사 자리를 가져 주신다면 바로 출발할 준비를 끝내겠습니다.”

“그럼 계속하세요. 근데…귀족 아니세요? 그런 점도 어필하시는 게?”

그가 또다시 나한테 추파를 던지려 해서 칼같이 차단한 다음, 아까부터 궁금했던 점을 물어봤다.

우리 마을 사람들을 비하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귀족이 평민들한테 자신의 신분을 들이밀며 교제를 요구하면 꽤 성공률이 높아질 텐데.

“저는 그런 조건부의 사랑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 네….”

“근데 애초에 저는 귀족이 아닌걸요? 제가 귀족이라는 얘기는 어디의 누구에게 들으셨는지?”

엥? 귀족이 아니었다고?

“마법사가 되려면 돈이 미친 듯이 깨져서 평민들은 아예 입문조차 불가능하다고 들었는데요.”

“아, 그렇긴 하죠. 마법을 배우는 데도 돈이 나가고, 마법서나 마법 도구들을 갖추는 데도 돈. 그리고 마법 학교에 들어간다면 또 매달 돈이 나가죠.”

“네, 그렇게 알고 있거든요.”

크리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대로라면 저 역시 마법사는 꿈도 못 꿨겠죠.”

“그럼, 어떻게?”

그 이후 크리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상당히 놀라웠다.

“저는 어촌의 평범한 고아 소년이었습니다. 작살로 물고기 잡아서 구워 먹는 게 일과였죠. 아니면 어른들 뱃일을 도우던가.”

그래서 작살을 잘 다뤘던 건가. 내가 너클이나 칼에 정령의 힘을 담아 사용하는 것처럼, 크리스는 순수한 마나를 창이나 작살에 둘러 사용한다고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마법사 랜서스 데이몬드 님을 만나게 됐고, 그분은 제게 재능이 있다며 모든 비용을 지원해 주셨습니다.”

랜서스 데이몬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전대의 용사 파티원이자 대륙 최고의 대마법사.

크리스가 나름 대단한 마법사라는 사실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으나, 그 대마법사가 손수 기른 제자라니. 재평가하게 된다.

“다 랜서스 스승님 덕분이죠. 그분 아니었으면 저는 아마 고기잡이배에서 낚싯대를 던지고 있을 겁니다. 아니면 작살을 던지든지요.”

그 분야의 최강자는 역시 인재를 보는 눈도 뛰어난 모양이다.

하긴, 나도 리안나와 루시엘을 보고 저 둘은 크게 될 녀석들이라고 직감했던 걸 보면 나도 나름대로 안목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귀족이 아니었던 거군요….”

“네. 저도 로헨 님이랑 똑같은 평민입니다.”

“풉, 살짝 거부감이 줄어드네요. 어딘가 살짝 이상한 귀족이 재미로 마법사 일을 하는 줄 알았는데.”

솔직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귀족에다가 마법사라는 신분까지 이용해서 여자 막 홀리고 다니는 쓰레기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전부 귀족들만 있는 마법계에서 시골 어촌 출신의 평민 홀로 살아남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저렇게 여자에 미쳐버린 것도 살짝 정상 참작이 되려고 한다.

“그럼, 같은 평민끼리 식사라도?”

“아르마.”

《마법을 허용하지 않는 주먹을 그대에게.》

주먹에 아르마­너클이 씌워졌다.

그나저나, 마법을 튕겨낼 수 있는 기능도 있는 건가.

현재 상황에서 무기에 가장 좋은 효과를 부여해 주는 무기의 정령, 아르마의 가호. 그것이 지금 내게 마법 면역의 효과를 부여해 줬다.

이거, 리치랑 싸울 때 나오면 엄청나게 유용할 것 같은데.

‘나중에 리치랑 싸우게 될 텐데, 그때도 이 효과 나오게 해 줄 수 있어?’

《이 효과가 최고라고 판단되면 그대로 나올 거다. 아르마는 항상 최고의 효과만 부여한다! 계약자의 판단보다 뛰어나니 반박하지 말 것!》

그렇다고 하니, 믿어 줘야겠다.

“어…무기는 넣어 주세요….”

그렇게 크리스와 잡담을 나누다 보니 무명이 우리가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다. 매고 있는 가방에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는지, 그 기다란 검들이 쭉쭉 삐져나오지 않았다.

“오, 나중에 검 소개도 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지. 밤을 새우더라도 얘기해 줄 수 있네.”

“저도 로헨 님과 밤을 새우고 싶네요.”

갑자기 헛소리하며 끼어든 크리스의 발을 구두 뒷굽으로 꾸욱, 찍어 눌렀다.

“아야야, 처음 뵙습니다. 마탑의 마법사이자 이번 여정의 안내인, 크리스 베네피쿠스라고 합니다.”

“마탑의 마법사라, 오랜만이군.”

둘 다 확실한 강자답게 서로의 강함을 바로 알아본 듯했다. 무명은 마법이라고는 전혀 쓰지 못하지만, 그냥 칼로 마법을 벨 수 있는 괴물이다. 여태껏 살아오며 랜서스 같은 대마법사도 여럿 만나봤을 테고.

크리스 역시 어느 정도 경지가 있는 자, 무명의 주변에 흘러넘치는 강력한 기운으로 인해서 그가 엄청난 강자라는 사실은 바로 눈치챈 듯하다.

“이그니스는 아까 실체화를 해제시켜 놓았고, 줄리아, 무명, 저까지 다 모였습니다. 출발하시죠.”

내가 크리스의 왼손을 잡고, 줄리아가 크리스의 오른손을 잡고, 무명이 크리스의 등에 손을 댔다.

그가 눈을 감고 집중하자, 우리 주변의 마나가 소용돌이쳤다.

《잊지 마라, 로헨. 아쿠아를 먼저 찾아야 한다.》

‘물론이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내 기억이 돌아온 걸 보면 다들 기억은 돌아왔을 게다. 하지만 계약 전의 나처럼 뜻하지 않게 주변에 피해를 주고 있을 수도 있어.》

이그니스가 발작하며 주변에 고열의 화염을 분출하던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클레이(?)는 지진을, 진(風)은 폭풍을, 아쿠아(?)는 홍수를 일으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왕에게 패배한 것도 슬프고, 정령들과 이별시킨 것도 열받는데 게다가 자연재해까지 일어나게 된다니.

《다들 기억이 돌아왔다 하더라도 몸과 정신 둘 다 온전치 않겠지. 빨리 녀석들을 만나 재계약을 맺어야 하느니라.》

‘일단 아쿠아부터 만나러 가 보자.’

물론 확신도, 증거도 없는 추측이지만. 아쿠아와 계약을 완료한 뒤 이그니스가 또 다른 정령을 감지하고, 아쿠아 역시 또 다른 정령을 감지하고…그렇게 계속 배로 늘어난다면?

나의 정령들을 다 되찾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파앗!

* * *

짹짹,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주위를 둘러보니, 드넓은 평원이 보인다. 더 먼 곳을 보니 빽빽하게 우거진 숲들이 보이지만, 그 전에 다른 건축물 하나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탑.”

평원 중심에 뻥 뚫린 거대한 호수, 그리고 그 연못 중간에 거대한 탑이 위치하고 있었다.

다시 보니 거대한 호수 정도가 아니었다. 바다와 호수 그 사이 어딘가…?

“탑이 크긴 한데….”

“마법사들의 본진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고요? 들어가 보면 알게 될 겁니다.”

이 호수를 어떻게 지나가나 고민하고 있을 때, 크리스가 우리 모두에게 마법을 걸어 주었다.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되는 마법입니다.”

“우와, 신기하다.”

줄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래대로라면 풍덩 빠졌어야 했을 텐데,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물 위를 걸어 호수의 중심에 위치한 마탑으로 향하는 크리스의 자태는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빨리 오거라.”

당황하는 나와 줄리아와는 달리, 무명은 아주 태연하게 수면 위를 걸어 지나갔다. 왠지 그라면 마법 없이도 사뿐하게 지나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크리스가 장난을 쳐 갑자기 빠지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발걸음의 속도를 올렸다.

그런데,

“문이 없는데요?”

호수를 건너 도달한 마탑에는 문 같은 것은 없었다.

“여기서 다시 순간이동을 해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럼 처음부터 마탑 안으로 순간이동을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들어가는 과정이 여간 복잡해야 말이죠. 지금 소통 중이니 조금만 기다리면 순간이동이 허가될 겁니다.”

하긴, 누구나 마탑 안으로 순간이동할 수 있다면 진작 리치는 순간이동해서 마탑 안으로 들어간 뒤 마탑을 점령했을 것이다.

“네? 엥?”

아무래도 뭔가 일이 잘 안 풀리는 것 같다.

“호수요? 괜찮냐고요? 이상한 게 있다뇨?”

나는 슬쩍 눈을 돌려 호수를 쳐다봤다. 수면은 조용하다 못해 고요할 정도로 잔잔했다. 연못이 괜찮냐는 걸까? 아니면 우리가 괜찮냐는 걸까?

“어, 어어?”

줄리아의 목에서 비명과 비슷한 이상한 목소리가 나왔다.

“야, 크리스. 빨리 들어가자?”

“잠시만요. 보채지 좀 말고. 아, 됐다!”

줄리아는 대체 뭘 보고 저러는 건가, 하고 몸을 90도 돌려 줄리아가 바라보고 있는 쪽을 쳐다봤다.

“…저게 뭐야.”

호수에서, 해일이 일었다.

《계약자!》

“오자마자 만나다니. 찾을 수고를 덜었네. 스승님, 저 해일은 베지 말아요!”

《아쿠아가 온다!》

“홍수가 아니라 해일이었구나,”

주변에 다가오는 물조차 순식간에 증발시킬 수 있는 이그니스의 화염을 두르고, 해일을 향해 곧바로 돌진할 준비를 마친 순간.

“완료, 제 손을 잡으세요! 다시 순간이동합니다!”

“어, 잠깐?!”

­파앗.

크리스가 왼손으로 내 목덜미를 잡았고, 눈 깜빡하는 순간 나는 마탑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우와.”

근데, 이게 무슨 탑이야.

밖에서 보기에도 거대한 탑이긴 했지만, 그 내부는 상상 이상이었다. 대충 눈대중으로 봐도 밖에서 본 것의 몇백 배는 되어 보이는 크기.

“환영합니다. 마탑에 오신 여러분.”

크리스 베네피쿠스가 허리를 숙여 공손하게 환영 인사를 했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키가 작고 뚱뚱한 남자 마법사 한 명이 급히 달려왔다.

“허억, 허억. 크리스, 괜찮냐?”

“네. 들어오기 직전, 해일이 저희를 덮쳐왔지만 간신히 무사하게 입장했습니다.”

“으음, 손님 분들. 반갑습니다. 그게 말이죠, 저 호수가 어떻게 된 거냐면….”

그 뚱뚱한 마법사가 천천히 사정을 털어놓았다.

“원래 저 호수 주변에는 텔레포트 방해 주문이 걸려 있어서, 안 그래도 숨겨져 있는 마탑을 더욱 꼭꼭 숨겨 주죠.”

“그런데 해일은 왜 갑자기 일어난 거죠?”

크리스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모르는 듯했다.

“네가 떠나고 몇 분 뒤, 갑자기 연못에서 소용돌이가 치면서 별일이 다 생기더군. 그러다가 몇 시간 뒤에는 해일이, 그리고 너희가 온 방금 또 해일이 덮친 거다.”

“음, 로헨 님이 덮쳐질 뻔했다니….”

마법사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나는 저 해일을 일으킨 것이 정령이라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다.

그리고 내 정령 아쿠아가 계속 저기 있는 것도 아니고 일정 시간마다 나타나는 거라면, 지금 당장 나가 봐야 한다.

또 이상한 농담을 하려 드는 크리스의 입을 막은 뒤 말을 꺼냈다.

“저, 내보내 줘요.”

“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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