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 잃어버린 정령사-32화 (32/40)

〈 32화 〉 마탑으로(2)

* * *

왕궁을 나와 이그니스, 그리고 줄리아와 재회한 나는 마차를 타고 달려 벨크 마을에 도착했다.

이동하는 도중, 국왕님한테 들은 이야기와 마법사 크리스 베네피쿠스에 관한 이야기를 다 전달했더니, 줄리아가 과한 반응을 보였다.

“마법사? 어떻게 생긴 마법사?”

“은발 머리카락에다가, 귀족 티 나게 생겼고…진짜 귀족인지는 모르는데, 마법사니까 아마 귀족일 거야.”

“서, 설마…?”

갑자기 몸을 웅크리고 벌벌 떠는 줄리아.

“전에 내가 마탑을 공격했었는데, 거기 이상한 마법사가 하나 있었거든.”

“…….”

“불 속성 마법도, 전기 속성 마법도 아닌데 작살에 마나를 씌워서 고래잡이 작살이다~ 이러면서 던지더라.”

“그래서?”

“그거에 내 모비딕이 죽어버렸어….”

이건 좀 큰일이다.

크리스의 고향인 마탑을 공격했던 줄리아. 크리스가 그런 줄리아를 알아본다면 결코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 걔 만나면 일단 무조건 사과해라.”

“으으….”

“그래도 그리 감정적인 타입 같지는 않았으니 별로 신경 안 쓸 수도 있어. 일단 사과하고, 네가 리치로부터 마탑을 지킬 때 최대한 도움이 된다고 어필해야 해.”

적의 적은 아군이라 했다. 마수 조련사가 한때 적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녀 역시 지금 우리의 적 리치를 적대한다.

그렇다면 마수 조련사와 동맹을 맺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렇게 설득한다면 혹시 모른다. 하여튼 데리고 가기에 귀찮은 점이 참 많은 녀석이다. 쉽게 가는 날이 없네.

“알았어….”

《아쿠아의 기억이 돌아왔다면 재계약을 맺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다. 리치가 총공격을 감행하기 전에 빨리 아쿠아를 찾는 걸 우선으로 하지.》

사실, 국왕님이 부탁한 장소가 마탑이었다는 건 엄청난 우연이었다.

“마탑 근처에 아쿠아가 있는 것 같다고 예감했었지.”

그렇지만 마탑은 아무리 나라도 쉽게 진입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마법사들에게만 허락된 장소라서, 비(?) 마법사들은 그곳을 찾아가기도 쉽지 않다.

“운이 좋았네.”

그런데 지금 마탑은 리치와 언데드 군대의 위협을 받고 있다. 그 덕을 봤다고 해야 할까, 다행히도 큰 어려움 없이 아쿠아와 만날 수 있게 됐다.

“다들 기다리고 있어. 꼭 다시 찾아낼 테니까.”

* * *

­똑, 똑.

벨크 마을에 도착한 우리는 다른 곳에 들르지 않고 바로 무명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내가 엘피디언 아카데미에서 돌아왔을 때, 마왕을 토벌하러 가는 여정에 합류할지 말지를 결정해서 말해 준다고 했던 무명.

불로불사의 불멸자. 검술 하나만 보면 내가 아는 전 세계의 인간 중 가장 뛰어나다고 해도 무방했다.

물론 용사의 검술도 뛰어났지만, 아무래도 1000년 동안 수련한 검사의 검술 실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용사는 성검 보유자니, 전체적인 전투력은 둘이 비슷할 것이다.

그런 남자가 마왕을 토벌하는 데 합류하고, 만약 용사까지 깨어난다면 정말 모른다. 가능성이 보인다.

“들어오시게.”

노크하니 무명이 바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다행히 어디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오두막 안에 있었던 모양이다.

­끼익.

“오랜만이구나.”

“그러게요, 스승님.”

“…뒤에 모르는 아이들이 늘어난 것 같구나.”

내 뒤에는 이그니스와 줄리아가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스승님과는 초면이었다.

“자, 인사해. 이쪽은 내 검술 스승님 무명. 이 쪽은 제 정령인 이그니스, 그리고 새로 얻은 노예 줄리아라고 해요.”

“노예?!”

“노예 맞잖아.”

“히잉….”

별로 관심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명은 은근히 내 새로운 동료들에게 관심이 많은 듯했다.

“자네는 정령인가? 오, 인간형 모습이 이렇게 아리따운 정령은 처음 보는군….”

《일반 인간이 소녀같이 뛰어난 상급 정령을 본 적 있다는 듯이 말하는군.》

“본 적은 있지. 베어 본 적도 있고.”

《뭐라…!》

당황하는 이그니스를 무명으로부터 떼어 내니, 그는 이제 줄리아한테 달라붙었다.

“자네는 평범한 인간 같은데, 무슨 능력이 있기에 로헨의 동료가 되었지?”

“나, 귀여운 짐승들을 다룰 수 있어!”

보다 못한 내가 끼어들었다.

“전(?) 마왕군 간부, 마수 조련사에요. 이름이 없어서 제가 줄리아라고 이름 붙여주었죠. 저지른 죄가 있어서 제 노예로 삼았어요.”

“하하, 그 마왕의 수하였던 게로군.”

줄리아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이제 아니거든! 계속 과거 얘기하지 말아 줄래?”

“그럼 네가 내 노예가 된 합당한 이유도 못 말하는걸….”

마왕군 간부라는 말 때문일까, 무명은 줄리아에게 질문할 것이 많은 듯했다.

“마왕군 간부라, 최근에 자격을 얻었던 모양이지?”

“최근이라뇨, 저 지금 20살이니까, 7년 전부터 이 일 했는데요….”

“7년 전이면 최근이지.”

영생을 사는 불멸자, 대략 1,000살쯤 되는 인간이라면 7년 전을 최근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음, 과거 일을 캐묻지는 않겠네. 이제는 다 같은 동료니까.”

맞는 말이다. 과거를 없던 일로 할 수는 있지만, 앞으로 그만큼 더 빡빡하게 굴리면 된다. 내 노예니까.

그런데, 이제는 다 같은 동료라고?

“동료라면…제 제안을 승낙하시는 겁니까?”

“물론이지.”

품위 있게 생긴 중년의 남자가 씩 웃었다.

* * *

“사실 고민을 많이 했네.”

“이해합니다.”

“자네에게 얘기했던 것도 있지만, 사실 내가 마왕을 따라가지 않은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어.”

이건 뜻밖이었다. 과거에 있었던 그 마을 몰살 사건, 그리고 저주 이외에도 마왕을 두려워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지금 당장 말할 수는 없지만, 때가 되면 얘기해 주겠네.”

“항상 신비주의를 고집하시네요….”

그러고 보니 저번에 이야기하던 중, 갑자기 중간에 맥락이 끊겼을 때가 있었다.

평온하게 살던 어느 날, 갑자기 마왕을 재회해 저주를 받았다고 했었나.

아마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고, 그 일에 관한 이야기를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

물론 급한 일은 아니니 억지로 물어보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 갑자기 마음을 돌리신 이유에 대해서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살아온 그 오랜 세월 동안, 내게 소중한 인간의 죽음을 얼마나 많이 봐 왔다고 생각하는가?”

“…….”

고작 20년 정도밖에 살지 않은 나는, 절대 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을 보았고, 나의 귀여운 아이들이 흰 머리 노인이 돼서 늙어 죽는 모습을 보았고, 길렀던 제자들 또한 이미 다 숨을 거두고 흙으로 돌아갔지.”

“…….”

“그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인간들과 엘프들의 죽음까지 보았어. 엘프들은 오래 살아서 그나마 통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들 또한 숲의 거름으로 돌아가 버렸지.”

“설마….”

무명이 하려는 말을, 나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나는 죽고 싶다.”

필멸자는 불멸자가 되기를 원한다.

불멸자 역시, 필멸자가 되기를 원한다.

“나는 신이 아니네. 그렇게 오래 산다는 드래곤도, 엘프도 아니야. 그저 인간일 뿐.”

“…….”

“그런데도 천 년이란 세월을 살아왔지. 그러나 내 정신은 분명히 인간일세. 인간의 정신은 그렇게 오랜 세월을 견디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아.”

무명이 웃었다.

처음 그를 봤을 때부터, 그의 얼굴에는 어딘가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끔찍할 정도로 긴 세월을 보내온 무명만이 지닌 고충이었을 것이다.

“너무나도 오랜 세월이었어. 조금만 방심했더라면 미쳐 버릴 만큼. 그러니…평범한 인간으로서 마지막을 맞고 싶군.”

“그래서, 마왕을 없애려는 겁니까.”

“그렇지.”

그의 표정은 이제 어둡지 않았다.

마치 오랜 고민을 끝낸 것처럼, 상쾌해 보이기도 했다.

“마왕이 내게 저주를 걸었으니, 나의 마지막은 분명 마왕 앞일 것이야. 자네도 저주를 풀고 싶어 하지 않나. 비슷한 거지.”

“저는…스승님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제가 위로하고자 하는 말이, 스승님에겐 어쭙잖은 애송이가 막 던져 대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럴 리 없으니, 편하게 말하거라.”

“다행이군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전했다.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했던 생각이었다.

“감사합니다.”

“……?”

“엘프 도서관에 스승님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는 책들을 읽었습니다. 그 모험담들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저도 손에 땀을 쥐게 할 만큼 긴장되었죠.”

“호오, 그게 엘프 도서관에 꽂혀 있었나.”

“네. 아마 스승님이 없었더라면, 이 나라, 아니…이 세계는 마왕에 의해서는커녕, 그 전에 다른 이들에 의해서 몇 번은 더 멸망했을 겁니다.”

대악마, 드래곤, 창공의 고래, 전쟁 등등….

그가 해치운 역사 속 재앙들만 해도 이미 그를 영웅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약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돌아다녔다. 그 증거로, 이런 시골 마을에서 용병 일을 하며 마을을 지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마 무명이 우리 마을에 오지 않았다면, 그 네크로맨서가 나의 고향을 이미 쑥대밭으로 만들었겠지.

“감사하다는 말씀을…드리고 싶습니다.”

“…….”

“그리고, 수고하셨습니다.”

그의 천 년이라는 세월을 보상해 줄 수는 없다.

그럼 하다못해 편안한 마지막을, 위대한 결말을.

마왕의 시작을 본 그가, 마왕의 끝을 낼 수 있도록.

“같이 가시죠.”

“물론.”

무명이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이런 이야기는 부끄러워서 하지 않으려 했지만 말이지.”

“……?”

“천년의 세월을 살았다고 해도, 죽음을 간절히 바랐다고는 해도, 막상 제 손으로 죽음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자니 숨이 막혀오더군.”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까?”

“그렇지. 근데 더 두려운 광경을 떠올려 보니, 그게 낫겠더라고.”

잠시 정적이 있었다.

“더 두려운 광경이라면?”

“…오랜만에 들인 제자들이, 나보다 먼저 죽는 모습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서 말이지.”

모험가의 아들, 벨크 마을의 소년 티론.

그리고 나.

우리 둘은 잠깐이었지만 무명의 검술 교실 제자였다.

“내가 마왕을 처치하기 위해 떠나는 여정을 거부했을 때, 너희들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두려웠다.”

그것이 무명의 진심이었다.

나와 티론, 아주 짧은 기간 동안 가르친 그의 마지막 제자들을 위해.

그는 죽음으로 가는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다.

다시는 후회하고 싶지 않았던 불사신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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