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폭풍전야(3)
* * *
“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참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남자는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사과했다.
“이게 무슨…?”
대놓고 배 째라는 듯이 나왔으면 아르마를 소환해 아르마너클 끼고 한 대 패주기라도 하지, 갑자기 정중하게 나오니까 당황스러워서 할 말이 없었다.
‘그냥 넘어가야 하나?’
오히려 내가 과민 반응한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나는 남자잖아? 뭐 남자끼리 이 정도야….
아니, 아무리 같은 남자라도 첫 만남에 이러는 건 미친 거 맞지 않아?
순간 내 상식이 뒤집힐 뻔했다. 이 남자, 마법사 같아 보이긴 했는데 그 순간 내게 정신 공격 마법이라도 한 걸까 의심스러웠다.
“으음….”
그 와중에 남자는 고개를 숙인 수준이 아니라 허리까지 굽혀 온 힘을 다해 사죄하고 있었다.
상당한 고단수다. 자신이 먼저 잘못해 놓고 저런 저자세를 취하면 마치 내가 나쁜 놈이 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어떤 벌이라도 곱게 받겠습니다!”
“그래요? 듣던 중 반가운 얘기네요. 실프(風)!”
휘익!
평온하던 왕궁 복도, 알현실 앞에 갑작스러운 강풍이 몰아쳤고, 마법사 로브를 입은 남자는 맥도 못 추린 채로 정령의 바람에 휩쓸렸다.
쾅! 쾅! 쾅!
바닥에 한 3번 정도 그 몸뚱이를 내리치고 나서야 화가 좀 풀렸다. 이렇게 직접 혼내주는 게 효과가 최고다.
“콜록! 먼지가…그럼 이제 동률이네요.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러나,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몇 번이고 바닥에 내던져진 남자의 의복은 한 치의 티끌도 없이 깔끔했다. 또한 몸에 어디 상처가 난 곳도, 뼈가 부러진 듯한 모습도 없었다.
“보호막을 두르고 있던 거냐?”
존댓말을 그만뒀다. 어차피 앞으로 볼 일도 없는 인간이고, 게다가 방금 굉장히 기분 나쁜 무언가를 포착했기 때문이다.
아까 고개를 숙이고, 또 허리를 굽혀 사과할 때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었지만 지금은 그의 표정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아마 처음부터 진심 따위는 전혀 없이 쭉 저런 표정이었겠지.
그 웃는 모습이 왠지 능글맞아서 보기가 싫어졌다.
“마법사, 크리스 베네피쿠스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뭘 앞으로 잘 부탁해. 이제 볼 일도 없을 텐데.”
나는 악수를 청하며 손을 건네는 남자를 무시하고 알현실 안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볼 일 없는데, 왜 마지막에 자기소개를 하는 건지.
* * *
“정령사 로헨, 폐하를 뵙습니다.”
“쿨럭! 오랜만일세. 그런데 그 저주는 아직 낫지 않았구먼?”
“그게…그렇게 됐습니다.”
신전의 저주 해제 시도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엘프들의 고대 문헌들에도 이 저주를 푸는 방법이 나와 있지 않았다.
방법은 오직 마왕만이 알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추측했지만 전제 조건이 마왕을 쓰러트려야 한다니, 난이도가 너무나도 높았다.
“뭐, 자세히 물어보진 않겠네. 본론부터 바로 들어가지.”
“네. 어쩐 일로 부르신 건지…?”
“자네의 은퇴 요청, 제대로 기억하고 있고 또 그 뜻을 존중하네. 하지만 그럼에도 부탁할 게 있어.”
“…….”
예상대로였다. 은퇴 번복 요구.
“다시 전장으로 돌아와 줄 수는 없겠나?”
“그 끔찍한 전장으로 말입니까?”
“…알고 있네. 정령사 로헨, 지금까지 자네가 이뤄낸 업적들만 해도 역사에 남기에는 충분할 정도지.”
“부끄럽습니다.”
“아니. 부정하지 말게나. 그대는 이미 국가의 모든 지원을 받으며 편한 은퇴 생활을 즐길 자격이 있어. 이런 부탁을 하는 내가 미안할 정도지.”
뭐, 사실 처음부터 수락하려고 했지만 한 번 튕겨 봤더니 국왕 하워드가 좀 놀라울 정도로 저자세로 나와서 살짝 당황스러웠다.
“고귀한 국왕님이 그렇게 나오시면 제가 다 민망해집니다.”
“허허, 그렇지. 사실 자네가 엘프 마을, 엘피디언 아카데미에서 벌인 활약을 이미 들어 두긴 했다네.”
교활한 늙은이.
그에 대한 평가가 세계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평민 정령사에게도 고개를 숙이는 고귀한 국왕에서 교활한 늙은이로 바뀌는 데에는 채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엘피디언 아카데미에서 내가 마왕군 간부를 처치했다는 소식은 생각 외로 빨리 퍼져나간 모양이었다. 오는 길에 신문을 정독했는데, 벌써 내가 마왕군 간부 중 한 명을 처치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다행히 내 성별이 여자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빠져 있었다. 아마 여왕님 쪽에서 로헨에게 도움을 받았다, 정도로만 얘기한 게 아닐까.
선생님들과 엘프 기사들 몇몇은 알게 되었겠지만, 그들은 다 엘프 여왕에게 충성을 바친 존재들이다. 여왕님이 허락하지 않는 한 절대 퍼뜨리고 다니지 않겠지.
그런데 아무래도 최전선에서 용사 파티가 빠진 탓일까, 한동안 좋은 소식이 없었던 판국에 내가 마왕군 간부를 잡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니 다들 열광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용사 파티가 패배해서 나 말고는 전부 전투 불능이라는 사실은 대외적으로 공개되진 않았다. 그렇지만 최전선 상황이 매우 힘들다는 건 다들 눈치채고 있는 듯했다.
“최전선으로 지원 가야 하는 건가요?”
“아니, 아닐세. 최전선도 물론 힘들긴 하지만 아직은 버틸 만하고… 문제는 다른 곳이지.”
“어디죠?”
“숨겨진 장소, 마탑.”
마법사들의 숨겨진 탑, 마탑.
주기적으로 대륙 어딘가에 입구가 나타나는데, 입구 주변에 온갖 은신 마법과 보호 마법을 다 걸어놔서 평범한 인간은 접근조차 못 하는 그곳.
그곳이 위험에 빠졌다는 말인가?
“제가 알기로는, 대륙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가 마탑이 아닌지…?”
“맞네. 어떻게 보면 이 왕궁보다 훨씬 안전한 장소지. 하지만 최근, 마탑 근처에 언데드들이 나타난다고 하네.”
“언데드라면….”
마왕군 간부, 리치.
그가 마탑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줄리아가 말했었지.’
『리치 녀석은 내가 실패한 임무에 대신 발령받고 나를 비웃고!』
혹시 원래 마탑을 점령하는 임무는 마수 조련사, 줄리아의 소관이었지만 그녀가 실패해 그 자리를 리치가 대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마탑에서의 패배 때문에 마수 조련사의 세력이 약화됐고, 그 영향이 엘피디언 아카데미 점령의 실패로 이어졌다. 그렇게 생각하면 전부 들어맞는다.
줄리아에게 그 전에 무슨 임무를 맡았길래 그렇게 처참하게 당한 건지 물어봐도 이를 악물고 말해 주지 않던데, 마탑이었구나.
* * *
한편 이그니스와 줄리아는 수도 밖 초원에서 잠시 정차해, 왕궁으로 떠난 로헨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말할 수 있겠냐고…애지중지 기른 마수들이 고래잡이 작살! 이러는 정신병자 마법사한테 당했다는 걸…나름 마왕군 간부였는데…자존심 다 부서지게….”
줄리아는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고래를 그리면서 궁상떨고 있었다.
《뭐라는 게냐? 혼잣말이 많구나, 마왕의 딸.》
“그런 게 있어….”
* * *
“언데드를 일으키는 네크로맨서이자, 대륙 최강의 흑마법사. 그 고대 리치가 마탑을 공격하려 하는 것으로 보이네만.”
“동의합니다. 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그 녀석이 제격일 테죠.”
마법사를 제일 잘 아는 건 마법사다.
그 자신이 마법사였기에, 마법사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오랜 세월에 걸쳐 보완한 결과가 지금의 리치다.
‘뭐, 우리 파티에는 마법사가 없어서 리치 녀석을 상대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지만.’
물론 리치는 강하다. 우리 용사 파티가 녀석을 쉽게 상대한 것은 상성의 이점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가 마탑을 발견해냈다면 그건 정말 큰 위기였다. 그 자신뿐만이 아니라 언데드들에게도 마법 면역을 칭칭 두르고 있는 녀석이 마탑을 공략하기 시작한다니.
“그건 확실히 문제네요.”
“그래서 자네에게 도움을 요청한 거네.”
“일반적인 기사나 병사들은 녀석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많은 언데드들에게 저지당할 것이고, 마법사들의 공격은 거의 통하지도 않는다면….”
“그래. 그래서 정령술이 필요한 거라네.”
정령술도 유사 마법이기는 하다. 그래서 전에 마왕과 마주했을 때 내 정령술은 마왕의 완벽한 마법 보호막에 막혀버렸다.
하지만, 리치의 마법 보호막은 살짝 엉성했다. 정확히 ‘마법’이라고 사람들이 부르는 마법에 한해서만 방어가 가능했고, 왜인지 내 정령술은 막히지 않았다.
특히 불의 정령 이그니스와 빛의 정령 윌을 이용한 공격은 녀석들에게 매우 효과적이었다.
“용사가 깨어난다면 그 성검이 제일 효과적일 테지만…지금은 믿을 인간이 자네밖에 없네.”
“하지만 리치는 죽더라도 그 망할 놈의 라이프 베슬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제가 평생 마탑을 지킬 수도 없고, 계속해서 도전해 온다면 분명 언젠가는….”
그 순간, 나는 무언가 가능성을 떠올렸다.
‘무명 스승님이라면?’
그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검을 휘둘러 언데드와 네크로맨서 사이의 연결을 끊어버렸다.
그 개념 자체를 베어버리는 검술이라면, 혹시 리치와 라이프 베슬의 연결도 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 상대는 이미 죽어 버린 언데드들. 마왕도 아닌 그저 마왕군 간부라면 그가 거절할 이유도 없다.
무명 스승님이 상대하기에 그야말로 제격이었다.
“그건…확실히 맞지만, 일단 지금은 시간 벌기라도 해야….”
“아닙니다.”
“……?”
“제가 묘수를 떠올렸어요. 리치를 완전히 죽이고, 마탑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무, 무엇인가? 그 방법이?!”
무명, 그를 부른다.
“일단 저희 고향에 들렀다 가야겠습니다.”
숨어 사는 게 좋다는 변태 같은 인간이니, 국왕님께는 그에 대한 이야기는 비밀로 해야겠다.
“자네를 믿네. 믿고 있으니 그 방법을 자세히 물어보진 않겠네.”
“감사합니다.”
“아, 중요한 걸 깜빡했구먼.”
국왕이 내게 한 장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이 편지는?”
“대마법사, 랜서스 데이몬드가 보낸 편지네.”
“랜서스 데이몬드…!”
내 이전 대의 용사 파티의 마법사 역할을 맡았던 인간이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몇 번 봤을 때 그 인간성이 굉장히 좋다고 생각해서 내 기억 속에는 호감으로 남아 있었다.
“편지에 적힌 내용은 아까 이야기를 나누며 다 전달했으나, 한 가지 추가할 것이 있네.”
“무엇이죠?”
“그 편지를 전달한 마법사, 크리스 베네피쿠스가 자네를 숨겨진 마탑으로 데려가 줄 걸세.”
“크리스 베네피쿠스?”
『마법사, 크리스 베네피쿠스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설마, 아까 그놈?
금발 머리 벽안의 남자 마법사?
내 엉덩이를 만지고 오히려 나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갈 뻔한 그 쓰레기?
그 새끼가 나를 안내한다고?
“그는 대마법사 랜서스 데이몬드의 수제자네. 항간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미 자신의 스승을 능가했다는 말도 있지.”
“…….”
“마탑에서 철저히 숨긴 채로 키우다가 최근에 공개한 마법사라는군. 성격이나 그 외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밀에 싸여 있었어. 편지를 전달하러 온 게 그여서 나는 얼굴을 알고 있네만.”
“말도 안 돼….”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그 충만한 재능은 뭇 마법계의 미래라고 칭송받는… 엥? 왜 그러나?”
“……아닙니다.”
동,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아, 참. 안 그래도 방금 알현실에서 나갔는데. 혹시 만나진 못했나? 금발에다가 푸른 눈동자를 지닌 소년이고, 마법사 문양이 새겨진 로브를 입고 있네.”
“…….”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