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 잃어버린 정령사-29화 (29/40)

〈 29화 〉 폭풍전야(2)

* * *

“하아….”

트리어 왕국의 늙은 왕, 하워드 폰 트리어.

그는 지금 엄청나게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이를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고….”

그 이유는, 며칠 전 마탑의 현자, 대마법사 랜서스 데이몬드에게 전달받은 편지 때문이었다.

“조금씩 마탑을 둘러싸오는 언데드 집단, 견제할 만큼 세력이 많지는 않지만 그 중앙에 마왕군 간부 리치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라….”

편지 내용으로만 보면 추측에 불과한 것 같지만, 이 편지를 보낸 인물이 그 유명한 랜서스 데이몬드라는 것이 문제였다.

현존하는 마법사 중 최고령자이자, 모든 마법사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다.

이전에는 마왕군과 맞서 싸우기도 했던 나라의 영웅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지금은 너무 노쇠해 싸울 여력이 없지만 말이다.

‘이전 용사 파티의 마법사기도 했지.’

성녀 조안나, 엘프 메리엘, 정령사 로헨, 용사 에반으로 이루어진 용사 파티 그 이전의 용사 파티의 마법사였던 인물이다.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그들이 한창 현역이었을 때는 하워드도 패기가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그가 집권할 때 반드시 마왕을 없애겠다고 다짐했지만, 말처럼 쉽진 않았다.

그 용사 파티도 대마법사 랜서스를 제외하고 전부 마왕에게 사망했기 때문이다.

물론 마지막까지 마왕군과 마왕에게 큰 피해를 준 뒤 패배해, 그다음 용사가 등장하기 전까지 세계는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그 후 시골 소년이었던 에반이 용사의 힘을 얻은 걸 발견했고, 뛰어난 동료들을 모아 마왕을 노렸지만… 결국 그들도 실패했다.

다행히 4명 중 2명이 살아남았지만, 그중 한 명인 정령사는 은퇴했고, 용사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를 않는다. 세계에 단 한 명 존재할 수 있는 용사가 혼수상태라는 것은….

‘잔인한 말이지만, 용사가 죽은 것보다 더 나쁜 소식일지도 모르지.’

용사가 죽고 다음 용사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희망이라도 있다. 조금만 기다린다면 새 용사가 나타나니까.

하지만 세계에 단 1명 존재할 수 있는 용사가 저렇게 되어버리면 이 나라는, 아니 이 세계는 정말로 미래가 없다.

너무나도 역겨운 생각이라는 걸 하워드 본인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일단 용사가 깨어나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 와중에 마법사들의 탑, 마탑의 현자이자 대마법사인 랜서스까지 도움을 요청해온 것이다.

“그 정령사라도 있었다면.”

미친 재능 하나만으로 지금까지 누구도 달성하지 못했던 업적을 달성한 정령사. 그가 맡아준다면 사악한 언데드 마법사, 리치라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왕실 기사 몇백 명이 겨우 할 일을 그 혼자서 해낼 수 있다.

하지만, 정령사 로헨은 며칠 전 은퇴 의사를 밝혔다.

“은퇴한 인간을 또 불러오기도 좀 그렇긴 한데….”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하워드는 펜을 들었다.

부끄럽지만 지금 트리어 왕국을 비롯한 세계는 위험에 빠져 있고, 그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라는 글을 적으며, 늙은 왕은 간절히 기도했다.

신이시여, 부디 이 세계를 구해주소서.

* * *

“일단, 줄리아는 어디 숨겨 둬야겠다.”

이제 우리 편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제까지 마왕군 간부였던 마수 조련사를 트리어 왕국의 수도, 그것도 수도의 중심 왕궁 안으로 데려갈 수는 없다.

“왜?!”

“몰라서 물어?”

“그치….”

곧바로 시무룩해지는 그녀.

“그럼 이그니스가 나 대신 줄리아를 감시해 줘.”

《알았다. 저 팔찌에 네가 명령을 내려놓으면 도망갈 일은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모르잖아.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는 걸까. 뭐, 은퇴 번복을 요구할 건 예상했지만.”

이전에 은퇴 선언을 했을 때 순순히 보내 주긴 했지만, 언젠가 다시 나를 찾으려 할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야, 애초에 용사 파티가 없는 전쟁은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단 한 명밖에 없는 마왕, 단 한 명밖에 없는 용사.

이렇게 1:1로 있어도 마왕이 쌓아온 세월은 거의 1000년, 용사는 고작 해봐야 20년 가량이다. 계란으로 바위 깨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하지만, 메리엘을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고 막 다시 나서기로 한 참이다. 지금 타이밍에서 국왕의 부름은 오히려 좋다.

“마침 다시 싸울 명분도 만들어 주시는구만.”

아마 이 마차가 왕국 수도에 도착할 때쯤이면 엘피디언 아카데미에서의 내 활약이 국왕님의 귀에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는 더더욱 내 전투 복귀에 확신을 가지겠지.

은퇴 철회 요구를 한다는 것은 분명 나라에 무언가 중대한 사태가 발생했다는 걸 텐데, 그것이 과연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야, 로헨.”

“응?”

줄리아가 갑자기 내게 말을 걸어왔다. 본명으로 부르는 것은 평소 같았으면 제재했을 텐데 마차 운전수는 운전에 집중하고 있고, 어차피 듣는 사람은 나와 이그니스뿐이니 크게 뭐라 하지는 않았다.

“너, 그 다크 엘프 여자를 쫓고 있다고 들었는데.”

“…응, 맞아.”

“설마, 걔야? 나로 변한 도플갱어 죽일 때 뒤에서 화살 쏘던 애?”

“…….”

“진짠가 보네….”

안타까워하는 건지, 놀리는 건지 모를 줄리아의 태도.

“이게 네가 좋아하는 마왕님이 하는 짓거리야. 역겹지 않아?”

“…….”

마왕만을 따르던 그녀였지만, 아무리 그녀라도 이번 사건은 좀 심했다고 생각하는지 곧 조용해졌다. 그래도 인간이라는 건가.

“그래도, 내가 도와줄 게 있을 거 같은데.”

“……?”

“착각하지 마! 네가 날 도와 다른 간부 새끼들을 죽이겠다고 약속했으니 나도 정보를 주는 거야!”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사이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티격태격하다니, 신기할 지경이다.

“아마 그 다크 엘프는 마왕님의 눈…이라 해야 하나. 명목상으로는 지원용이지만, 사실 제멋대로인 마왕군 간부들을 감시하기 위해 준비한 거라고 알고 있어.”

“마왕의 눈?”

“응. 나 말고 다른 간부들…흑룡이나 리치는 다들 제 마음대로 놀거든. 일단 큰 맥락에서는 마왕님의 명령을 듣지만, 본성 자체가 덜된 놈들이라.”

“…….”

“검귀는 말 잘 듣긴 하는데… 걔는 그냥 맘에 안 들어!”

본성 자체가 덜 된 건 너도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일단 지금은 줄리아가 정보를 전달하고 있으니 가만 놔뒀다.

“흑룡은 제 유희 생활이 먼저고, 리치는 제 몸을 언데드로 만든 놈답게 마왕님의 명령보다 자기 목숨을 우선으로 생각한다고!”

“그건 정상인 게 아닐까…?”

“으, 응? 어쨌든, 그 해골바가지는 전쟁통에서도 마법 연구나 한다니까?”

뭐, 줄리아가 무엇에 화나는지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아마 네가 찾는 엘프는 마왕군 간부 근처에 있을 거라는 거야.”

마수 조련사를 지원하는 겸 감시용으로 메리엘을 보냈다면, 마수 조련사가 잡힌 지금 아마 다른 간부들도 지금 무언가를 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결국 메리엘이 그쪽으로 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럼 결국 마왕군 간부를 하나하나 죽이고 다니는 것밖에 방법이 없겠네.”

“그래! 너랑 나는 목적이 같다니까?”

긍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맞는 말이었다.

“우리 같이 힘을 합치면…우욱!”

“뭐야, 왜 그래?”

“아니, 잠깐만. 우우욱!”

갑자기 헛구역질하는 줄리아.

“잠깐 마차 좀 멈춰주세요!”

“우우욱!”

간신히 마차가 멈췄다.

“하아, 하아.”

“대체 무슨 일인데. 혹시 마왕의 저주…?”

“아니, 멀미.”

…멀미라고?

“장난해? 하늘에서 그리폰도 타고 다니는 게, 마차 탔다고 멀미?”

“마수들은 내 친구잖아, 가족이고! 근데 이건 데굴데굴…토 나올 거 같아.”

“진짜 어이없네….”

결국 줄리아가 조금 진정된 뒤에나 출발할 수 있었다.

《그냥 저 아이는 마수 하나 길들이게 한 다음 따로 오게 하는 것이 어떤가?》

“너무 야박하잖아….”

* * *

“오랜만이네, 왕궁도.”

며칠 동안 달려 마침내 왕궁에 도착했다.

줄리아의 멀미 때문에 조금 고생했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만남을 요청한 것은 국왕 측, 즉 그쪽이 을이고 내가 갑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상대는 일국의 국왕. 늦지 않는 것과 예의를 지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오셨습니까, 로헨 님.”

“데이브! 오랜만이야!”

내 오랜 친우, 기사 데이브가 날 마중 나왔다.

“길을 안내할 호위 기사, 데이브입니다.”

“그런 형식적인 자기소개는 집어치우고, 빨리 들어가자.”

“하하, 그게….”

데이브가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큰 문제는 아니옵고, 지금 알현실에 손님이 오셔서 말입니다. 전하와 대화 중이신 것 같습니다.”

“좀 기다려야 하는 건가.”

“그럴 듯싶습니다.”

나와 데이브는 임금님이 계신 알현실로 천천히 걸어갔다.

“별일은 없었고?”

“으음. 저는 왕실 기사인지라, 수도에는 별일 없었지만….”

“알고 있어. 다른 곳은 난장판이겠지.”

“…맞습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고 말했다.

“뭐, 그것 때문에 내가 온 것도 있으니까.”

“로헨 님 같은 전력이 도와주신다면야, 언제나 환영이죠.”

­끼익.

“여기부턴 나 혼자 갈게.”

“네? 알현실까지는 아직 좀….”

“폐하를 알현한 뒤 용사님을 뵙고 싶어서, 먼저 가 있어 줄래? 용사님 뵙는 데도 절차가 필요할 것 같은데.”

이왕 왕궁에 온 겸, 누워서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용사님의 얼굴이라도 오랜만에 보고 싶었다.

정신이 없어 알아듣진 못하실 테지만, 메리엘 얘기도 하고…해치운 줄 알았는데 멀쩡히 살아 있던 마수 조련사 얘기도 해 주고 싶었다.

“아…알겠습니다. 용건이 끝나시면 용사님이 주무시고 있는 방으로 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풋, 뭘 감사해. 내가 부탁한 건데.”

데이브는 그 무거운 철갑 때문인지 철컥, 철컥 소리를 내며 절도 있는 동작으로 왔던 길을 돌아갔다.

“이제 누구 나오면 내가 들어가면 되는 거지.”

나는 알현실 앞에 있는 푹신푹신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언제 나오려나~”

그렇게 얼마 정도 기다리니, 알현실의 문이 열렸다.

그 문에서 나온 것은 마법사 문양이 새겨져 있는 로브를 입은,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은발 머리 벽안의 잘생긴 청년이었다.

누구지? 처음 보는 사람인데. 마법사인가?

“저기, 폐하를 알현하고 있었던 분이 그쪽이신가요?”

“아, 네. 맞습니다. 하하, 많이 기다리셨나요?”

나는 확인차 그 금발 남자에게 알현실에 있던 손님이 맞느냐고 물어봤다. 첫인상은 약간 능글맞아 보였는데, 내 생각과는 달리 몹시 정중하게 말해서 살짝 놀랐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자아~”

남자가 내 양쪽 어깨에 사뿐히 그의 두 손을 올리고 나를 알현실 문 바로 앞으로 에스코트했다.

“아리따운 숙녀분, 수고하시길.”

­툭, 툭.

“히야앗!”

히야앗, 이라는 소리는 분명 대륙에서 제일가는 남자 정령사가 절대 하면 안 되는 말 중 하나일 것이다.

허나, 남자 중의 남자인 내가 이런 가녀린 여자아이 같은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던 것에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이 미친 새끼야.”

그 금발의 남자가, 아주 무례하게도 내 엉덩이를 그 손으로 토닥토닥 두드리며 날 알현실 안으로 슬쩍 밀어 넣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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