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폭풍전야(1)
* * *
모든 상황이 끝나 어수선한 사이, 그 틈을 타 화살을 쏘아 여왕 암살을 시도한 신원 미상의 다크 엘프.
그녀의 화살에서 나의 친우이자 동료, 메리엘 엘피디아의 바람 정령이 남긴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이건 대체….”
할아버지 엘프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평범한 엘프였더라도 마왕의 힘에 타락해 변해 버리면 다크 엘프가 된다고 했었다.
메리엘의 바람 정령, 그리고 정확히 얼굴을 확인하지 못한 다크 엘프.
혹시 메리엘의 바람 정령 ‘진’이 그녀를 버리고 다른 계약자와 계약했다면? 이 추측이 맞는다면 아마 메리엘은 이미 살아 숨 쉬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정도로 정령과 계약자 사이의 약속은 무거운 것이다. 하지만… 뭔가 시원치 않다.
《저기, 계약자. 듣지 못한 거냐?》
‘응, 아르마? 뭘 못 들어?’
《뒤에서 화살이 강풍에 실려 날아올 때, 저쪽 바람 정령이 뭐라고 말했다.》
‘…뭐라고?’
《메리엘을 구해줘, 라고 했었다.》
메리엘을 구해달라니.
나는 이 말의 뜻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러면 메리엘이 죽었을 가능성은 적어져. 하지만….’
메리엘을 구해 달라는 메시지는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녀가 아직 죽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왕의 힘을 받은 엘프는 다크 엘프로 타락해 버린다.’
이 가능성도 저버릴 수 없다. 만약 메리엘이 힘을 탐내 마왕의 힘을 얻어 타락한 다음, 자신의 모친과 여동생을 죽이려 들었다면….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곧바로 고개를 흔들어 그 추측을 부정했다. 내가 아는 메리엘은 그따위 힘을 얻자고 그렇게 타락할 여성이 아니다.
마왕의 세뇌, 혹은 최면일 가능성이 더 크겠지.
‘메리엘이 살아 있다니.’
솔직히 난 지금까지 마왕에게 다시 도전하는 것에 막연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단 한 번의 도전에 용사는 혼수상태가 되고, 성녀는 죽고, 메리엘은 실종되었다. 그것도 말이 실종이지, 혼자 적진에서 미처 도망치지 못한 병사의 운명이 어떨지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나는 마왕에게 굴복했다.
항상 넘치는 재능에 늘 승리만 했던 나였기에, 절대 이기지 못할 압도적인 힘의 격차에 좌절했다. 동료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그래서 폐하께 이제 전장에서 은퇴하고 편히 살아가고 싶다고 아뢰었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도 1000년 전 마왕과 인연이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용사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강력할지도 모르는 불사신을 만났다.
그가 있다면 혹시? 하는 생각이 들어 함께 마왕을 잡을 생각이 있냐고 물어봤고, 이제 내가 고향 마을에 돌아가면 그가 그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하지만 마왕 퇴치는 내 1순위 목표가 아니었다.
용사 파티원들보다 몇 배는 더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낸 정령들을 찾고, 그 후에야 마왕을 죽이기 위한 여정을 떠날 생각이었다.
지금 그 마왕에게 고통받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힘이 있는데도 나서지 않는 내가 원망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족 같았던 정령들이 내게는 그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변했다.
메리엘을 조종해 다크 엘프로 바꿔버린 다음, 그녀의 손으로 직접 어머니와 여동생을 죽이도록 한 것이라면, 용서할 수가 없다.
뿌드득.
분노를 견디지 못하겠다. 이가 갈린다.
반드시 죽인다. 추악하고 역겨운 악마. 사람의 감정을 조종해 가족끼리 죽이게 만들고자 하는 그 의도가 뻔히 보인다.
그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그저 ‘유희’겠지.
나의 정령들과의 만남이 조금 늦어진다고 하더라도 괜찮다. 지금 당장이라도 메리엘을 구해온 다음 그녀를 원래대로 되돌릴 것이다.
모녀의 평범한 하루를, 자매의 소박한 일상을 되찾아 줄 것이다.
용사 파티의 정령사 로헨의 이름을 걸고.
* * *
“이그니스, 괜찮았구나.”
《흥, 그래. 그런 벌레 따위에 당할 성싶느냐. 그 조련사 계집이 없더라도 아무 피해 없이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겠지. 하하….”
나와 일행들은 왕궁에서 나와 학교 쪽으로 걸어갔다.
여왕님을 비롯해 많은 엘프들이 상처를 입어서 치료받아야 했고, 지금 시간도 늦은 밤이어서 리안나와 루시엘, 나는 기숙사로 돌아가 잠을 자야 했다.
돌아가는 길에 이그니스가 지쳐 쓰러진 듯한 기사 6명 옆에서 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서 있길래 녀석까지 데려왔다.
“미, 미안해 스파이더야… 엄마가 조금만 빨리 왔으면 널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뭐냐, 이 계집은.》
“으으으, 너 두고 봐.”
이그니스와 다투려 하는 마수 조련사, 줄리아를 말렸다. 이그니스가 거미 마수를 해치운 모양인데, 아마 나와 줄리아가 조금 빨리 왔으면 이 거미 마수가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것 같다.
그러게 진작 좀 빨리 협조하지.
“저기, 여왕님.”
“네?”
편하게 누워서 이송되고 있는 엘프 여왕님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저는 아마 여기까지 다니고 자퇴할 것 같습니다. 수속 잘 부탁드려요.”
“하하…. 정말 막무가내네요. 어쩔 수 없죠. 저 아이들과 작별 인사라도 해 두세요. 선생들에겐 내가 잘 얘기할 테니.”
“네, 바로 내일 짐 빼겠습니다. 그리고 저 녀석은 일단 엘프 감옥에…”
여왕님에게 줄리아 이야기를 한 다음, 감옥에 가두라고 충고했다.
“어? 무슨 얘기 하는 거야?! 아아아아악!”
줄리아는 기사 여러 명한테 어딘가로 끌려갔다. 아무리 회개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패배한 침략자, 처벌은 엘프 왕국의 몫이다.
일단 가둬 두고 나중에 내가 꺼내오면, 내 명령을 더 잘 듣지 않을까…?
“그럼 친구들, 저흰 기숙사로 돌아가서 어서 눈을 붙이죠.”
“저, 저기 라헬 님… 설명이나 좀.”
“로헨 님, 이제 못 숨기겠는데요….”
“루시엘은 먼저 들어가. 내가 직접 설명할게.”
기숙사로 돌아간 뒤, 나는 리안나에게 간단하게 진실을 전했다.
사실 나는 로헨이 맞고, 이번 사건 때문에 잠시 모습을 바꿔 잠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다시 학교를 나가 마왕을 포함한 악의 무리와 싸워야 한다… 이렇게 말이다.
“말도 안 돼….”
어느 정도의 거짓이 섞인 진실이지만, 다행히 그녀는 잘 믿어 주었다. 심지어 로헨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려 하던데.
“안 그래도 듣도보도 못한 인간 정령사가 수석을 먹고, 엘프 공주랑 친구라는 게 믿기지 않긴 했어요…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
“제 위의 1명이 사라졌잖아요, 히히.”
진심으로 나를 학교 내의 라이벌로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니라, 그냥 리안나 그녀만의 농담인 것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리안나도 처음 만났을 때와는 많이 변해 있었다.
“그럼, 내일 떠나시는 건가요?”
“아마 그럴 듯싶어요.”
“친해졌다 생각했는데 아쉽네요. 근데, 대륙 최고의 정령사와 친분을 쌓았다는 거, 엄청난 거 아닌가요…?”
“리안나도 매우 뛰어난 정령사에요. 조금만 더 수련하면 곧 상급 정령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네에… 그 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우으….”
그녀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려 하길래 간신히 진정시키고 재우고 나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긴 하루였다.’
《할 얘기가 있다.》
“이그니스, 내일 아침에 하면 안 될까…?”
《이제 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 않나.》
“그래, 그럼 최대한 빨리… 하암.”
《전에 너와 계약했던 정령들이자, 나의 친구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누워 있던 자세를 고쳐 바로 앉았다. 이그니스는 실체화를 풀어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상태라 누워 있어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이 이야기는 누워서 들을 만큼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다. 하지만 모두가 다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일단은 소녀에겐 ‘물’만 느껴지는 것 같네만.》
“물이라면, 아쿠아?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그것은 잘… 전에 폭주하고 있을 때 너와 대화하며 무언가 저주가 풀린 뒤, 네 마나의 흔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정령들에게 내 마나의 흔적이 남아 있고, 한참 먼 거리인데도 어째선지 넌 그게 느껴진다는 거네. 그것도 아쿠아 하나만.”
확실히 신뢰도가 높은 정보는 아니다. 어쩌면 마왕이 이그니스에게 혼란을 주는 걸 수도 있다.
이그니스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잠시 뜸 들이다가 대답했다.
《그래. 대륙의 어딘가, 깊이 숨겨져 있는 마탑들 주변에 있다고 느껴져.》
“마탑? 그곳은 마법사가 아니면 출입 자체가 불가하잖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 할 것 아니냐.》
일단 그 다크 엘프와 메리엘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에 줄리아한테 물어보고, 다음에 메리엘과 마주친다면 그때 그녀를 잡고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게 무조건 1순위다.
그리고 그다음이 정령 찾기 및 마왕 토벌… 할 일이 태산같이 많다.
“다 해내야지.”
* * *
“당장 어제 가뒀는데, 마왕군의 간부를 풀어달라니요?”
“여왕님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녀의 능력은 큰 도움이 됩니다. 제 동료가 아닌 노예로 끌고 다닐 생각입니다.”
예상대로 여왕은 마수 조련사의 석방에 긍정적이지 않았다.
“마수를 다루는 능력은 잘만 쓴다면 막대한 피해를 방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녀가 죽인 생명보다 더 많은 수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잠시 고민하던 여왕은 손가락을 까딱 흔들어 마수 조련사, 줄리아를 이곳으로 데려오라 명령했다.
“로헨 당신은 이번 이그니스 폭주 사태, 마수 조련사 침공 사태에서 말도 안 되는 공을 세웠습니다.”
“…분에 넘치는 칭찬이십니다.”
“그 보답으로 그대의 요청을 승낙하겠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
엘프 기사가 이상하게 생긴 팔찌 같은 것을 들고 왔다.
“이것은 엘프 감옥에서 중범죄자들에게 쓰는 봉인의 팔찌. 마수 조련사가 이걸 찬 상태라면 로헨, 당신에게 반기를 들지도 못하고 무조건 따를 것입니다.”
노예로 만드는 팔찌라,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어 보인다.
“여왕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천만에요. 엘피디아를 구한 영웅이여.”
그렇게 훈훈하게 마무리되고 돌아갈 때,
“으아아아! 팔찌 풀어! 씨발!”
“야, 조용히 좀.”
“으아아아… 읍, 읍!”
나의 조용히 하라는 한 마디에 바로 줄리아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성능 확실하네. 자, 돌아가자. 일단 우리 고향으로….”
“헉, 헉. 로헨 님!”
분홍색 머리의 귀여운 소녀, 루시엘이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에휴, 혹시 놓칠까 봐 급히 뛰어왔다고요.”
“아, 안 그래도 작별 인사하려고 했는데 어디 있는지 몰라서.”
메리엘 때문일까, 여왕님과 루시엘의 얼굴을 보기가 껄끄러웠다.
그들에게 내가 추측할 내용을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알게 되면 너무 충격적일 정보고, 확실하지도 않은지라 일단은 전달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어떻게든 그녀를 원래대로 만들어 데려오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지금까지 말 안 한 것이든 뭐든 다 상관없어진다.
“항상 힘내시고, 저도 열심히 할 테니까 둘 다 최선을 다해 봐요.”
“그래, 리안나 양이랑 잘 지내고, 언니가 돌아오더라도 어머니께 차기 여왕으로 선택받을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해져라.”
“그럴 수 있을 리가… 아니, 그렇게 될게요.”
또 약한 소리를 하려다가 마음을 다잡은 루시엘.
그 모습이 보기 좋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 머리 만지셨으면 저도 하나!”
“으아아, 뭐하는 거야!”
루시엘이 내 볼을 붙잡고 감촉을 느끼며 이리저리 주물럭거렸다.
“변태냐….”
“에헤헤, 그래도 한 번 해보고 싶었다고요.”
루시엘이 잠시 뜸 들이더니 한 마디를 덧붙였다.
“로헨 님도 좋았지만, 전… 라헬 양도 나쁘지 않았어요.”
“…….”
“귀엽기도 하고, 좀 친근한 것 같기도 하고.”
“푸흡.”
“네? 웃지 마세요!”
진지하게 라헬과 로헨의 차이에 대해서 얘기하는 루시엘을 보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작 나는 몸의 변화에 점점 익숙해지는 중인데 말이다.
“정말 안녕이다.”
“다음에 또 봐요!”
그렇게 짧았지만 길었던 엘프 마을에서의 며칠이 끝났다.
“……읍읍!”
“아, 그래. 풀어줄게. 가는 길도 심심할 테니.”
나와 줄리아, 그리고 방금 막 실체화한 이그니스는 엘프 마을에서 준비해 놓은 마차에 올랐다. 이 마차는 곧바로 나의 고향, 벨크 마을로 향할 예정이다.
“손님, 편지가 왔는뎁쇼?”
“네? 무슨 편지가…?”
마차에 막 오르니 마차 운전수가 웬 편지를 건넸다.
“무슨 내용인데? 응?”
“야, 기다려 봐. 잠깐만….”
《흐응.》
그리 길지 않은 편지를 다 읽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목적지, 벨크 마을에서 다른 곳으로 변경해야겠습니다.”
“어디로 변경하시나요?”
“왕궁으로 가야겠네요.”
줄리아와 이그니스가 나를 보고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왕궁?! 나 또 가두려는 거야? 미안! 예전에 한 일들은 잊어줘!”
《아쿠아를 만나러 가는게 아니었던 게냐?》
“어쩔 수 없잖아. 폐하가 직접 만나자는데….”
요즘따라 왕들하고 많이 엮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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