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마수 조련사(5)
* * *
“죽일 거면 빨리 끝내.”
“그건 보류. 널 죽인다고 마수들이 잠잠해질 것 같지도 않고.”
애초에 마수는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고자 하는 짐승 그 자체. 마기가 깃들어 있는 사악한 짐승들이다.
내 앞의 이 녀석이 죽더라도 잠잠해진 채로 돌아갈 리는 없다는 거지.
그러니 현 상황에서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마수 조련사를 설득해서 마수들을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녀를 땅속에 묻고 머리만 밖으로 나오게 한 다음, 건전한 대화를 시도해 보고 있다.
“설득이야. 마수를 물러나게 해 주지 않을래?”
“거부한다면?”
잠시 고민했다.
“죽이지 않을까?”
“풋, 죽여라. 내 목숨은 마왕님의 것, 나 같은 인간 하나 살자고 마왕님의 원대한 목표를 무너뜨릴 수는 없지.”
“안됐네. 마왕은 널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을 텐데.”
조련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네가, 그분의 뭘 안다고…!”
“어린 여자아이를 데려가서 괴물들 사이에서 기르고,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장에 내보내는데, 네게는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았어.”
“이름 같은 거 필요 없어….”
이름은 그렇다 쳐도, 이 녀석이 자신의 가족들을 기억하기는 할까.
“그보다, 대체 어떻게 죽었던 널 살린 거지?”
“그게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지.”
“입은 살아가지고….”
나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혹시 언데드가 아닌지 살펴봤다.
“언데드는 아닌데…?”
“멀쩡히 살아 있거든? 날 설득시킬 생각 말고 빨리 가서 여왕님이나 구하는 게 나을 텐데?”
그 순간,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모비 딕은 어떻게 만든 건데?”
“그건…….”
“그 정도는 얘기해 줄 수 있잖아?”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 예전 창공의 고래의 유골에서 유전자를 조금 떼서… 근데 아무래도 세월이 많이 지나서 그 힘의 30프로 정도도 복구가 안 되더라.”
“역시, 너도 왜 안 죽었는지 알겠네.”
“응…?”
“너, 애초에 죽었던 적이 없지?”
마수 조련사는 표정을 숨기는 게 익숙치 않은 듯하다. 바로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으, 으으… 몰라아…….”
“너 자신을 자가 복제해서 키메라를 만든 거군.”
그녀 스스로 자신의 복제품을 만들어서, 대신 죽게 만든 것이다.
아무리 마왕이라도 이미 죽은 생명을 언데드가 아닌 형태로 그대로 살아남게 만들 수는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미 신의 영역이 아닐까.
“푸흡,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러나, 마수 조련사는 나의 추측을 바로 부정했다.
“그럼 뭔데?”
“그냥 도플갱어 마수를 조종했을 뿐인데~푸흡! 무슨 자가 복제야, 그럼 검귀 군대라도 만들었겠지!”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어…… 정보 고맙다.”
“이, 이 개 같은 년아!!!”
직접 말해 놓고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억울해하는 모습이 아주 진국이었다. 그전까지는 잘 속여 놓고 마지막에 넘어가 버렸네.
“그럼 하나 알려줬으니까 너도 하나 알려줘. 왜 여자가 된 거야?”
“…너도 몰라? 마왕이 한 짓 아니었어?”
“그, 그분은 너 같은 사소한 건을 우리에게 일일이 말씀해주실 정도로 한가하지 않아!”
결국 마왕이 어째서 나를 여자로 만들었는지는 끝끝내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다시 한번 제안할게. 마수들을 여기서 퇴각시켜 줬으면 좋겠어. 대신 네 신병은 우리 측에서 철저히 보호할게.”
“마왕님은, 나를 버리지 않아…… 곧 나를 구하러 다른 간부들이나, 마왕님께서 직접!”
“올 리 없다고, 너도 생각하고 있잖아.”
사실이었다.
대충 상황을 보아하니, 마수 조련사의 군대가 이토록 빈약한 건 이미 다른 곳에서 전력을 많이 잃어버린 게 이유인 것 같다.
“이미 몇 번 패배한 부하에게 그 마왕이 자비를 베푼다고?”
“…….”
“너도 알잖아. 돌아가면 버려지고 살해당한다는 걸.”
“마왕님이, 날… 버릴 리가….”
그녀는 나에게도 졌었고, 전력이 급감한 것으로 보아 최근에 있던 전투에서도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
“그 마왕군의 ‘검귀’처럼 한 번도 진 적 없는 괴물이 어쩌다 한 번 패배한 거면 몰라도, 너는 실패한 적이 너무 많잖아.”
마왕군 간부 중 한 명, 검귀.
마수 조련사와 같은 등급의 간부지만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한 그는, 마왕을 제외한다면 그 마왕군에서 최강이라고 불리는 마족 사내였다.
“내가 널 구해줄게. 난 네 힘이 필요해.”
“너같이 착한 척하는 자식이, 마수를 다루는 능력을 어디에 쓴다고!”
“오히려 더 좋은 곳에 쓸 수 있지. 사람들을 마수로부터 지킬 수도 있고, 마수의 힘을 빌려 마왕군을 해치울 수도 있어.”
이런 말들보다, 상대의 허점을 찌르는 말 한마디가 더 영향력 있다.
“너도 이제 그만 거기서 빠져나오고 싶잖아.”
“…….”
* * *
“벽이, 뚫렸다.”
《이제 진입하면 되느니라. 소녀도 동행하지.》
벌레형 마수들의 천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불 속성의 정령이 합류했다. 그래서인지 루시엘도 점점 자신감이 생기는 듯했다.
“으으, 저기….”
리안나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흰색 거미줄로 돌돌 감긴 엘프 기사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저런.》
이그니스가 손가락을 튕겨서 날린 불꽃에 거미줄이 끊겼고, 떨어지는 그 기사를 다른 기사들이 받아주었다.
“우으, 우으읍!”
말을 하고 싶어 하지만 입에도 거미줄이 돌돌 말려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입 안에 불꽃을 넣는 것은 조금 위험했기에 직접 손으로 하나하나 간신히 떼어냈다.
“이건 두께가 얇아서 그런지 뜯기기는 하네요.”
성인 남성 두 명이 달라붙어서 간신히 떼어내는 실이지만, 그래도 강철보다 단단했던 거미줄 벽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후, 후우.”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저처럼 이렇게 묶인 포로들이 많을 겁니다. 그리고 거미가, 거미가… 엄청나게 큽니다.”
상급 마수, 거미 아리아드네.
그 실은 강철보다 강한 강도를 자랑하고, 거미가 그 여덟 다리를 가볍게 휘두르기만 하더라도 인간과 엘프의 육체 따위는 간단히 찢어버릴 것이다.
“그렇지만….”
루시엘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거미 마수를 해치워야만 클라우디아에게 도달할 수 있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만다.
‘최선의 판단은, 두 팀으로 나눠서 한쪽을 거미 처치에, 한쪽을 여왕님 구출에 보내는 것.’
그렇지만 모든 기사들은 여왕님 구출에 참여하고 싶을 테고, 로헨 님의 이그니스가 루시엘의 말을 들을지도 의문이다.
루시엘이 차기 여왕으로서 여러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무언가 진행해 본 경험은 많지 않았다.
“절반은 거미 마수 토벌, 절반은 여왕님 구출에 힘쓰는 것이 어떨까요?”
그렇게 루시엘이 고민하던 사이, 아비드 선생님이 대신 말을 꺼냈다.
그 역시 정령술 선생, 많은 엘프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였다. 기사들 역시 생각보다 반발은 많지 않았고, 마침내 루시엘이 결정을 내렸다.
“현재 12명의 기사, 그리고 3명의 정령사와 불의 상급 정령이 있습니다. 기사 6명, 그리고 정령사 두 명….”
《소녀는 벌레 쪽으로 간다. 앞에서 대신 맞아줄 기사 6명만 준다면 가볍게 해치울 수 있느니라.》
고맙게도 이그니스가 직접 나서 주었다. 원래 루시엘은 리안나 혹은 아비드까지 거미 괴수 쪽으로 보낼 생각이었지만, 불의 정령은 거미 마수의 천적.
이그니스 혼자 보내도 될 것 같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저와 리안나 양, 아비드 선생님, 그리고 나머지 기사들은 전부 여왕님을 구출하러 갑니다.”
《건투를 빌지. 금방 끝내고 따라갈 테지만.》
“키샤아아아앗!”
그렇게 말하면서 걷다 보니 결국 나타난 거미 마수, 아리아드네.
그것의 뒤에는 칭칭 감겨 움직이지 못하는 엘프들이 수십 명 가까이 묶여 있었다.
《미천한 벌레여, 소녀의 불꽃에 눈멀어라.》
거미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그 다리 하나에 이그니스가 불을 붙였고, 그 틈을 타 기사 6명과 리한나, 아비드, 그리고 루시엘은 빠져나갈 수 있었다.
“반드시, 구해내겠습니다…!”
* * *
“하아, 하아….”
여왕 클라우디아와 바람 정령, 진(風)은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케르베로스가 다가오면 강풍을 날려 접근을 막고, 고래가 날리는 알 수 없는 기체 역시 차단했다.
일반적인 바람이라면 불가능했겠지만, 상급 정령의 폭풍은 그 상급 마수들조차 가까이 오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자랑한다.
그렇지만, 피해를 주는 것은 무리였다. 모든 정신력을 집중해 방어에만 몰두하고 있는 클라우디아.
“에클레어(?)!”
“클레이(?)!”
루시엘은 말없이 마력을 담은 화살을 쏘았다.
“크르르….”
하지만, 역시 이 정도 공격으로는 지옥의 파수견 케르베로스에게 생채기조차 낼 수 없었다.
“여왕님! 어서 이쪽으로!”
“여왕님을 보호해라!”
재빨리 뛰어나간 기사들이 용감히 케르베로스 앞으로 다가갔고, 리안나와 아비드는 그사이에 재빠르게 여왕님을 후방으로 모셔왔다.
“괜찮으십니까…?”
《클라우디아는 많이 지쳤다. 저놈들을 상대하려면 더 많은 전력을 데려와야 해. 정령사 세 명과 기사 여섯 명이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마수들이 아니다.》
그런 괴수들을 단신으로 방어하고 있던 엘프 여왕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깨달을 수 있었다.
“어, 어머니….”
혼자 우물쭈물하고 있는 루시엘. 고작 몇 시간 전 그렇게 싸우고 다시 만나는 것이니, 어색할 만도 했다.
“일단 여왕님이 많이 지치셨으니,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죠.”
“네, 케르베로스는 기사님들이… 어라?”
리안나가 말을 멈췄다. 분명 케르베로스는 여섯 명의 기사들이 힘겹게 막아 내고 있었지만, 하늘의 고래를 찾을 수가 없었다.
“우우우우~”
그리고, 그들 바로 머리 위에서 수직으로 낙하했다.
“클레이(?)!”
수직으로 들이박는 녀석을 막기 위해 간이로 만든 아비드의 바위 벽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 다섯 개가 다 뚫리고 나서야 거대한 고래가 비명을 지르면서 물러났다.
“우우우우우우!”
루시엘이 쏜 화살이 고래에게 직격했다.
“끼에에엑!”
효과가 있었다. 아주 미세한 정도였지만, 그 고래가 뒤로 물러났다.
“다들 도망쳐요. 이곳은 제가 막습니다.”
루시엘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건…!”
“어서 가죠, 선생님.”
아비드가 막으려 했지만, 그녀의 결연한 의지를 엿본 리안나는 루시엘의 뜻을 존중했다.
“차기 여왕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루시엘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백성이 있어야 왕이 있는 법이니까요.”
툭.
그 순간, 하늘에서 두 명의 여성이 내려와, 지상에 사뿐히 착륙했다.
파란 머리의 소녀, 그리고 그 소녀의 손에 들려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천박한 의상의 금발 소녀.
그들이 등장하자, 거짓말처럼 고래가 뒤로 물러나 멀리 도망친 뒤, 안전할 정도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대로 정지했다.
“크아아악, 어라?”
기사들을 씹어먹으려 들던 케르베로스도 순식간에 얌전해졌다.
“이게 무슨…?”
루시엘이 중얼거리자, 파란 머리의 소녀가 뒤를 돌아보더니 그녀의 일행을 보며 밝게 웃었다.
“괜찮아요, 다들?”
루시엘이 가장 존경하는 정령사, 로헨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