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마수 조련사(4)
* * *
사실 나는 마수 조련사의 능력이 탐났었다.
첫 전투 때 마수 조련사의 군대를 해치우며 그런 생각을 했다.
‘왜 이런 능력을 가지고 마왕 밑에서 일하는 거지?’
마수를 조종하는 인간이 만약 용사 파티에 있었다면 그 효율은 무시무시했을 것이다. 마왕을 해치우러 가는 길에 가장 방해되는 것들이 그 마수들이니까 말이다.
물론 조종할 수 있는 마수들의 수는 한계가 있다. 대륙의 모든 마수들을 조종한다면 그건 이미 마왕 이상의 힘이지.
그러니 마수 조련사가 같은 편이었다면, 모험의 진척도도 훨씬 빨리 늘어나고 불필요한 희생도 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회유당하지 않았다.
“그 재능을 좋은 곳에 썼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메리엘의 화살에 맞아, 끝끝내 죽어가는 그녀를 보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에게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귀한 자원을 잃은 듯한 기분이었다.
“히히힝!”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수 조련사는 벌써 다음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유니콘이 막 돌진하려는 참이었다.
“너, 이름은 뭐냐?”
“으윽…!”
그러고 보니 항상 마수 조련사라는 명칭으로만 불렀지, 그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다.
“이름….”
“…응?”
“없어, 이름.”
그녀는 잠시 침울해지더니, 곧 평소대로 돌아왔다.
“당신만 끝내면 다 해결이라고! 빨리 죽어!”
“저쪽을 좀 볼래?”
내가 한창 맨티코어와 싸우고 있을 때, 옆에서 여러 마리의 늑대인간들을 불태우던 소녀 정령이 있었다.
《감히 소녀보다 빨리 끝내다니, 건방지군.》
“늦게 끝냈어도 뭐라 했을 거면서.”
이그니스가 어느새 늑대인간 여러 마리를 전소시킨 채 내 쪽으로 위풍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으으….”
그리폰을 탄 마수 조련사가 지상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이제 2 대 2네.”
나와 이그니스, 그리고 상대는 유니콘과 그리핀.
이미 승부는 우리의 승리로 결정 난 것 같지만, 그래도 상대의 목표는 시간 끌기다.
우리가 빨리 가지 못해 여왕님을 비롯해 왕궁 쪽의 사람들이 몰살당한다면, 그것만으로 엘피디언 아카데미에는 큰 혼란이 들이닥칠 것이다.
‘설마 싶지만, 만약 여왕님도, 루시엘도 당해버린다면…?’
왕족이 한 명도 남지 않는다면, 엘피디언 아카데미는 물론이고 엘프 종족 자체가 앞으로 정말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빨리 끝내자고.”
* * *
루시엘과 리안나, 그리고 정령술 선생 아비드는 전력을 다해 왕궁 쪽으로 달려갔다.
그 시각 다른 곳에 있었던 선생들도 왕궁에서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다들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왕궁을 걱정해서 서둘러 이탈했다가 몰려온 마물들에 의해 일반 엘프들이 학살당한다면 그것만한 위험이 없다.
백성이 있기에 왕이 존재한다.
클라우디아 엘피디아가 늘 강조하던 말이었다.
“허억, 허억,”
한편 그런 말을 한 클라우디아 엘피디아는 지금, 커다란 개를 상대로 분전하고 있었다.
“크르르릉!”
머리가 세 개 달린 지옥의 사냥개.
케르베로스.
케르베로스뿐만이 아니라 하늘을 날아다니는 하얀 고래, 모비 딕도 구름인 척 유유히 체공하다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와 수상한 수증기로 그녀를 공격했다.
며칠 전 전투에서 그 성체 케르베로스와 성체 모비 딕은 신원불명의 마법사에게 사망해 현재 전투 중인 두 개체는 아직 미성숙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 둘은 상급 중에서도 최상급 마수, 물론 둘 다 미성숙 개체라 그들의 성체 정도로 놀라운 힘을 보여주진 못하겠지만 하룻밤 사이에 왕궁 하나 정도를 파괴하는 것은 간단할 것이었다.
“진(風)!”
하지만, 클라우디아역시 바람의 상급 정령사다. 자연재해, 마치 태풍 같은 강풍에 그 무시무시한 마수들도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크르르르!”
“우우우우~”
분노에 찬 듯이 울부짖는 사냥개와, 높은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하얀 고래의 울음소리가 클라우디아를 소름 돋게 했다.
그녀의 바람 정령, 진은 거대한 독수리의 형태였다.
《클라우디아! 이 녀석들은 대체 무어냐?!》
“마왕의 수하에게 조종당하는 마수들이다. 오랜만의 전투네, 진.”
바람 독수리는 날개를 살짝 걷어 올렸다.
《전투라, 오랜만이라 몸이 굳진 않았으려나 모르겠군.》
“여기서 여왕이 쓰러지면 다들 혼란에 빠질 거야.”
클라우디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기지 못하더라도, 쓰러지면 안 돼.”
그녀도 이 마수들이 동시에 자신을 노리려 온 이유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여왕의 죽음으로 인한 혼란을 노리려는 거겠지.’
200년이라는 세월을 허투루 보내진 않았다. 사람들의 심리를 파악하는 것은 기본이고, 여왕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정령술과 궁술, 전투술 등을 수련해 온 그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등장한 이 마수들이 상당히 강한 상급 마수들이라는 것을 클라우디아 또한 느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엘프 기사단은…?’
원래대로라면 엘프 여왕을 지키는 왕실 기사단이 빠르게 그녀를 구하러 왔어야 정상이지만, 왠지 모르게 그들의 도착이 늦어지고 있었다.
“대체, 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 * *
루시엘과 리안나, 그리고 아비드는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서게 되었다. 그들 앞의 엘프 왕실 기사들로 보이는 남자들이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기사님들? 지금 무얼 하시는…?”
아비드가 먼저 나서 한 기사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고래에게 왕궁이 붕괴되어, 많은 동료들이 깔려 죽었습니다.”
힘겹게 대답하는 엘프 기사는 굉장히 피폐해 보였다.
“아, 왕실 기사단도 그 피해를….”
“그 결과, 지금 저희 앞의 이곳이 왕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는 겁니다.”
루시엘과 리안나는 고개를 들어 어두컴컴한 입구를 바라봤다.
그 안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벽이 보였다.
“그런데,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이 통로가 마수에게 점령당했습니다.”
“마수라뇨?”
“거미 마수 아리아드네. 그 녀석과 그것의 자식들이 통로를 점거하고 쉽게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루시엘은 그 기사가 하는 이야기에 의문이 들었다.
“저희 기사단이라면 아무리 상급 거미 마수라도 제압 가능할 텐데요.”
“그것이… 일단 이 통로가 사람 몇 명 지나가기도 버거울 정도로 좁습니다.”
사실이었다. 그 통로는 원래 있던 환경에서 바위가 떨어지고 흙으로 메워져 사람 세 명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좁아져 있었다.
“그래서 기사들이 조를 나눠 세 명씩 들어갔는데, 어느 정도 가니 다들 소식이 끊겨버린 겁니다.”
“아, 설마…?”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 들키도록 조심히 정찰한 결과, 그 거미 녀석들이 저희의 동료를 잡아 놓고 단단한 거미줄로 속박해 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인근 주민들 대피, 북문 및 서문 정리 등으로 이번 전투에 함께하는 기사들은 그리 많지는 못했다.
그런데 왕궁이 붕괴되어 기사들을 잃고, 게다가 거미한테까지 몇몇이 포획당해 기사단의 전력이 많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그들을 구하자니 여왕님이 위험해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지나가고자 하였으나, 이 통로 외에는 길이 없었다고 엘프 기사가 설명했다.
“심지어, 유일한 통로에 이렇게까지 길을 막아서….”
엘프 기사는 흰 벽을 툭 쳤다.
“설마 이게 벽이 아니고….”
“네, 거미줄로 통로 자체를 틀어막았죠.”
휘익!
그가 검을 꺼내서 그 벽을 향해 휘둘렀지만, 그 벽은 아무런 흔적도 없이 멀쩡했다.
“강철보다 단단한 거미줄이라니, 대체 어떻게 해야 하죠.”
루시엘은 천천히 주변을 살펴봤다.
‘다들, 불안해하고 있어.’
알 수 없는 적의 습격, 동료들의 죽음, 그들이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켜야 할 여왕님이 위험에 처한 상황까지.
심지어 마수 때문에 그들 스스로 목숨을 바치러 가는 길조차 막혀 버렸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미줄은 불에 잘 녹죠. 혹시 불의 정령, 아니면 불 마법이라도 사용할 수 있으신 분?”
엘프라고 누구나 정령술을 쓰는 건 아니다. 정령술을 쓰는 정령사의 대부분이 엘프일 뿐. 기사들은 정령술을 사용하지 못하지만, 엘프 종족을 위해 한 몸을 바친 용맹한 자들이다.
물론, 인간이든 엘프든 간에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는 더 희귀하다.
다들 초췌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루시엘은 바람의 정령, 리안나는 전기의 정령, 아비드 선생님은 땅의 정령….
“혹시, 아비드 선생님. 땅의 정령으로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 진입할 수는…?”
납치된 기사들은 어쩔 수 없지만, 여왕님께 가는 길을 먼저 개척해 여왕을 구하고 그 후에 기사들을 구한다.
그들 또한 여왕님께 충성을 바치고 목숨 또한 바치겠다고 약속한 엘프들이니,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아비드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그렇게 응답했다.
“땅의 정령으로 통로를 뚫는다는 생각은 저 역시 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왕궁 건물 자체는 극도로 불안한 상태, 실수로 잘못 만졌다가 그나마 남은 건물들, 그리고 하나 남은 이 통로도 붕괴될 수 있습니다.”
“그럼 저 거미줄을 뚫는 수밖에 없는 걸까요.”
이렇게 된 이상, 정면 승부밖에 없다.
거미줄 벽을 없애고, 들어가 납치된 기사들을 구한 뒤 거미 마수, 아리아드네를 해치우고 다 같이 여왕을 구하기 위해 달린다.
순식간에 판단을 내린 루시엘은 망설이지 않았다.
“차기 여왕, 루시엘이 명령합니다!”
기사단과 리안나, 아비드가 전부 그녀를 쳐다봤다.
“1차 목표는 거미 마수 토벌 및 납치된 기사들 구조, 그 후 여왕님을 구출합니다!”
“그렇지만 공주님, 여왕님을 한시라도 빨리….”
“어차피 이 길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
“공주가 아니라, 차기 여왕입니다.”
공주는 그녀의 언니가 건재하던 때 루시엘을 부르던 칭호.
이제 공주 루시엘은 없다. 엘프의 차기 여왕 루시엘만 있을 뿐.
그녀의 카리스마에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고 칼을 꺼냈다.
루시엘과 리안나, 아비드는 각자의 정령을소환했다.
그리고 전원이 그 거미줄 벽을 향해 총공격을 퍼부었다.
바람 칼날이 휘몰아치고,
번개가 내리치고,
날카로운 바위들이 꽃히고,
수많은 검들이 그 벽을 찌르고, 베었다.
그러나, 벽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런 벽조차 뚫지 못하는 건가?”
“기사라는 칭호는 대체 무엇을 위해….”
“아아, 여왕님. 죄송합니다….”
“엘프의 역사는 여기서 끝인가…?”
이미 많은 사건들로 정신이 한계에 달한 기사들은 급기야 주저앉아 좌절하기 시작했다.
“다들, 조금만 더 노력을!”
루시엘이 급하게 나서 이 분위기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절망은 쉽게 전염된다.
“루시엘, 저도 몸 상태가 많이….”
설상가상으로 리안나의 컨디션도 최하, 사실 루시엘도 기숙사 앞에서의 전투 때문에 이미 쓰러질 듯이 지친 상태였다. 게다가 유일한 상급 정령은 아비드 소유의 땅의 정령, 파괴력이 강하지 않았다.
“방법은, 없는 건가?”
그렇게 절망이 마침내 루시엘마저 침식하려 들 때였다.
《소녀의 시야를 가리지 말고, 썩 나오거라, 엘프들이여.》
그 오만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챈 순간, 거미줄 벽은 이미 고열의 화염 폭풍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그니스(?).”
주저앉아 있던 기사 한 명이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녀가 평범한 인간이 아닌 정령이라는 것은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눈치챌 수 있었다.
화염처럼 붉은 머리카락, 그만큼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있는 적안의 소녀.
누구의 정령인지는 모르겠지만, 거미줄을 뚫기 위해 꼭 필요한 불의 정령이 마침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하여튼, 다들 소녀와 계약자가 아니었다면 대체 어찌할 작정이었단 말인가.》
“와, 아아아!”
“불의 정령이다!”
“인간형이라는 건… 상급 맞지? 어떤 분의 정령이지?!”
기사들이 신이 난 반면, 루시엘은 넋이 나갔다.
‘로헨 님, 원래 소유하셨던 상급 정령들을 전부 잃으셨을 텐데?’
용사 파티가 마왕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일반 백성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인간 국왕과 엘프 여왕의 판단하에, 자세한 사실은 널리 퍼지지 않았다.
차기 여왕인 루시엘은 전부 다 들어 사정을 알고 있지만,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은 고작해야 메리엘이 실종됐다는 것 정도.
‘설마, 내가 소환했던 정령이?’
루시엘이 불의 상급 정령을 소환했을 때는, 그것의 형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교실 안에 있는 마나만으로는 이그니스의 형태를 구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이그니스가 교실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허공에 충만한 마나로 그 적발 적안 아가씨의 형체를 구성한 것이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루시엘은 마음속으로 로헨의 안녕을 빌었다.
‘지금 무엇을 하시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무사하시길.’
* * *
“지금쯤이면 도착했으려나, 이그니스.”
“…….”
“내가 직접 내일 소개해주려 했는데 말이야. 어차피 이그니스를 구한 이상 이 학교에 더 있을 필요도 없으니.”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로헨…!”
유니콘은 쓰러졌고, 그리폰의 날개는 꺾였다.
두 마수를 전부 해치운 후, 마수 조련사를 완전히 제압했다.
“자, 그럼 이제… 대화를 해 볼까?”
나는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