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마수 조련사(1)
* * *
한편, 이그니스와 계약을 완료한 나는 너무나도 행복했다.
“흐흐, 헤헤, 히히.”
《기분 나쁘게 웃는구나, 계약자여.》
“이제 다른 녀석들하고도 다 재회할 수 있겠지?”
《물론이지. 하지만 그중에서도 소녀의 불꽃이 제일이라는 사실은 잊지 말도록.》
실제로 화력이라는 부분만 따지면 이그니스는 내 모든 정령 중 최강이라고 부르기 충분했다.
이제 우리는 계속 함께야…….
《그나저나, 왜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한 거지? 뭐, 딱히 중요한 것은 아니다만… 그 외형이 보기 낫군.》
“나도 잘 몰라. 아마 마왕이 뭔가 수작을 부린 것 같은데.”
선생님들 몇몇은 여왕님께 보고하러, 몇몇은 경비를 강화하러 떠났다.
그 다크 엘프가 이그니스를 풀어 놓고자 한 게 혹시 마수 조련사가 침입할 기반을 만들려 한 것은 아닐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건물들을 불태우고 아카데미를 혼란에 빠트린 다음, 마수 군단이 몰려와 학살하는 그림을 그린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그 다크 엘프는 마수 조련사와 한패일 가능성이 크다고 얘기하며, 당장 경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설득했다.
무언가의 사정으로 타락한 엘프가 다크 엘프로 변해서 마수 조련사와 손을 잡은 것이라면 모든 퍼즐이 맞춰진다.
내 주장을 대부분 긍정하셨고, 선생님들은 대부분 북문과 서문, 기숙사 쪽인 동문으로도 몇 분이 경비를 위해 추가로 파견되셨다.
그리고 사실상 상급 정령사인 나는 혼자 남문 쪽으로 감시 겸 산책을 하고 있었다. 이그니스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말이다.
“그동안 겪었던 일을 다 말하려면, 밤새워도 모자라.”
《호오, 소녀는 계속 잠만 자다가 오늘 소환돼서 딱히 할 이야기는 없다.》
한편, 아마 선생님들은 대부분 내가 상급 정령과 계약한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실제로 지금 난 선생님들보다 강하다. 그렇기에 나 역시 혼자 남문에 오는 것에 동의했던 것이다.
“내일 루시엘과 리안나 양에게 널 소개할까 생각 중인데, 어때?”
《정신을 잃고 루시엘이라는 엘프를 공격해 버렸지. 사과를 할 필요가 있겠어.》
“근데 그 루시엘이 메리엘의 동생인 거 알아?”
《정말인가? 그런데 로헨. 다른 동료들의 소식은 뭔가 추가된 게….》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없어. 긍정적인 소식도, 부정적인 소식도 없어. 용사님은 쓰러지셨고, 메리엘 님은 행방불명. 아리아는 뭐… 알다시피.”
《으음, 다른 정령들의 소식도 전혀 없는 건가?》
“응. 안 그래도 너가 처음…”
콰아앙!
“콜록, 콜록!”
흙먼지가 날렸다. 흙먼지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지만, 무언가 거대한 것들이 착지한 듯했다.
“하하, 설마, 이 타이밍에…?”
그렇게 아카데미의 남문을 지날 때쯤, 갑자기 이 녀석들이 등장한 것이다.
“크오오오오!”
맨티코어. 날개가 달린 사자의 형상을 띈 상급 마수.
“히히히히힝!”
유니콘. 처녀를 좋아한다는 뿔 달린 말 괴수. 역시 상급이다.
“아우우우우!”
거기다 중급 마수 늑대인간 여러 마리.
《이거이거, 큰일이로고. 흐흥.》
“진짜 큰일 같은데?”
《마물들의 체온이 느껴지네. 이곳뿐만 아니라 사방의 결계가 모두 파괴된 것 같구나. 오크, 고블린, 오우거 등등…다른 쪽에도 수가 많아.》
“진짜 큰일이잖아. 이곳에는 좀 대형급 녀석들만 온 건가?”
다른 쪽에는 중하급 마수만 무식하게 숫자로 밀어넣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내가 있는 남문 쪽에는 적은 수의 고위급 마수들만 몰려왔다.
아마, 나를 노리려고 마수 조련사 녀석이 직접 배치한 거겠지.
《에잇. 계집애가 되더니 정말 사내로서는 쓸모없게 되어버렸구나.》
“뭐?”
《언제 이런 것에 겁먹었다고. 소녀와 계약자의 첫 전장, 기억나지 않는 것이냐?》
“기억나지. 그때 마수 조련사를 죽였잖아.”
《흐흥, 기억하는군. 한 번 했던 거, 두 번 못할 거 없지.》
이그니스의 말이 맞았다. 애초에 마수 조련사는 숫자로 밀어붙이는 타입.
단체로 불태워 버리는 이그니스가 같은 편이라면 상성이 좋다.
이렇게 마수들이 소수 정예로 오면 조금 귀찮지만, 빠르게 정리하고 더 큰 전장으로 가야겠다.
《자, 첫 출진일세.》
“두 번째 첫 출진. 말이 이상하네, 하하….”
《그나저나, 유니콘이라….》
“응? 왜, 걸리는 거 있어?”
대여섯 마리의 마수들이 우리를 공격하러 포위망을 좁혀온다. 그 수는 많지는 않지만, 하나하나가 강력한 녀석들.
마수 조련사도 우리와 두 번째 싸움이다.
소수 정예로 우리를 처리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거겠지. 허접한 수준의 마수들을 숫자로 밀어붙이면 금방 이그니스에게 불타버려 재가 될 테니 말이다.
《아무리 마수 조련사의 통제 밑이라 해도, 유니콘은 이런 전장에서 처녀가 아닌 여성을 사냥하지는 않을 테지.》
“…네 얘기하는 거야?”
도리도리.
이그니스는 고개를 저어 내 질문을 부정했다.
《소녀는 정령체라 그런 개념이 없느니라. 처녀 정령사, 라헬 피스본. 전투 시작이다. 준비하도록.》
“뭐, 뭐어?!”
《얼굴이 붉어졌구나. 부끄러운 게냐?》
“원래 남자인데 부끄러워할 리가 있겠냐?”
뭐라고 화낼지 생각하던 중, 저 높은 하늘에서 누군가 우리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꺄하하하! 오랜만이네요~”
상반신은 독수리, 하반신은 사자인 마수를 타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그 신체는 육감적인 매력이 돋보였고, 아찔한 복장으로 중요한 부위만 간신히 가리고 있었다.
“정말 살아 있었군. 마수 조련사…!”
“살아 있었다기보다는, 죽었다 살아난 거죠~”
영문을 모를 말을 내뱉으며, 그녀는 상공에서 우리를 공격할 때를 엿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죽여 주마.”
《나도 출격이다, 계약자.》
강한 적과 마주친 탓일까, 아르마의 열정이 불타올랐다.
《어떤 무기를 원하냐, 계약자?》
“너클로 부탁해. 다시 한번 불꽃 펀치다.”
《강철보다 단단한 주먹, 그것은 닿지 않는 것도 닿게 하느니.》
나는 아르마너클을 착용하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시 한번 죽여 주마.”
* * *
『남문 전투』
정령사 로헨과 그녀의 정령들
VS
마수 조련사, 그리폰, 맨티코어, 유니콘, 늑대인간들
* * *
“어, 음? 왜 마수들이 있는 거야…?”
깊은 밤, 학생들은 다 자고 있을 무렵.
혼자 밖에서 서럽게 울던 루시엘은 그 덕에 결계를 깨고 들어온 마수를 제일 먼저 확인할 수 있었다.
“고블린?”
하급 마수, 고블린들이었다.
하급 중에서도 최하급으로 약한 놈들이었지만 그 수는 무시할 수 없었다.
“도와줄 사람을 깨워야 하나…?”
『언니 흉내라도 내 보아라.』
환청처럼 그녀 어머니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흥, 이런 건 나 혼자서도 해치울 수 있다고.”
“그워어어어!”
오크들도 몰려왔다.
하급이지만 고블린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놈들이다.
“혹시, 리안나 양을 불러와도 될까요? 마수 친구들?”
“크오오오오!”
아무래도 잠시 동안의 도망을 허락해 줄 용의가 없는 듯했다.
“에잇, 나 혼자 시간이라도 벌어야 하나?”
“루시엘 양?!”
뒤에서 누군가가 루시엘을 큰 소리로 불렀다.
“루시엘! 위험해요!”
“리안나 양? 저, 갑자기 이놈들이 쳐들어와서!”
잠에서 깬 리안나가 1층에 내려와 있었다.
“이게 무슨… 잠에서 깼더니 라헬 양이 어디론가 사라져서 찾으러 나왔는데, 결계가 깨져 있네요…?”
“실프(風)!”
서걱!
루시엘을 향해 단검을 던진 고블린.
던져진 단검이 바람의 힘을 받아 그대로 되돌아갔다.
“꾸에엑!”
자신이 던진 단검에 찔려 죽어버린 고블린.
“흐어, 내가 죽였어…!”
지금까지 실전 경험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루시엘에게 살해라는 미션은 꽤나 난이도가 높았다.
“키엑, 꾸에에….”
그 숨을 거둔 고블린을 보며 자신이 죽였다는 것에 잠시 주춤했지만, 루시엘은 이내 어머니의 말을 떠올렸다.
‘언니는, 모험하면서 이보다 더한 것도 하셨을 거야.’
루시엘은 뒤에 서서 어쩔 줄 모르는 리안나에게 크게 소리쳤다.
“리안나! 빨리 선생님들을 모시고 와 줘요!”
“그렇지만…!”
저번 화염코뿔소 때는 리안나와 로헨이 싸우고 루시엘은 그저 선생님을 불러오는 역할에 그쳤다.
그녀 역시 로헨과 같이 싸우고 싶었지만, 이런 전투에 있어서 이 학교에 있는 누구보다 경험이 많은 로헨의 말이기에 거부할 수 없었다.
‘이젠, 내가 나설 차례야.’
적의 수는 대략 20마리쯤. 처음 발견했을 땐 대여섯 마리였는데 우물쭈물하다 보니 어느새 20마리까지 불어났다.
아마 이 뒤에서도 마수들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겠지.
“실프! 실프! 실프!”
바람의 칼날이 적의 다리를 베고, 무기를 든 손을 잘라내고, 눈을 찔렀다.
“크르르르….”
“크어어….”
하지만 생각 외로 데미지가 크지 않았다.
‘마수 조련사는 자신이 다루는 마수들의 능력을 강화한다는 이야기를 예전에 로헨 님께 들은 적이 있어.’
아예 급을 바꿔버리는 수준은 아니지만, 하급 중 최하위권인 마수 혹은 마물들이 하급 중 상위권 수준이 된다고 한다.
지금 고블린과 오크들. 전부 1.5배씩은 강해져 있는 것이다. 이를 테면 슈퍼 고블린과 슈퍼 오크.
“에클레어(?)!”
빠지직!
“돕겠습니다.”
루시엘이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리안나가 결연한 표정으로 정령술을 시연하고 있었다.
고블린 한 마리가 전격에 감전돼서 불타 쓰러졌다.
그리고 그 옆으로 전격이 옮겨갔고, 그 뒤의 오크에게도, 그 옆의 고블린에게도. 연속으로 강력한 전격이 가해져 노릇하게 구워져 버렸다.
“역시 전기의 정령이네요.”
정령마다 그 쓰임새는 다르다.
불의 정령, 전기의 정령은 화력이 강하고, 바람의 정령이나 땅의 정령은 여러 다채로운 방향에서 활용된다.
그런 면에서, 이런 전투 상황에서 중급 전기 정령사, 그중에서도 재능이 충만한 정령사인 리안나는 전장에서 엄청난 조력이 된다.
“근데, 선생님은 데려오시지 않는 건가요?!”
“다른 학생 분한테 부탁했어요!”
한 명은 바람 칼날을, 한 명은 전격파를 날리면서 마물들을 썰어버리며 대화를 나누는 광경이었다.
“네? 다른 분이요?”
“지금 이 소란에 편히 주무시는 분이 대단한 거죠….”
루시엘은 전투에 몰입해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 하나둘씩 깨어난 학생들이 선생님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루시엘과 리안나는 조금만 버티면 되는 상황.
“루시엘 양! 뒤로 물러나요!”
“네!”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온다.
검은색 구름이 추악한 마물들을 집어삼키러 온다.
그리고, 번개가 내리친다.
“크어어어어!”
끝으로, 하늘이 울부짖었다.
콰르르릉!
“꾸, 꾸어…!”
“키에엑….”
벼락에 맞아 수많은 고블린과 오크들이 불타버리고, 살아남은 마물들조차 리안나에게 접근하기를 두려워했다.
마수 조련사에게 충성을 바치고, 목숨조차 바치도록 세뇌된 그들이었지만, 눈앞에 닥친 죽음의 공포는 그 명령조차 뛰어넘었다.
“뭐야, 당신도 천재잖아요. 리안나 양.”
리안나에게는 들리지 않게, 루시엘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