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 잃어버린 정령사-21화 (21/40)

〈 21화 〉 어머니와 딸

* * *

상급 불의 정령이 미쳐 날뛰는데, 학생 한 명이 그 재앙을 막으려고 홀로 몸을 던졌다.

그것이 하겔이 판단한 현재 상황이었다.

“이럴 수가….”

뛰어난 학생이었다. 그래서 더 기대되기도 했다.

고작해야 중급 눈의 정령으로 계절을 변화시키는 위력을 보여준 그 잠재력은 엄청났다.

이 소녀는 불꽃. 고작 이런 곳에서 사그라지면 안 되는 불꽃이었다.

하지만 하겔을 포함한 이곳의 엘프들은 학교라는 기관을 책임지고 지키는 선생들이었다.

심지어 숲을 사랑하는 엘프라는 종족이다. 학교에 불이 나는 것은 그들의 자긍심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학생 한 명을 구하고자 학교가 전부 불타버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터벅.

“비교가 될 리 없지.”

하겔의 두 팔이 화염으로 휩싸였다.

“저도 돕겠습니다.”

“나도 돕지.”

“학생이 있어야 학교가 있는 것이라네.”

하겔을 제외한 선생들도 동의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저 화염 벽을 없애버리고 안에 갇힌 여학생을 구하고자 했다.

“그럼, 돌파하겠습니다.”

두 팔에서 퍼져 온몸에 화염을 휘감은 하겔은 허공으로 도약할 준비를 했다. 저 화염 벽을 투과해야 학생을 구할 수 있다.

그때였다.

­파앗!

화염 벽이 사라지고, 이곳저곳에 붙은 불씨가 사그라들었다.

저 멀리 파란 머리의 소녀, 라헬과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불의 정령이 보였다.

다행히 라헬은 조금 그을리긴 했지만 불타 죽지 않은 채 살아 있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불의 정령도 온순해진 듯했다.

《…가 …왔다.》

둘 다 아직 하늘에서 대화하는 중이라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아마 라헬이 저 상급 정령과 우호 관계를 맺은 듯했다.

그리고 그들은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저렇게 허공에 떠 있을 수 있다는 건 라헬이 눈의 정령뿐만 아니라 바람의 정령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다중 속성 계약자.’

물론 중급 정령이지만, 두 속성의 정령을 동시 소유하다니.

정령술 테스트 때부터 예감은 했지만, 이 여학생은 세계의 운명을 크게 뒤바꿀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

라헬이 지상에 착지한 뒤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어떻게 정령이 풀려났고, 또 어떻게 이 정령을 진정시킨 건지 전부 고해야 할 것입니다.”

할머니 엘프 선생님이 라헬을 꾸짖었다. 하겔도 그 의견에는 공감이 갔다.

하지만 그 결계는 엘프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방어막. 그러나 라헬은 분명히 인간이다.

엘프 문자를 전문적으로 익힌 프로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해제할 수 없는 결계다.

물론 하겔을 비롯한 엘프 선생들은 그들의 종족 중에 내통자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라헬을 용의자 목록에서 배제하니 누구인지 예상을 할 수 없었다.

“어… 제가 이곳을 지나가던 와중에, 누군가 문을 여는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라헬이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가 본 것을 진술했다.

“누구인지 인상착의를 확인했나?”

하겔은 잠시 고민한 뒤 라헬에게 질문했다.

“얼굴은 보지 못했고, 뒷모습은 봤습니다.”

“어땠지?”

“귀가 뾰족했고, 피부는 흑갈색이었습니다.”

그러자 백발의 할아버지 엘프 선생님이 경악했다.

“설마 다크 엘프…? 다크 엘프라니, 이런….”

하겔도 다크 엘프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어릴 적 부모님들이 들려주는 동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

마왕의 힘에 이끌려 타락한 엘프들은 그 하얬던 피부가 어둡게 변해버린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본 경험은 없었기에 허무맹랑한 소문이라고 취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 다크 엘프를 목격한 자가 나타났다.

무언가 좋지 않은 낌새가 들었다.

* * *

“괜찮겠지….”

학교가 끝난 후, 루시엘은 왕궁으로 향했다.

낮에 학교에서 소환한 정령이 마구 날뛰어 부끄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상급 정령을 소환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녀의 언니, 메리엘도 정령 소환술 수업 때 바람의 정령, 진을 소환해 계약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불의 정령과 계약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다음, 혹은 다다음에는 또 착한 상급 정령을 소환해 계약할 수도 있다는 희망에 신이 났다.

‘어머니한테 말씀드려야겠다.’

메리엘이 사라진 뒤로, 루시엘과 여왕, 클라우디아의 사이는 굉장히 어색해졌다.

여왕은 루시엘이 만족스럽지 않았고, 루시엘은 너무나도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시에, 어머니가 자신을 보며 아쉬워하는 것을 느끼고 있어서 억지로 만남을 피했다.

그렇게, 둘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그러나 상급 정령을 소환한 것은 루시엘이 메리엘에 밀리지 않을 만큼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루시엘은 여왕, 그녀의 어머니, 클라우디아 엘피디아에게 그 사실을 자랑하러 가는 것이었다.

‘뭐, 조금 사건이 있긴 했지만 괜찮겠지?’

* * *

“그래서, 제가 오늘…!”

오랜만에 대화하는 모녀 사이였지만, 루시엘은 그녀 특유의 친근한 매력을 발휘해 최대한 스스럼없이 대화하려 노력했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표정은 쉽게 밝아지지 않았다.

‘어라, 내가 뭐 잘못한건가…?’

처음에 자랑하고자 방문했던 루시엘의 자신감은 점점 떨어지고, 몸은 조금씩 웅크려져 태도가 소극적으로 변해갔다.

“상급 정령을 소환했다고.”

그때, 여왕이 나직하게 말했다.

“네, 넵! 불의 정령이었어요….”

처음으로 반응을 보인 어머니가 반가웠던 루시엘은 긴장 반, 고마움 반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여왕의 표정은 그대로 무표정이었다.

“그런데, 그 정령이 폭주해서 그 교실을 빠져나와 학교를 불태울 뻔했고?”

“네? 아뇨. 나오지는 않았고, 저만 다치고 다른 선생님들이 대신 제압… 하셨어요…….”

“또 네가 일을 저지르고 다른 이들에게 뒤처리를 맡긴 거구나.”

숨이 턱 막혔다.

손에서 땀이 삐질삐질 났다.

자신이 서 있는 자세도 뭔가 엉거주춤하게 느껴졌다.

“그러려던 게 아니라….”

시선이 점점 내려갔다.

어머니와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됐다. 돌아가 보거라.”

아무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빛이 루시엘을 바라보는 순간, 루시엘은 자신에게 화가 났다.

‘50살 넘게 먹어 놓고, 아직도 어머니께 반항 한 번 못해 봐?’

그래서, 루시엘은 자기 마음 가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여왕 폐하, 아니. 어머니!”

“뭐라…?!”

어머니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지만, 루시엘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상급 정령을 소환했다고요. 칭찬 한 번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네가 애니? 너는 차기 여왕이다. 여왕이 될 몸이라고. 고작 그런 거에 일희일비하면 되겠느냔 말이다.”

“그치만, 언니가 해냈을 때는 칭찬해 주셨잖아요….”

고작 몇 마디 만에 꼬리를 내린 루시엘은 끝내 언니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머니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이제 메리엘은 없다.”

“어차피 언니가 돌아오면 저는 다시 버려지는 거잖아요!”

“그만하거라.”

“전 단지 대체품인가요? 어머니께 전 도대체 뭔데요?”

“그만하라고 말했다.”

루시엘의 열등감이 폭발했다.

“언니가 그렇게 좋으시면 애초에 나가지 못하게 막으셨어야죠!”

“그만하라니까!”

­짝!

루시엘의 오른쪽 뺨이 부어올랐다.

여왕이 화를 참지 못하고 손을 올려 루시엘의 따귀를 때린 것이었다.

“그래. 나가지 못하게 막았어야 했다. 메리엘이 실종? 실종…? 마계에서 혼자 남겨진 차기 엘프 여왕이, 대체 무슨 일을 당할지 상상이나 해 봤니…?”

“…….”

“메리엘이 돌아올 거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루시엘은 꾹 참았다.

어머니 앞에서 어린아이마냥 질질 짜지 않는 게, 그녀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그래, 넌 네 언니보다 못해. 그래도, 흉내라도 내 보면 안 되니? 어쩜 차기 엘프 여왕이라는 칭호를 가진 아이가 학교를 불태울 뻔하고 그걸 자랑이라고….”

“죄송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루시엘은 뒤로 돌아 왕궁을 떠났다.

그리고 기숙사로 걸어가는 중 최대한 울음을 참았지만, 결국 터져버리고 말았다.

“흐윽….”

어깨가 떨리고, 눈물이 빨갛게 부은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 방울, 두 방울.

조금씩 흘러 눈앞이 안 보일 정도가 되고, 그녀는 기숙사에 도착해 그 앞 계단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어머니가 미우면서도 그녀의 말이 틀린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시엘은 차기 엘프 여왕으로서 현 여왕을 만나 오늘 제 일을 자랑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부족한 딸로서 어머니께 칭찬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어머니가 미우면서도, 아직 자신이 한참 어리고 부족하다는 것이 슬프면서도, 언니를 진심으로 걱정했던 적이 한 번도 없던 자신이 혐오스럽기도 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심정이 뒤섞여 눈물만이 흘렀다.

그렇게 구슬프게 엉엉 울었다.

한참 동안 울어 이제 좀 진정이 될 즈음, 눈물에 가려 흐리게 보였지만 저 멀리 하늘에서 뭔가 터지는 것이 보였다.

“훌쩍… 응, 뭐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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