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 잃어버린 정령사-20화 (20/40)

〈 20화 〉 고귀한 화염

* * *

“나를 기억 못 하는 거냐?”

당황스러웠다.

일단 만나기만 한다면 재계약은 쉽게 진행될 줄 알았는데, 정령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가?

혹시, 어쩌면….

“난 로헨이다. 정령사 로헨, 네 계약자!”

《로…헨. 로…헨?》

이그니스는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꺄아악! 무어냐, 왜 생각하기만 했는데 머리가 깨질 듯이, 아아아악!》

“이그니스? 괜찮은 거야?!”

이제 알겠다.

이그니스는 기억을 잃었고 내가 그녀의 계약자였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것이다. 아예 로헨이라는 인간을 잊어버린 건가.

심지어 나를 떠올리니 머리가 아프다는 것을 보니, 마왕이 무언가 술수를 부린 게 분명하다.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가는 저주,

그것은 내 정령들과 헤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나와 정령들과의 인연, 추억 그 자체를 앗아가는 것이었다.

“음, 잘 기억 못 할지도 모르겠지만, 난 너와 친했던 인간이야.”

《내가… 기억을 못 해?》

“그러니 일단 침착하고 나와 계약을…”

이그니스는 그 머리를 붙잡고 있던 손을 내리고 나를 향해 손짓했다.

《네게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 정령을 유혹하는 냄새.》

“어… 응, 대충 알고 있어.”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 뭔가… 기분이 나빠.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느낌일까. 잠깐… 으윽!》

그 말을 끝으로 급히 하늘로 떠오른 이그니스,

­퍼어어엉!

“노움(?)! 방벽을 세워!”

하늘에 떠오른 이그니스가 주변 공간에 뜨거운 화염을 방출했다.

마치 폭발하는 것처럼 강하게 분출한 화염이 덮치기 전에 흙벽을 세워 나는 나의 몸을 지켰다.

­투둑, 툭.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염이 온 세상을 뒤덮는 것 같았다.

공중에서 터져서 건물 전체가 불타는 등 큰 피해가 없어 그나마 다행이지만, 문제는 조금이지만 학교에도 불이 옮겨붙었다는 것이다.

《으윽, 으…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소녀의 화염이 통제되지 않고 멋대로…》

뭔가 불안정한 상태인 건지, 이그니스의 화염이 그녀와의 의지와 관계없이 멋대로 터진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 피해를 최소화하려 공중으로 올라간 건가.”

그녀의 자유의지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따금 강한 위력의 화염이 멋대로 방출될 뿐, 이그니스가 원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도망쳐라, 지금 내 상태는 위험하다. 부끄럽지만 조절이 되지 않는다… 끄아아!》

“노움(?), 운디네(?)!”

흙으로 된 벽으로 공중에 떠 있는 이그니스를 가뒀다.

­콰앙!

“역시, 부족하네.”

중급 땅의 정령이 상급 불의 정령 이그니스의 화염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내 이그니스는 상급 중에서도 최상위권.

운디네가 이곳저곳에 붙은 불씨들에 물을 뿌려 진화해 주었지만, 나 혼자서 막기에는 솔직히 부족했다.

저 화력을 어떻게 견딘다?

《절대 뚫리지 않는 방패, 쉽사리 불타지 않는다.》

‘아르마(?)?’

아르마가 원형의 방패로 변했다.

‘이건?’

《화염을 막을 방책이다. 힘내라, 계약자!》

‘그나저나, 넌 무기의 정령 아니었냐. 방패도 가능한 거야?’

《무기는 싸움에서 상대에게 상해를 입히는 도구. 방패로 때리는 놈들도 있다!》

그런 거였군.

“이프리트(?), 내 몸을 둘러싸렴,”

이그니스의 화염만큼은 아니지만, 조금 온도가 낮은 불꽃이 내 몸을 휘감았다.

내 신체에는 위협을 가하지 않지만 밖으로부터 오는 화염은 방어한다… 그래, 마치화염의 갑옷.

“실프(風)!”

이그니스처럼 나 역시 공중에 떴다. 그녀를 잡아서 진정시키고, 어떻게든 계약한다.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

“저기다!”

“정령이 빠져나왔다!”

“포획해!”

“봉인해라!”

한편, 학교 선생님들도 봉인이 풀린 것을 감지하고 다들 이쪽으로 모여들었다.

“라헬? 위험해요!”

담임 선생님이자 엘프 궁수인 레이첼도 달려오고 있었다. 정령 선생 하겔과 백발 할아버지, 그 외에 여러 선생님들도 다같이 주변에 옮겨붙은 불들을 진화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곤란한 점이 있었다.

지금 여기서 갑옷을 입고 싸우고 있는 인간 정령사. 심지어 그들에게는 어제 입학한, 낯선 인간일 것이다.

근데 갑자기 가둬놨던 정령이 해방됐고, 그 앞에 밤을 틈타 몰래 기숙사에서 빠져나온 학생이 있다?

굉장히 의심스럽다.

‘나라도 의심하겠네.’

《다, 다 가까이 오지 말란 말이다!》

이그니스가 한 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다른 한 손을 휙 휘둘렀다.

그러자 화염 벽이 그녀 주변에 펼쳐졌다.

“실프(風), 가속!”

나는 순간적으로 가속해서 그 화염 벽 안으로 들어왔지만, 나보다 뒤에 있던 선생님들은 미처 들어오지 못했다.

《…너만 보면 머리가 깨질 것 같다. 통제되지 않는다. 누군가 소녀의 몸을 마음대로 희롱하는 것 같단 말이다. 그대는, 대체 누구인가.》

이곳은 화염 벽 안. 나와 이그니스밖에 없는 장소다. 다른 누군가에게 피해는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나를 잊어버렸다. 어떻게 하면 그녀가 나를 떠올릴 수 있을지 전혀 모르겠다.

나는 정령사,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 주는 마법사가 아니다.

뭔가 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

그렇다면,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다. 정공법으로.

“나는 로헨. 용사 파티의 정령사.”

《생각나지 않아. 잊으면 안 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생각나지 않는다. 잊어버린 것이 이름인가…? 꺄아아악!》

“운디네(?), 노움(?)!”

한 번 더 터져버린 발작성 화염. 흙벽과 물로 된 벽 여러 겹조차 간단히 박살냈고, 최후에는 아르마의 방패로 간신히 막아냈다.

“너가 기억할 때까지 몇 번이고 말해줄게.”

《그만, 그만….》

“나는 로헨. 네 계약자다.”

《머리가 아파….》

“나는 로헨. 자칭하기 부끄럽지만 대륙 최고의 정령사다.”

《모르겠다. 소녀는, 전혀…》

“나는 로헨. 고아였지만 파헬 아저씨께 구해져 살아남은 정령사다.”

《파헬…? 벨크 마을의 촌장. 그의 아버지 같은 남자. ‘그’가 누구지…?》

슬프지만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전부 기억하는 듯했다.

로헨이라는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강한 화염이 휘몰아쳤다.

“나는 로헨. 용사 에반의 동료.”

《에반…?》

“나는 로헨. 신궁 메리엘의 동료. 성녀 아리아의 동료.”

《메리엘? 아리아…? 알고 있다. 아리아는 죽었어. 메리엘은 사라졌다. 로헨은… 로헨은 누구?! 왜, 왜 생각이 안 나는 거야?!》

“바로 떠올리지 못해도 좋아. 생각해 내지 못해도 좋아.”

《하지만, 하지만 소녀는… 나는! 이대로 가면, 모두에게 피해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해주마.

내가 누구인지. 내게 네가 어떤 의미인지.

우리가 누구인지.

“네가 처음으로 상급 정령이 되었을 때, 난 울었다.”

《기억이…》

“네가 나를 세계 정점에 서게 해 주겠다고 했을 때, 감동했고.”

《기억해야…》

“평소에 차갑던 네가 나를 위로해 주는 건, 그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지.”

《기억해야 한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뜨거운 열기 때문에 곧 증발했지만, 착시가 아니다. 분명히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나는 로헨. 너와 첫 전장을 함께한 정령사다.”

《첫 전장, 마수조련사를 토벌했던… 옆에 분명, 어떤 남자가…?》

“나는 로헨. 내 목표는 마왕을 해치우는 것. 너는 주인공이 되고 싶다며.”

《마왕? 주인공?》

고귀한 화염이 계속해서 나를 덮치고 있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시간은 없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깨닫고 있었다. 내 이름을 댄다고 해도, 이그니스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확실히 그녀에게 잊혔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를 잊어도 좋다. 내가 로헨이 아니어도 좋아.”

《넌, 대체… 누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처음부터?》

“그래, 처음부터.”

《…….》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 이름은 라헬 피스본. 너와 본 적도 없고, 너를 모르는 한 여성이다.”

《라헬 피스본.》

“너와 계약을 맺고자 하는 한 중급 정령사일 뿐이다.”

《정령사, 라헬 피스본.》

“나와, 계약하지 않겠나?”

이글거리던 화염이 멈췄다.

세계가 고요해졌다.

《계약하겠다.》

그 고귀한 목소리의 수락과 함께,

­쨍그랑!

이그니스의 몸 주변에 있던 보이지 않는 벽이 깨졌다.

《라헬, 라헬, 라헬, 라헬, 라헬….》

그녀는 계속해서 내 이름을 곱씹었다. 어떤 방법이 있을지 고민했지만, 이 방법밖에 없었다.

일단은 새로운 신분, 라헬이라는 정령사로 계약한 뒤 천천히 그녀와의 관계를 재정립한다.

우리의 기억, 추억들은 이제 내게만 남는다.

과거는 잊어도 괜찮다. 앞으로 새로운 추억을 쌓아나가면 된다.

하나씩,

하나씩,

그런데 왜…

《어째서…》

“……응?”

《울고 있는 것이냐?》

이그니스는 찾았다.

하지만 나와의 추억을 기억하고 있는 이그니스는 죽었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속 어딘가 아파져 왔다. 쓰려왔다. 답답했다.

우리의 과거를 잊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로헨.”

《으, 으윽! 라헬이라고 했잖나…?》

“이그니스, 너는… 내 가족이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변했다.

내가 로헨이었을 시절그녀와의 추억을 없었던 일로 생각한 뒤, 이제부터 과거와 아예 다른 사람인 라헬 피스본으로 그녀의 계약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첫 번째 벽이 깨졌다.

《계약자, 이젠 무리다. 너무 타버렸다.》

“수고했어. 아르마.”

아르마 방패도 사라져 걸친 것은 화염 갑옷과 천 옷뿐. 한 번 더 이그니스의 화염을 맞는다면 죽는다.

"납득 못해."

추억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과거를 넘어 담담히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쨍그랑!

…그러자, 두 번째 벽이 깨졌다.

“이그니스….”

그녀가, 살며시 웃었다.

《무엇이냐, 소녀의 아름다움에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냐.》

…뭐라고?

《오랜만에 세상에 발을 디딘 소녀의 계약자가 이런 범부라니, 실망이 크구나.》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심장이 떨려왔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라. 소녀가 범부 따위에 불과한 계약자 그대를 다시 세계 정점에 선 사내로 만들 것이니.》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대사잖아….”

그녀가, 활짝 웃었다.

《계약자, 로헨이여.》

“응, 이그니스.”

《소녀가 돌아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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