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 잃어버린 정령사-19화 (19/40)

〈 19화 〉 엘피디언 아카데미(7)

* * *

“괜찮은 건가?”

할아버지 선생님이 교실 안으로 들어가고 곧 리안나를 데리고 나오셨다.

“리안나 양!”

“하, 하하….”

리안나는 실성한 여자처럼 웃고 있었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내가 그녀에게 걱정하는 어조로 말을 건네자, 할아버지 선생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 하급….”

“……?”

리안나가 뭔지 잘 알아듣기 힘들게 말을 했다. 하급, 이라고 말한 건가?

“하급 정령이 소환돼서 많이 놀랐던 모양이다.”

쯧쯧, 하는 혀 차는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 선생님이 진실을 밝혀 주었다. 이 말대로라면 그다지 큰일도 아니었다.

“기대를 많이 하면 이렇게 되는 경우도 있지.”

“하, 하급… 아버지, 어머니… 죄송해요….”

리안나는 계속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상심이 컸던 모양이다.

계속 부모님께 죄송하다고 헛소리하는 걸 보니 집에서 그녀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스스로 거는 기대가 많이 컸던 모양이다.

“음… 그럼 일단 마무리된 것 같고.”

리안나를 안정시킨 뒤 할아버지 선생님이 돌아오셨고, 옆 교실의 정령 선생… 하겔 씨도 곧 루시엘을 들여보낼 준비를 마친 모양이었다.

“들어가도록.”

“화이팅하세요! 라헬 님!”

“풉, 너도.”

나와 라헬은 서로 격려하고 동시에 각자의 교실로 들어갔다.

­드르르륵, 탁!

교실 문이 닫히자 거짓말처럼 밖의 소리가 작아졌다. 마치 이 안에서 무엇도 나갈 수 없게 막는… 다른 세계 같았다.

“소환 방법이… 보자.”

나는 앞에 소환 방법이 쓰여 있는 책을 읽었다. 역시 편리한 기술인만큼 요구하는 것들이 많았다.

일단 이렇게 준비된 공간에 마법진과 유사하게 생긴 정령 소환진이 전개되어 있어야 하고, 촉매들도 여럿 필요하다.

그렇게 소환진 위에서 영창을 하고 온 신경을 집중하면, 정령이 소환된다,

소환되는 정령은 계약자가 없는 정령뿐. 계약자가 없는데 일반 세계에 있는 중~상급 정령은 흔치 않기 때문에 일반 세계에서 소환되는 정령은 대부분 자연에 존재하는 하급 정령들이다.

그러나 정령사의 자질이 충분하다면 정령계라는 또 다른 세계에서 미계약 상태인 중~상급 정령이 소환된다.

만약 일반 세계에서 상급 정령이 소환된다면 내 정령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들이 정령계로 돌아갔을지도 모르겠지만, 모질게 나를 버리고 떠났으리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계약자 없는 정령이여, 정령사의 소환에 답해주십시오.”

나는 눈을 꾹 감고 정령 소환의 의식을 치렀다.

제발…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콰앙!

“무슨 소리지?”

눈을 뜬 내 앞에는 평범한 중급 물의 정령, 운디네(?)가 있었을 뿐이었다. 하급 정령도 아니고 중급 정령 여러 마리와 계약할 필요는 없다. 효율이 떨어진다.

하급 정령은 소모용이니까 많은 수와 계약하지만, 중급 이상부터는 정령 유지비용으로 인해 마나 낭비가 되기도 한다.

“소환 해제.”

솔직히 실망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보다는 밖에서 난 쾅 소리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 시급했다.

이 교실은 밖의 소리를 거의 차단하는데도 이렇게 소리가 들어온 거라면, 꽤 심각한 일이 생긴 것 아닐까? 어쩌면 마수 조련사가 벌써…

­드르르륵.

문을 연 뒤 보였던 광경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크, 크윽! 화력에서 밀린다!”

“나도 도움세! 으아아악!”

하겔과 할아버지 선생님이 교실 문 앞에서 온 힘을 다해 안의 무언가를 억제하고 있었고, 그들 뒤에는 루시엘이 쓰러진 채 학생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라헬 양! 루시엘이….”

“무슨 일이죠?”

나는 정신을 차린 리안나에게 다가가서 어찌 된 일인지 물었다.

“아마 루시엘 양이 상급 정령을 소환한 것 같은데… 적대적인 녀석이었나 봐요. 안에서 뭔가 쾅 터지고 루시엘 양이 다친 채로 뛰어나왔어요. 선생님들이 즉시 문을 닫았고 지금도 못 나오게 막고 계세요.”

대충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갔다. 루시엘의 몸은 안타까울 정도로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불의 정령이군요. 음…”

불의 정령이 갑자기 폭주하다니, 매우 위험한 사태였을지도 모른다.

루시엘과 선생들의 빠른 대처 덕분에 모두가 안전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루시엘과 라헬을 마지막으로 소환술은 끝났지? 다들 반으로 들어가렴!”

상급 불의 정령… 혹시 몰라서 들여다볼 수 있냐고 물어봤지만, 화들짝 놀라며 빨리 돌아가라는 말만 반복했다.

“지금은 일단 교실 안에 가둬 두고, 내일 몇몇 사람들을 더 불러서 강제 소환 해제시킬 예정이다.”

교실 문이 닫혀만 있다면 정말 안전한 모양이다.

그 짧은 시간에 루시엘이 저렇게 다칠 정도의 위력인데 불꽃 하나도 교실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그 안전성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라헬! 루시엘 양이 괜찮은지 보러 가지 않을래요?”

“그래요. 걱정되네요”

“아마 치유 전문 정령사에게 치료받고 있을 거에요.”

* * *

“아쿠아(?), 상처의 치유를.”

루시엘을 치료하던 정령사는 내가 예전부터 알고 있는 여자였다. 물의 상급 정령사, 데이지 플로스터.

공격 능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그녀의 정령 아쿠아는 치유 계열로 특히 잘 발달한 정령이었다.

지금은 학교에서 일하지만, 한때 그녀는 전장에서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린 천사였다. 성녀 아리아만큼은 아니었어도 그녀가 살린 생명의 숫자만 적어도 몇천은 족히 될 것이다.

“학생은 왜 그리 빤히 쳐다봐요?”

“아, 아닙니다….”

물론 데이지도 내 정체는 모른다.

“이 정도면 다 나았어요. 멀쩡하죠?”

“대단해요. 감사합니다…!”

불에 그을려 흉해진 피부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졌다.

“자, 자. 그럼 이제 다시 수업으로 복귀하세요.”

나와 루시엘, 리안나는 데이지를 떠나 다시 수업으로 복귀했다. 아직 몇 가지 신경 쓰이는 게 있지만, 일단은 미뤄둬야겠다.

* * *

수업이 끝나고, 오늘도 리안나는 도서관에서 공부, 루시엘도…

“저는 왕궁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어? 오늘은 도서관 말고 왕궁인가요?”

“네, 아무래도….”

그렇게 우리는 다들 갈라졌다. 난 기숙사로, 루시엘은 왕궁으로, 리안나는 도서관으로.

* * *

“지금쯤이면 괜찮으려나.”

깊은 밤, 도서관에서 돌아온 리안나와 같이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지금 리안나는 그녀의 방에서 쿨쿨 자고 있는 상태.

그런데 나는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확인을 해봐야겠어.”

《그 상급 정령 말이냐?》

아르마(?)의 말대로였다.

아무런 증거도 없지만, 왠지 나는 그 불의 상급 정령이 나의 이그니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만약 내 이그니스가 아니더라도…

이 부분은 여러 번 생각했었던 부분이다. 만약 나의 원래 상급 정령들이 아니라 다른 상급 정령들과 계약할 기회가 있다면, 하는 것이 맞을까?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하는 것이 맞다. 지금 상태에서 상급 정령 하나하나가 소중하니까. 하지만 내게 정령들은 가족과 같다.

형이 없다고, 동생이 없다고 해서 새로 하나 만드는 것과 같게 느껴져 쉽사리 결정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속성의 상급 정령들은 괜찮지만, 원래 오랫동안 함께했던 속성… 예를 들어 불의 상급 정령 이그니스를 다른 이그니스로 대체하는 건 뭔지 모르게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니까, 교실 안에 있는 정령이 내 이그니스면 좋겠네.”

나는 몰래 기숙사를 나와 그 교실로 향했다.

“흑, 흑흑. 흐어어어엉….”

무슨 소리지? 서럽게 우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벽에 몸을 바싹 붙이고 누군지 살펴봤다.

“흐흑!”

‘루시엘?’

뺨이 발갛게 부어오른 루시엘이 기숙사 앞 계단에 앉아서 엉엉 울고 있었다.

평소라면 가서 무슨 일인지 묻고 위로해 주겠지만,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미안, 루시엘!’

무시하고 가는 게 너무 미안하다. 마음속으로 루시엘에게 사과를 한 뒤, 나는 그녀를 피해서 교실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터벅, 터벅.

사람 없이 텅 빈 복도.

선생들도 다들 교실의 보호 마법을 믿는 건지 아무도 감시하고 있지 않았다.

“이건 너무 허술한 게…?”

아무리 그래도 지금 누군가 학교를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런 위험 장소에 아무도 없는 건 조금 실망스러웠다.

­철컥!

뭐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단순한 자물쇠는 아니었다. 문고리에도 강력한 보호 마법이 걸려 있던 것이다.

“아, 망했네.”

이렇게 되면 달밤의 교실 침입 계획은 실패다. 이 마법을 어떻게 깨부수는지도 모르겠고, 깨려고 시도하는 것만 해도 부담이 너무 심하다.

“엘프들의 마법이라 문자도 뭔지 모르겠네.”

­또각, 또각.

“허억!”

복도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발소리에 나는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이 시간에, 대체 누구지?

혹시 선생님들끼리 돌아가며 숙직이라도 하는 걸까? 내가 우연히 그 중간 교대 때 온 거고?

­철컥.

아니다.

내 시야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저 녀석도 지금 교실의 문을 열려 하고 있다. 나와 같은 이유, 정령과 계약하려고…?

혹은, 정령을 해방해서 학교를…

‘위험인물.’

나는 문을 열려 하는 자를 확실히 위험인물이라고 판단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멈춰야 하나?

저 앞에 있는 자가 자물쇠를 열지 못한다면 그걸로 끝이다.

하지만 자물쇠를 열 수 있다면, 위험인물을 제거한 뒤 내 원래 목표를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지켜보자.

자물쇠 마법을 해제한다면 나선다.

그 후 안에 들어가서 정령을 확인한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벗어나서도 저 녀석에게는 의심할 부분이 있다.

만약 저 자물쇠를 열어버린다면,

‘저 녀석이 내통자다.’

엘프들만 해제할 수 있는 마법이다. 저 방어 마법을 해제한 뒤 아카데미를 불태우려는 속셈이라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자가 엘프 내통자라는 게 확실해진다.

­쨍그랑!

마법이 깨졌다.

문이 열렸다.

­콰아아앙!

“이게, 무슨….”

해제하고 나서 복도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마법을 해제하고 문을 열기 전에 나설 틈도 없었다.

자물쇠를 해제하자마자 바로 문을 열어버린 것이다.

“거기 누구야? 노움(?)!”

저 멀리 도망치는 뾰족한 귀의 여성, 당연히 엘프라고 생각했지만 그 피부는 하얗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흑갈색에 가까웠다.

모든 엘프의 피부는 새하얗다. 흑갈색의 피부는 들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귀가 뾰족한 건 엘프만의 특성이 확실하다.

“크읏! 뭐지, 피부를 까맣게 태운 엘프인건가?”

노움을 이용해 그 엘프의 발을 묶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내통자는 믿을 수 없는 순발력으로 점프해 그 흙으로 이루어진 올가미를 피한 후, 학교의 건물 자체를 휙, 휙 뛰어넘어서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통자를 쫓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적대적인 정령이 세상에 풀려났다. 그 위력은 루시엘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복도 전체를 고열의 화염으로 가득 채울 정도.

실제로 복도에는 탄 냄새가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정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구나, 세상이여. 미천한 것들이여, 소녀의 강림 앞에 무릎 꿇어라.》

심장이 내려앉았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인간과 유사한 형체, 여성의 체형.

붉고 긴 머리카락, 붉은 드레스, 붉은 신발.

그 붉은색 사이에 조금씩 보이는 새하얀 피부.

그 오만하고 고고한 자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그니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응?》

그녀가 내 쪽을 쳐다봤다.

“이그니스… 드디어, 만났어…!”

그 그리움에, 그 반가움에, 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모습이 달라도 그녀는 나를 알아볼 것이다.

여태껏 알고 지낸 세월이 15년이 넘는다. 내 몸에 흐르는 마나만 봐도 내가 로헨이란 것을 알아챌 게 분명하다.

《누구냐, 그대는?》

“어…?”

《귀찮게 두 번 말하게 하지 말아라. 누군데 소녀에게 아는 척을 하느냐고 물었다. 계집.》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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