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엘피디언 아카데미(6)
* * *
“꺄하하! 성공했다, 성공했어! 꺄하하!”
“그워어어!”
엘프 마을 근처, 깊은 숲속에 수많은 마수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치, 기분 좋지, 곰돌아? 불뿔이의 희생으로 얻어낸 결과야~!”
사나운 짐승들에 둘러싸여 있는노출이 심한 복장의 숙녀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 모습을 보면 용감한 자들은 그 숙녀를 구해주려 할 것이고, 용기 없는 자들은 겁이 나서 도망칠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숙녀는 짐승들이 자신의 친구라도 되는 듯 편하게 말을 걸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배를 잡고 깔깔 웃으면서 흙바닥 위를 뒹굴뒹굴 구르고 있었다.
“여기 처음 와 보는데 이렇게 약해빠진 허접 결계를 믿고 몇백 년 동안 살아온 거야? 평화에 찌든 하얀 돼지새끼들 같으니라고! 꺄하하핫!”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신의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반응하는 짐승들. 더 두려운 것은 그 짐승들이 평범한 짐승이 아니고 사악한 마수라는 것이다.
“썩어빠진 쓰레기들.”
여자는 엘프 학교를 내려다보며 그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비웃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한동안은 침입하기 힘들겠죠오… 경비가 삼엄해질 테니까, 그 여왕이라는 년이 주변 나라에 살랑살랑 아양을 떨며 힘을 빌리고 있는 모양이니… 어휴, 천박한 년,”
자신의 복장이 더 천박하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있는 듯이 엘프 여왕을 조소하는 그녀의 정체는,
“이제 다들 알겠지? 마수 조련사님의 부활입니다~ 꺄하핫!”
터벅, 터벅.
흑갈색 피부의 여자가 자신을 마수 조련사라고 칭한 여자 앞에 다가왔다.
“으음?”
“…….”
“아, 그쪽이군요. 그쪽 덕에 엘프 마을을 찾아내고, 결계를 깰 수도 있었다구요? 자신의 고향을 자기 손으로 부수는 기분은 어때요오?”
“…….”
“대답이 없네. 재미없게. 그래도 당신의 충성심은 잘 알았어요. 마왕님께 전달해 둘게요~!”
마수 조련사가 계속 말을 붙이지만, 흑갈색 피부의 여자는 말없이 듣기만 하다가 물러났다.
“흐음. 분명 어디서 본 여자 같은데 말이죠.”
마수 조련사는 물러나는 여자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 * *
정령사 리안나는 요즘 들어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첫날에 믿기 힘들 정도의 정령술을 선보이는 파란 머리의 인간 정령사를 보며 처음에는 질투가 났다.
하지만, 어릴 적 부모님이 말씀하셨던 얘기가 떠올랐다.
『딸아, 네가 2등이라면, 1등과 친해지면 된다. 친해진 후에 그 비법을 빼앗아서 네가 1등이 되면 되는 것이다!』
돈 많은 엘프 귀족 가문의 외동딸인 리안나는 그런 야박하면서도 일리 있는 부모님의 조언을 무시하지 못했다.
『저기, 라헬… 님?』
그래서 리안나는 그 인간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친구가 되자고. 친구가 되는 과정은 점심 먹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놀랍게도 그 소녀는 차기 엘프 여왕인 루시엘이라는 소녀와도 친한 듯했다. 뛰어난 정령사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한낱 인간과 엘프 왕족이 이렇게 막역한 사이인지 의문이었다.
『다 먹고 말해라.』
『네에~』
심지어 그 루시엘을 하대하는 모습. 학교에 들어오기 전 조사한 결과, 전년도 수석이 루시엘이라는 사실을 리안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녀와 친해지겠다고 다짐했었지만, 이 인간 정령사, 라헬이라는 아이와 친해지니 자동으로 루시엘까지 친해져 버린 것이다.
‘아싸…! 이게 웬 떡이야. 공부 잘하는 애들 모임이잖아?’
하지만 리안나에게 무슨 악독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게 자신이 1등이 되기 위한 계략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친구가 고팠던 것이다.
『제가 학교를 안내해 드릴게요!』
그 후 루시엘의 안내를 받아 이리저리 학교를 돌아다니며 구경도 했다.
『저쪽으로 가면 정령왕 조각상도 있고, 저쪽으로 가면 역대 엘프 왕, 여왕님들의 동상들도 있고… 아! 저기는 물의 정령들로 만든 연못….』
아까 라헬이 흩뿌린 눈들이 덮여 더 인상적인 분위기였다. 리안나는 옆의 소녀들이 자신의 라이벌들이라는 생각도 잊은 채 그저 즐겁게 돌아다녔다.
‘아차! 이러면 안 되는데.’
그렇게 하하호호 웃으며 즐거웠던 하루가 끝나고 하교할 때가 되자 리안나는 자괴감에 빠졌다.
‘공부법을 알아내려고 한 건데 이렇게 편히 놀아 버리다니….’
시간은 금이다. 리안나는 그런 금을 순식간에 날려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때였다.
『우으… 난 왕궁 가서 공부해야 하는데.』
아쉽게도 리안나의 시선에선 1등이 확실한 라헬은 기숙사로 가서 쉬려 하는 분위기였지만, 전년도 1등인 루시엘은 공부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래도 왕궁은 조금 힘든데 말이지.’
『저도 도서관 가서 공부를….』
그러자, 루시엘이 바로 떡밥을 물었다.
『헐, 그럼 저랑 같이 공부하실래요? 리안나 양?!』
같이 공부하며 그 공부법을 빼앗는 것은 리안나에게 희소식이었지만, 왕궁은 그녀의 집이고, 그녀의 선생님들이 다수 포진해 있을 게 분명하다.
‘쉽지 않다.’
“저, 왕궁에 가기는 조금….”
그러자 루시엘은 기꺼이 리안나와 함께 도서관에 가겠다고 말했다. 리안나는 이렇게 일이 잘 풀릴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음… 이래도 되나?’
조금 죄책감이 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후 도서관에 가서 사서 비비안이라는 여자 엘프를 만났고, 공부는커녕 루시엘과 비비안과 잡담을 떨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라헬 님이 말이죠? 눈구름을 불러서 눈이 펑펑~”
“정말? 대단하네, 그 정도 하는 인간 정령사는 찾기 힘든데 말이지.”
“아, 으… 그쵸.”
리안나가 비비안의 말에 살짝 당황스러워하는 루시엘을 바라보자, 루시엘은 시선을 돌리고 다른 얘기로 주제를 바꿨다.
“음~ 그나저나 리안나의 정령술도 대단하더라고요! 천둥 번개가 우르르 쾅쾅!”
“에이, 아니에요. 루시엘 님의 바람이 더….”
“킥킥, 보기 좋네. 둘 다.”
비비안은 평소에 친구가 없어서 매번 자신에게 찾아오는 루시엘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런 루시엘이 친구가 생긴 것 같아서 흐뭇했다.
꼬르륵.
“어엇. 이건 제가 아니라, 그!”
루시엘의 배에서 난 소리였다.
“에휴. 다들 이제 공부는 그만하고 저녁 먹으러 가. 나도 일 좀 하자!”
“그래야겠어요. 루시엘 님, 기숙사로 가죠.”
“그래요… 헤헤.”
리안나는 웃고 있었지만 속은 활활 타들어 가고 있었다.
‘또 아무것도 못 알아냈어어어!’
리안나는 다음 계획을 열심히 생각했다. 이렇게 계속 공부를 뒷전으로 한 채 친목질에 빠져버리면 평범한 친구가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안 된다.
리안나에게 루시엘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밑거름이 될 경쟁 상대일 뿐.
“혹시 루시엘 양, 제 기숙사 방에 초대해도 될까요?”
“좋죠! 리안나 양 꼭대기 방이라면서요? 제 방보다 좋다니… 허억!”
“후후. 제가 저녁 차려드릴게요.”
저녁 먹으면서 공부 방법 유출. 그것이 리안나가 간신히 생각해낸 마지막 보루였다.
한편 루시엘은 충분히 꼭대기 층에 살 수 있었지만, 계단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귀찮아서 적당히 중간층에 괜찮은 방을 잡고 살았다.
“저녁 뭐 먹나요?”
꼬르륵.
“아하하, 당근 볶음을… 어라, 근데 그거 고기인가요?”
“아, 네… 제가 먹을 건 아니고! 라헬 님이 원하시는 거 같아서 미리 하나 사 뒀어요.”
“흐응….”
엘프 귀족인 그녀로서는 엘프가 채소가 아닌 고기를 먹는다는 건 매우 중대한 문제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리안나라 그랬다면 그녀의아버지가 노하셔서 잡으러 오셔도 거역하지 못 한다.
그렇게 자란 리안나는 설마 엘프의 왕족이라는 자가 고기타락해 버린 것인지 걱정이 되면서도 약간 그녀가 한심하게 느껴졌으나, 다행히 그 라헬이라는 인간 정령사에게 줄 음식이었다.
어느새 둘은 리안나의 방문 앞에 도착했다.
리안나는 하루종일 궁금했으나 물어보지 못한 것이 갑작스레 생각이 났다.
“그나저나, 루시엘 님은 라헬 님하고 무슨 관계….”
끼익.
“어?”
리안나의 질문이 루시엘의 의문사에 끊겼다.
“너희들이 왜 여기에…?”
놀랍게도, 그녀의 앞에 서 있는 ‘룸메이트’는 아까 낮에 헤어진 1등 정령사, 라헬이었다.
‘이렇게 운 좋을 수가.’
저녁을 먹으면서 이 둘의 비법을 전부 흡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리안나에게는 너무나도 운수 좋은 저녁이었다.
…딱 이때까지는 말이다.
쿵쿵 소리를 듣고 내려가 보니 거대한 코뿔소 마수가 결계를 두드리고 있었고, 어찌어찌 해서 라헬과 리안나가 제압했다.
‘힘들어… 대체 어떻게 저 여자는 힘든 기색도 없는 거지…?’
자신과 똑같이, 혹은 훨씬 고생한 그녀는 아무런 이상 없이 멀쩡했다.
리안나는 깨달았다. 라헬은 특정한 방법 덕에 강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천재.’
그것 외에는 설명되지 않았다. 그저 라헬은 정령에게 사랑받는… 재능이 충만한 아이였을 뿐이다.
『업힐래요?』
거기다가 상냥하기까지 했다. 리안나는 그 순간 라헬에 대한 쓸데없는 경쟁심이 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안녕히 주무세요, 하암. 라헬 님…』
리안나에게, 첫 친구가 생긴 하루였다.
* * *
“어… 그래서 정령 소환술이 뭔데.”
처음 들어보는 기술이었다. 정령은 자연에서 수집해서 하나 하나 키우는 것 아니었던가?
“하급 정령에서 중급 정령까지 키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중급 정령에서 상급 정령으로 육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잖아요?”
“그치.”
“그래서 최근에 발견된 방법이에요. 소환자의 역량에 따라 중급, 잘하면 상급도 소환될 수 있는 모양이에요.”
말도 안 돼.
“그럼… 내 인생은 어디로 간 거야? 물론 내 정령들을 키운 게 후회되진 않지만…”
내가 어릴 때 그 상급 정령을 소환한다던가 했으면 지금쯤 정령왕들이 몇 마리야?
“그래도 소환한다고 계약이 되는 건 아니에요. 하급 정령사가 하에서 중급 정령, 혹은 중급 정령사의 경우에는 아주 가끔 상급 정령을 소환하는데, 웬만하면 계약을 받아주진 않죠.”
“그런 거야?”
조금씩 마음이 놓였다. 다 계약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하지만 내 체질 상 이런 정령 소환술을 쓴다면 무조건 계약 성공할 것 같기는 하다.
이제 안 것이 조금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안 것을 다행이라 생각해야겠지.
“으으. 학교를 안 다니고 독학한 게 후회되기 시작했어.”
“그치만 나름 수석인 저도 작년 내내 중급 정령밖에 소환 못 했고, 위험한 상급 정령이 소환되면 재앙을 불러오기도 한대요.”
아무래도 상급 정령이 소환되는 경우는 매우 적고, 그마저도 자존심 높은 녀석들이 계약해 주는 경우는 소수. 심지어 깽판치는 놈들도 있는 모양이다.
터벅, 터벅.
우리는 걸어서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 교실 앞에는 우리 말고도 많은 학생이 줄을 서 있었다.
“저기도요.”
그 옆 교실 앞에도 말이다.
“자자~ 두 줄로 나눠 서렴. 이제부터 정령 소환술을 체험해 볼 테니까!”
저번에 봤던 그 하겔? 이라는 남자 엘프가 또 감독관이었다. 옆 교실 감독관은 화염코뿔소 사태 당시 달려왔던 백발의 할아버지 엘프.
“둘이 같이 왔네? 루시엘은 여기로~ 라헬은 저기로~”
“가지 말아요! 라헬 님!”
“좀 이따 볼 텐데 뭐.”
루시엘은 하겔의 교실로, 나는 백발 할아버지 엘프의 교실 앞으로 줄을 섰다.
“안녕하세요, 라헬 님.”
“어, 반가워요! 여기 계셨군요.”
이 정도면 운명이 아닐까. 내 앞의 엘프는 전기 정령사이자 나와 루시엘의… 친구. 리안나였다.
“기대되죠? 저는 상급 전기의 정령, 렐람파고(?)를 보고 싶네요… 상급 정령이 되면 인간형을 띄기도 한다는데, 제 렐람파고는 어떤 모습일까요.”
“저도 기대되네요. 상급 정령이 나오기는 할까요?”
사실 정령 소환술이라는 말을 듣고 아까부터 한 가지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었다.
내 정령들이 소환된다면?
어디 있을지 모를 내 정령들이 나의 소환에 반응해 찾아와 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도 실망이 큰 것은 싫어서 조금만 기대하는 상태였다.
“음… 그렇지만 전 제 에클레어를 렐람파고로 키우는 게 우선이에요. 정이 들었거든요. 헤헤….”
“정이 든 기분 잘 알죠. 저도 공감해요.”
그렇게 잡담을 떨고 있으니 벌써 리안나의 차례가 되었다.
“다녀올게요!”
리안나가 교실 안으로 들어가고, 다음은 내 차례였다. 루시엘의 줄도 이제 거의 다 줄어들었다. 다음 차례가 루시엘이었는데, 아마 나와 똑같은 타이밍에 들어갈 것 같았다.
“으음. 혹시 모를 소란을 대비해서 이 교실에서 정령들이 날뛰어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보호 마법이 걸려 있다네. 위험하면 바로 빠져나오게. 내가 들어가서 제압할 테니.”
리안나를 기다리는 동안 백발 할아버지 엘프의 경고문을 들었다.
“근데 아예 소환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다고 너무 상심하진 말고….”
“꺄아아아악!”
리안나의 비명?
“무슨 일이냐?!”
할아버지 선생님이 급하게 뛰쳐들어갔다.
…대체 무슨 일이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