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엘피디언 아카데미(5)
* * *
끼익.
기숙사로 나를 데리러 온 엘프는 여왕 알현실 앞까지만 데려다주고 떠났다. 알현실 안에는 그야말로 나와 여왕님 단둘뿐.
“오랜만이군요, 로헨… 아니, 라헬 양.”
“다른 사람들 없을 때는 로헨으로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여왕님 역시 내가 학생으로 아카데미에 입학했다는 사실을 알아채신 모양이다.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으니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원래 알던 사람에게 들킨 것은 살짝 부끄럽기도 했다.
“저, 어쩐 일로 부르신 건지….”
“두 가지 얘깃거리가 있어요. 일단 첫 번째, 저희가 교사, 혹은 교수직으로 모셔온다고 했을 때 완강히 거절해 놓고 학생으로 오신 이유가 뭔가요?”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으… 교사직으로 오면 귀찮은 일들이 많을 것 같았습니다. 애초에 저는 지금 교사직으로 오기 좀 그래요.”
“왜죠? 제가 힘을 쓴다면 신분 위조라도… 영웅을 위해 그 정도는 충분히 해 줄 수 있는 일입니다.”
“듣도보도 못한 인간 정령사가 갑자기 나타나는 것도 그렇고, 교사직은 상급 정령사가 기본이 되어야 하는데 전 사실상 지금 중급 정령사여서요.”
“네…? 중급이라뇨?”
아무리 여왕님이라도 이 얘기는 몰랐나 보다. 아르마(?)도 상급 정령이라면 그렇게 볼 수도 있기는 하지만, 나조차 그 존재를 몰랐던 정령이다.
듣도보도 못한 정령사가 듣도보도 못한 정령을 상급이랍시고 가져와서 상급 정령사 겸 아카데미 선생이 됐는데, 그 사람이 여왕과 공주와 친분 있는 사이라면?
여왕님의 뒷배가 있더라도 여러 가지로 시끄러워질 게 뻔했다.
애초에 오래 있으려던 생각도 없었고, 자퇴만 하면 금방 나올 수 있는 학생 신분이 책임이 적어 편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마왕에게 패배한 이후, 무언가에 당해 이전에 계약했던 모든 정령과의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는 저주’에 대하여 여왕에게 털어놓았다. 고작 며칠 전 알게 된 정보였지만, 그 정보 제공자가 스승님인 만큼 신빙성은 꽤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전에 마왕과 마주친 자들에게는 그런 보고는 없었을 터….”
“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용사 파티에만 쓴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저 그 쓰레기 같은 놈의 유흥일 수도….”
여왕님은 잠시 고뇌하더니 입을 열었다.
“메리엘은, 무엇을 잃어버렸을까요.”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도 마왕 측에 붙잡혀 있을 메리엘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나는 힘이 부족했다.
중급 정령사가 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생지옥 같은 마계에서 살아남기는 힘들다.
사실, 은연중에 나는… 메리엘은 이미 구할 수 없는 상태일 수도 있다고 멋대로 생각하기도 했다. 계속 아니라고 부정은 하고 있지만, 마계에 홀로 남은 용사 파티의 일원이 어떤 꼴일지는….
“일단 그대가 왜 라헬이라는 신분으로 엘피디언 아카데미에 입학하였는지는 알겠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이번 사태와 관련된 일인데….”
방금 있었던 결계 파괴 사건에 관해 말하는 듯 분위기가 더 무거워졌다.
“바로 대신들을 소집해서 무슨 일인지 의견을 나눴습니다. 그 결과 나온 결론은 하나뿐이었죠.”
“…….”
“마수 조련사.”
“그럴 리 없습니다.”
나는 여왕의 말을 딱 잘라 부정했다.
마수 조련사. 마왕군의 일곱 간부 중 한 명이다. 마족 여자로, 마수를 강화한다는 그 재능 때문에 마왕에 의해 어릴 적부터 훈련받았다고 한다. 일종의 마왕군 엘리트.
그녀가 다루는 수천 마리의 마수들은 그 강함이 배가 될 정도로 강화된다. 마수 군단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분명 1년 전 우리 용사 파티가 처치했다.
용사의 성검에 맞아 죽은 것을 확인했단 말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사망한 것을. 하지만 이 사태는 그녀가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으음….”
마수 조련사의 부활이라면 광산에 갑자기 나타난 거대 뱀이라던지, 이번에 강화된 화염코뿔소도 설명이 가능했다.
“일종의 정찰… 같은 걸까요.”
그녀가 진정으로 힘을 발휘해 수천 마리의 마수들로 이곳을 공격하면 분명 방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 그녀는 엘피디언 아카데미에 왔던 적이 없었고, 결계의 강도를 몰랐다. 그것을 시험해 보기 위해 정찰을 한 것이라면….
“이번에 결계가 깨진 이상, 그녀가 총공격을 가해 올 수도 있습니다.”
즉, 엘피디언 아카데미는 일생일대의 위기에 놓인 상태였다.
“하지만 어떻게…?”
엘프들이 모여 사는 엘프 마을,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웬만한 도시보다 훨씬 큰 이곳은 엘프 이외의 종족에는 매우 경비가 삼엄했다.
허가를 받지 않는다면 출입조차 할 수 없는 결계로 둘러싼 엘프 마을. 그리고 그 안에 침입 방지를 위해 이중으로 방어막을 둘러 세상에서 제일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엘피디언 아카데미였다.
“저희 종족에 내통자가 있다는 거겠죠.”
여왕이 씁쓸하게 웃었다.
엘프 마을로 들어올 수 있게 도와준 내부의 내통자가 있다면 이 마을 안에 들어오는 것도 간단할 것이다. 그 후 엘피디언 아카데미의 결계를 공략한 거라면, 말이 된다.
“마수 조련사….”
이빨이 뿌드득 하며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사망했던 그녀가 어떻게 부활해서 이 학교를 공격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총공세를 다하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주변 왕국 및 신전에도 협력 요청은 보낸 상태입니다. 가장 좋은 상황은 그저 저 화염코뿔소가 변종이거나 돌연변이일 뿐,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거겠지만….”
“제발 그러면 좋겠군요.”
“일단 학생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수업은 계속할 예정입니다. 아직은 가능성이니까…. 염치없겠지만 로헨 님께도 도움을 요청합니다.”
돕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은 메리엘 님의 고향이자, 루시엘의 집이다. 내 소중한 장소기도 하다.
“물론이죠. 옛날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제 몫 할 정도는 됩니다.”
“일이 생긴다면 최선을 다해 막아 주십시오. 뒤처리는 제가 다 하겠습니다.”
이제 긴급한 상황이 생긴다면 아까처럼 억지로 힘을 숨길 필요는 없다.
“그럼, 안녕히.”
나는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한 다음, 알현실을 떠나 기숙사로 돌아갔다. 아까 그 엘프가 내 호위를 해 주었다.
이런 사태에, 무명 스승님이 오셨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밤하늘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 * *
『범부에게 이 정도 수련은 과했던 것일까. 실망이로고.』
“아직, 아직 더 할 수 있어.”
언제의 기억이지.
『이만하면 됐다. 계약자여, 지금은 일단….』
“진짜로 더 할 수 있다니까? 다시 검을 들어!”
『소녀의 화염검은 이제 꺼졌다. 그대가 더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한 게지.』
“크윽….”
아, 용사 파티에 들어가기 전의 기억이다. 자존심 때문에 강해지려고 애쓰던 시절.
『수고했다. 계약자여, 그대는 충분히 열심히 했다는 것을 이 소녀가 보증하느라.』
그렇게 말한 소녀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 * *
“이그니스, 어때? 우리가 이 전장의 주인공이야.”
『후후, 소녀는 이 전장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주인공, 정령들의 주인공이니라. 소녀의 계약자가 돼서 이 정도에 만족한 것이냐?』
“물론 아니지. 이건 데뷔전일 뿐이야. 꼭 마왕을 해치우고 말겠어.”
이건…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용사에게 권유받아 그의 동료가 된 후 치르게 된 첫 전투. 위험한 전장에서 혼자 활약해 ‘천재 정령사’ 라고 불리게 된 곳이다.
『그 정도 배포라면 나쁘진 않구나. 허나 소녀에게는 그 마왕조차 중간 단계일 뿐이야.』
“네, 네. 그렇겠죠.”
그러고 보니 이때 적이 마수 조련사의 군단이었지.
『감히 소녀를 비웃은 것이냐?! 화염이 저 마물들이 아니라 계약자를 덮치는 꼴을 보고 싶은 게냐?』
“봐주세요….”
* * *
“일어나세요! 일어나세요!”
누가 이렇게 애타게 나를 깨우는 걸까.
꿈인 것은 안다. 하지만 이 달콤한 꿈을 조금만 더…
“지각이에요! 라헬 님!”
“이그니스… 조금만 더… 어어?”
지각이라고?
야단났다. 안 그래도 어제 온통 관심 집중됐는데 지각까지 하면…!
“저, 저는 먼저 나갈게요! 죄송해요!”
“네! 저 신경 쓰지 마세요!”
역시 모범생. 무슨 일이 있어도 지각은 절대 안 할 것 같은 엘프다.
급하게 씻고 나가자 당연히 아침 조례는 참석하지 못했고, 첫 교시 시작 시각도 훌쩍 지나 있었다. 그래도 안 씻을 수는 없잖아….
“어어, 라헬 학생 왔는가? 어서 자리에 앉게.”
정령술의 역사 수업 중이었다. 생각보다 뭐라고 많이 혼내거나 하지는 않아서 살짝 안심했다.
근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뭔가 죄책감이 들었다. 나쁜 짓을 하고서 혼나지 않았을 때의 죄책감.
이전에 용사 파티 시절, 아리아의 치즈를 대신 먹고 아리아가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때 느껴졌던 죄책감과 비슷한 종류다.
《딱 봐도 엘프 여왕이 뒤를 봐준 거다. 뻔하다. 후후.》
‘아르마? 여왕님이 뒤를 봐줬다는 게 무슨 말이야?’
《어제 엘프 여왕이 계약자가 이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예상가지 않는 거냐?》
‘설마, 내 정체를…? 그건 아니겠지. 그냥 귀중한 분이라 하고, 잘 챙기라고 충고한 정도이려나?’
《내 예상과 같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이 조금씩 내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러니까 맘 편하게 몰래 졸기도 힘드네.
‘이게 인맥인가.’
시골 출신의 고아 정령사였던 나로서는 이런 인맥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띵동댕동~
종소리가 울리고, 쉬는 시간이 되었다.
학생들이 다 바삐 움직였다. 다음 수업이 야외 수업인가?
“루시엘. 다음 수업이 뭐야?”
“다음 수업이요? 수업은… 아! 혹시 지금 학생들이 다들 바삐 움직이는 이유를 궁금해하시는 건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질문을 긍정했다.
“조례 때 선생님이 말해 주신 건데, 오늘은 정령 소환술을 해본다고 하더라고요. 지금부터 시작이에요! 설레죠?!”
“뭐라고?”
“정령 소환술이요!”
“…….”
얘가 지금 뭐라는 거지?
“혹시 정령 소환술… 모르시나요?”
“……응.”
진짜로 처음 들어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