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 잃어버린 정령사-14화 (14/40)

〈 14화 〉 엘피디언 아카데미(2)

* * *

“로, 로헨 님?!”

큰일 났다. 저 바보가…!

나는 씩 웃던 미소를 지우고 눈을 부릅뜬 채로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루시엘 양?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 친구는 라헬 양인데….”

자다 깨서 정신이 온전치 않았던 그녀는 일그러진 내 표정을 보고 잠이 확 깬 모양이다. 순간 얼굴이 겁에 질리더니 간신히 말을 고쳤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헛소리가 나왔네요, 아하하….”

“네….”

나는 여전히 루시엘을 째려보며 언짢게 대답했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루시엘이 살짝 안타깝기도 했지만, 아무튼 그녀가 잘못한 일이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다 자기소개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선생님까지 자기소개를 마쳤다.

“선생님은 궁술을 가르치는 레이첼이라고 해요~ 여러분은 정령술 위주 반이라 궁술은 서브 과목이겠지만, 궁술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답니다?”

이 학교는 중급 정령사, 하급 정령사, 중급 궁술, 하급 궁술 반으로 구성된 것 같다. 물론 정령사 반에서도 궁술을 배우고 궁술 반에서도 정령술을 배우지만, 서브 과목으로 배우는 느낌이 강했다.

물론 그 외의 여러 과목도 있지만… 크게 관심 없다.

“자, 그럼 쉬는 시간~ 궁술 시간에 봐요!”

­띵동댕동~

경쾌한 종소리가 울렸다.

“저, 저기….”

가만히 앉아 있던 내게 루시엘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잠깐, 나와 봐…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로! 아니, 라헬 님. 왜 여기 계시는 거에요오…?”

“사정이 있어서 오게 됐어.”

나는 팔짱을 낀 채로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하긴, 그녀로서는 놀랄 만할 일이기도 했다. 일어났더니 갑자기 눈앞에 내가 나타났다면, 그것도 말도 없이.

“정말 놀랐다고요. 라헬 님이 여기 계신다는 사실에 한 번, 그리고 이름을 잘못 불러서 한 번. 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나도 놀라서 쓰러지는 줄 알았다.”

“제가 어제 공부하다가 밤늦게 잠을 자서 졸다가 그만….”

루시엘은 멋쩍은 듯이 헤헤 웃었다.

“저희 학교는 처음이시죠? 제가 여기저기 안내해 드릴게요. 아, 근데 곧 수업 시간이네요. 아쉽지만….”

“이따 점심시간에 안내해줘. 수업은 어떤 걸 배워?”

그래도 나름 정령술 학교. 어떤 수업을 하는지도 궁금했다. 나는 정령술을 가르치는 재능은 없었기에….

“아마 첫날이니까 본격적인 수업은 하지 않을 것 같고, 간단한 테스트 정도 하지 않을까요?”

“테스트라, 어떤 종류의 테스트지?”

“그게요, 일단…”

루시엘의 다음 말은 듣지 못했다.

쾅! 쾅! 쾅!

기다랗고 두꺼운 나무 막대기로 여기저기를 툭툭 치며 교실로 들어가는 남자 엘프 때문에 루시엘의 말이 끊겼다.

“엘피디언 아카데미 제군들은 전원 착석하도록!”

그 남자 엘프 선생님은 교실이 떠나가도록 크게 호통쳤다. 저 사람이 테스트 감독관이려나?

“이제부터 중급 정령사 A반은 전원 운동장으로 나간다. 너희들의 정령술을 보여 봐라!”

루시엘이 말한 대로였다. 기대되는데?

* * *

나는 루시엘과 함께 조금 늦게 운동장에 나갔다.

“오오….”

대부분 이미 자신의 정령을 실체화해놓은 상태였다.

이 녀석은 땅, 저 녀석은 불… 오, 전기도 있네?

나는 아직 어떤 녀석을 소환하면 좋을지 고민 중이었다. 루시엘은 바람 속성이었지, 아마?

“벤투스(風).”

루시엘의 정령은 그녀의 언니랑 똑같이 바람 속성이다. 일부 학계에서는 정령술 속성이 유전이라는 말도 있던데, 나름 신빙성 있는 의견 같다.

자, 그럼 나는…

무난하게 가자면 불, 물, 땅, 바람 중에 고르는 게 좋겠지만, 난 남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남들 눈에 띌 필요는 없지만, 반대로 말하면 굳이 숨을 이유도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준비해 왔다. 그 녀석을.

“다들 정령의 개체마다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알고 있겠지? 중급 정령사면 그 정도는 알 거 아니냐, 대답!”

“네엡!”

정령사 학생들이 다 같이 크게 소리쳤다.

실제로 중급 정령부터는 정령사의 역량에 따라 각 개체마다 힘의 차이가 꽤 크게 난다.

하급은 개체별로 차이가 거의 없다시피 하고, 상급으로 가면 같은 속성이라도 특화된 부분이 달라 속성만 같지 거의 다른 정령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자, 다들 정령의 능력을 최대 출력으로 발휘해 보아라!”

그러니까 이건 말 그대로 정령사들의 싹을 보는 시험이었다. 될 놈인지 안 될 놈인지를 판가름하는 테스트. 즉, 여기서 서열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이번 차례는…차기 여왕님이시군. 루시엘!”

“다녀올게요!”

“파이팅.”

몇몇 학생들이 테스트를 마치니 곧 루시엘의 순서가 되었다.

테스트를 보러 가는 그녀를 응원해준 뒤 나는 그대로 구경하면서 기다렸다.

“몰아쳐라, 벤투스(風)!”

이미 소환되어 있는 구 모양의 바람 정령, 벤투스가 움직이니 루시엘 주변에 강력한 돌풍이 몰아쳤다. 루시엘의 정령은 확실히 중급 개체 중에는 상위권이라고 할 만했다.

저 정도면 한 10년만 열심히 수련하면 상급에 도달할지도 모르겠다.

저번에는 대체 왜 정령술 못한다고 징징거렸는지 의문이다.

“이프리트(?)!”

화염구를 날리는 남학생도 있고,

“운디네(?)!”

높은 수압의 물대포를 쏘는 여학생도 있다.

하지만, 그런 단순하고 흔한 정령사들은 내 관심 밖이었다.

혹시 중급 정령사가 갑자기 상급 정령을 소환한다던가… 이런 것까지 기대하지는 않지만, 조금 특이한 정령을 다루는 녀석 없나?

“다음은 엘프, 리안나!”

터벅.

금발, 졸린 눈. 굉장히 도도해 보이고 시크한 여학생이 앞으로 나왔다. 특징이라면 키가 매우 작다. 아무리 엘프라도 밤늦게 자면 저렇게 키가 안 크는 걸까.

리안나라고 불린 금발의 소녀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 정령을 불러냈다.

“에클레어(?).”

나는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정령술을 지켜봤다.

“이거지.”

나는 손에 땀을 쥐고 그녀의 정령술을 바라봤다.

세계 최대의 정령학교라는 곳에서 다들 지루하게 4원소만 쓰고 있는 꼴이 마음에 안 든 터다.

마침 그럴 때 중급 전기의 정령을 다루는 정령사 소녀가 나타난 것이다.

번개가 소리 없이 그녀 앞의 나무에 내리꽂혔다.

­우드득!

나뭇가지들이 충격에 견디지 못해 부러지고 에클레어의 낙뢰에 맞은 나무는 활활 불타올랐다.

­우르릉… 콰광!

하늘이 울부짖었다.

무차별적으로 운동장에 떨어지는 번개들. 이건 중급 정령 수준에서도 거의 최상급이었다. 나는 내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낙뢰에 맞은 나무가 불타서 생긴 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이건… 원석을 찾은 기쁨이다. 그 기쁨과 희열에 얼굴이 뜨겁게 상기된 것이다.

이런 제자들을 가르치고 키운 다음, 최전선에 배치하면… 얼마나 즐거울까.

무명 스승님이 왜 나랑 티론 같은 제자들을 소중히 아꼈는지 알 것도 같다. 이런 충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학생을 가르쳐 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어.

근데 나는 잘 못 가르치니까.

정령술 잘하면 뭐 하냐. 저런 원석 같은 아이를 가르쳐 주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흥분했다가 갑자기 우울해진 사이, 정령술 선생이 나를 호출했다.

“다음은… 인간 정령사, 라헬 피스본!”

“네~”

“인간이라니, 기대하겠다. 로헨 같은 정령사가 다시 나올 수 있으면 좋겠군.”

“하하, 열심히 하겠습니다.”

네. 제가 로헨입니다….

드디어 내 차례다.

기다리는 동안 어떤 정령술을 보여줄지 많은 생각을 했다. 불, 물, 대지. 바람 같은 기본적인 정령을 소환해 압도적인 강함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녀석을 부르든 간에 중급 수준에서 최대한 강한 화력을 뽑아낸 다음, 좋은 성적을 받는 게 제일 눈에 띄지 않으면서 자존심은 지키는 방법임은 확실하다.

아르마(?)를 소환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상급 정령은 조금 눈치 보이기도 하고, 녀석에게는 미안하지만 무기 정령은 딱히 임팩트가 크지 않다.

이전 사람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치게 했으니, 나도 그것과 비슷하게, 아니 그 이상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 임팩트라면, 충분할 정도로 보여줄 녀석이 있다.

“스노위(雪).”

* * *

분명 지금 계절은 여름이다.

아주 무더운 여름.

그런 여름에 정령 한 마리가 소환된다.

대기가 얼어붙고, 학생들은 몸을 움츠린다.

하늘에 구름이 생성된다.

그리고 그 구름이 잔뜩 머금고 있는 수분을 방출한다.

그것은 분명 비여야 했다. 그래, 여름이니까 이미 있는 구름들의 힘을 빌려 비를 내리게 하는 정령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변 환경을 이용해서 그 위력을 배로 하는 정령술.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여름이라 소나기가 많이 내리고 먹구름이 많은 환경을 이용해 폭우를 내리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수석은 따 놓은 당상이다.

그러나, 지금 정령술 선생 하겔의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구름이 뿜어낸 것들은 얼음 결정, ‘눈’이었다.

무더웠던 여름이 순식간에 겨울로 변해버렸다. 자연 그 자체를 조작하는 정령술. 6달을 그대로 스킵한 것처럼 계절을 아예 바꿔버렸다.

그 광경을 본 정령술 교사이자 시험관, 상급 불의 정령사 하겔은 잠시 생각했다.

‘이런 수준의 정령술을 내가 선보일 수 있을까?’

지금 상황과 반대로, 그의 불꽃이 겨울을 여름처럼 뜨겁게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불가능… 하다.’

하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애초에 저 정령이 중급 수준은 맞는 것인가?’

계절을 조작하는 건 최소 상급 수준일 텐데 어째서 중급 정령에서 저런 위력이 나오는 건지에 대하여 하겔은 의문을 가졌다.

“눈의 정령, 스노위(雪)입니다.”

그렇게 말한 뒤, 청발 청안 인간 소녀는 씩 웃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 그것은 자신의 능력을 믿는 그녀의 강한 자부심과 자신감에서 나오는 태도였다.

하겔은 자신의 기억을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눈의 정령, 스노위는 명목상으로는 중급 정령이 맞다. 분명 학계에서 그렇게 정해 놓았다. 상급 정령만큼의 기본 위력은 지니지 못했고, 상급 정령만큼 희귀하지는 않아서 중급으로 분류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범위가 달랐다. 위력이 달랐다. 수준이 달랐다.

대단했다.

고작 중급반 학생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하겔은 이런 자기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와, 눈이다!”

“여름에 눈이… 뭐야?”

“자연 조작 정령이 중급이라고? 말이 돼?”

“쟤가 1등이네.”

정령술에 재능이 없는 학생들은 눈이 오는 것을 보며 그저 신기해할 뿐이었다.

하지만, 정령술에 재능이 있는 학생들의 반응은 달랐다.

“말도 안 돼….”

금발의 전기 정령사 소녀가 중얼거렸다.

그녀 또한 자기 자신을 뛰어난 정령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희귀한 전기 정령 에클레어를 다루는 실력있는 엘프 정령사, 리안나.

그녀는 지금 진정한 재능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역시, 로헨 님….”

또 다른 한 명의 모범생, 차기 엘프 여왕 루시엘은 숨죽인 채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로헨이 모두의 이목을 끄는 것을 좋아하는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정령술을 보여줄지 기대했다. 빛과 어둠을 동시에 다루는 2속성 동시 소환일지, 어쩌면 3속성 동시 소환으로 불, 물, 바람을 조종할지… 이것저것 생각하며 로헨의 정령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로헨은 그녀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물론 상급만큼은 아니지만 중급 계열에서만 최고로 희귀하다는 눈의 정령을 소환한 것이다.

‘자연 정령은 구하기도 힘들뿐더러, 이런 위력은….’

원래의 로헨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발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면, 지금은 그나마 루시엘의 수준에 맞는 중급 정령을 소환해서 그런지 로헨의 대단함이 어느 정도인지 느껴졌다. 그래서 오히려 이전에 보이지 않을 만큼 까마득했을 때보다 더 두려웠다.

‘이래서 내가 로헨 님께 정령술 과외를 해달라고 졸랐던 거지. 분명 도움이 됐을 거야.’

사실 루시엘은 굳이 과외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과외로 배운 것도 없다.

그냥 로헨과 단둘이 있고 싶어서 정령술 과외를 졸랐던 거지만 이 광경을 통해 자신은 배움을 위한 거였다고 그녀 스스로 억지로 합리화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세계 최고의 정령사는 다르다고, 루시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반면 다른 두 명의 실력자는 살짝 다르게 생각했다.

‘로헨을 이을 천재 인간 정령사가 나타났다.’

리안나와 하겔은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 후, 펑펑 내리는 눈이 푸른 풀들로 뒤덮혀 있는 운동장을 하얗게 색칠했다. 라헬을마지막으로 학생들은 테스트를 마친 뒤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즐기며 놀았다.

“와하하하!”

“으으, 추워!”

…여름 복장이어서 추위를 타는 학생들도 꽤 있었지만 말이다.

그날, 운동장뿐만 아니라 엘피디아 아카데미 전역에 오전 내내 폭설이 내렸다.

"…첫눈이라고 해야 하나."

하겔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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