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1000년간 바라 왔던 죽음
* * *
나는 티론과 헤어진 뒤 무명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노크하자 그는 곧 문을 열어 주었고, 안에 들어가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았다.
“잠시 기다리게. 차라도 떠오겠네.”
차 떠오는 시간도 아까울 만큼 한시라도 빨리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일단은 기다렸다.
탁.
찻잔을 테이블에 올려놓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나는 말을 꺼냈다.
“이제 얘기해 주셔야겠어요.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긴 얘기가 될 것이다.”
“상관없어요. 백수라서 시간은 많거든요.”
무명은 큭큭 웃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는 1000년 전, 지금은 몇몇 역사책에나 적혀 있는 아주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네.”
* * *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형제자매도 여럿 있었다.
어린 시절은 평범했다. 자라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부가 되어 평범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의 목표였다.
실제로 그 목표를 어느 정도 이뤘다. 어린 소년은 어여쁜 소녀를 만나 결혼을 했고, 귀여운 아들과 딸을 하나씩 낳아 행복한 가정을 만들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나는 30대의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내 그런 일상은 평소와 같았던 어느 날, 낯선 남자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그와의 첫 만남은 몹시 특이했다.
“저기, 농부 양반. 길 좀 물읍시다.”
평소처럼 농사일하고 있는데, 모르는 남자가 내 쪽으로 다가와 길을 물어봤다.
내가 사는 마을은 산골의 아주 작은 마을. 이곳에 방문하는 외지인들은 1달에 1명 보기도 힘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외지인을 경계하곤 했지만, 나는 그들이 반가웠다. 외부 세계와 이어지는 통로 같아서 그들을 좋아했다.
“어디 가십니까?”
외지인에게 개방적인 나지만, 길을 묻던 남자는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정말 순수한 감이었지만… 알 수 없는 공포가 마음에 싹텄다.
“이 앞에 마을이 있다던데, 지나가는 나그네가 밥이라도 한 끼 얻어먹을 수 있을까 해서요.”
훤칠하게 생긴 은발의 20대 남자였다. 그의 기품과 행동거지는 귀족들의 그것과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저희 마을을 찾으시는 건가요. 저쪽으로 쭉 가서….”
나는 손가락을 가리켜 우리 마을 쪽으로 가는 길을 알려줬다.
불안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자에게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더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보답은 꼭 하죠.”
남자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다시 길을 향했다.
“이상한 느낌이군.”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린 뒤 다시 농사일에 몰두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내가 돌아갔을 때.
마을은 온통 불타고 있었다. 불이 났던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원인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나는 그때 은발의 남자가 떠올랐다.
“앤! 에드! 줄리!”
가족들이 안전한지 확인해야 했다.
아내 앤, 아들 에드, 딸 줄리.
찾아야 한다. 그들이 없으면 내 삶은…
“여보!”
“으아아앙!”
“아빠!”
그 화재 속에서 내 집만 이상할 정도로 멀쩡했고, 집 앞에 서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내 가족들 앞에는 은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당신…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들고 있던 짐을 전부 던지고 달려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워, 워. 왜 이러시는 건지….”
“네놈이 저지른 짓이냐? 대체 이게 무슨… 마을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거야?!”
그가 이 화재를 저질렀다는 증거 따위는 없다. 하지만 온몸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고.
“보답했잖습니까. 당신도 살았고, 당신의 가족도 살았습니다. 심지어 집도 멀쩡하지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아까 보였던 그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뭐?”
남자는 자신이 불을 지른 것을 긍정했다. 그리고 나와 내 가족들이 살아남은 것이 자신이 자비를 베풀어서라고 말하고 있었다.
“내가 길을 알려줘서… 내가….”
“딱히 상관 없어요. 어차피 길을 알고 있었고, 거기서 대답 안하면 죽이려고 했거든요.”
담담하게 소름 돋는 말을 하는 은발의 남자. 하지만 가족의 생사를 확인한 지금, 우선해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어디 있는 거냐!”
마을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전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디 있냐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전부 다 사라졌어… 아, 혹시 피난한 건가? 여보,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간 거야?”
아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검지를 뻗어 나를 가리켰다. 순간 의아했지만, 아내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내 뒤를 보고 있었다.
“어디를 보고 있는….”
뒤를 돌아보고 나는 경악했다. 마을 사람들이 전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상태는 전부 온전치 않았다.
배에 구멍이 뚫려 있다던가, 온몸이 화상 상처로 뒤덮여 있는 녀석도 있었고, 팔이나 다리가 한 군데 없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 마치 시체 같았다.
“으아아아악!”
나는 곧바로 비명을 지르고 혼절했다.
깨어났을 때는 우리 가족을 제외한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다.
마을은 전소됐고, 움직이는 시체가 되어버린 마을 사람들도 사라졌고, 은발 남자도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깨어나셨군요!”
아내, 앤이 내게 다가와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흐흑….”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 남자가 모든 일의 원흉이야.”
집의 모든 패물과 재산들을 챙기고 우리는 주변의 큰 마을로 향했다. 그곳의 책임자에게 내가 겪은 일을 얘기했지만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다.
“잊자. 잊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나와 가족들은 그 악몽 같았던 밤을 잊으려 애썼다. 그렇게 새로운 마을, 새로운 터전에서 적응해갔다.
하지만 그 남자는 시골 마을 몇 개를 터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커다란 도시를 부수면서 수많은 괴물을 데리고 다녔고, 그의 정체를 곧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그를 악마라고 불렀다.
수많은 전사가 그 악마를 죽이겠다고 나섰지만, 그중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음… 뭐. 어떻게 돼서 나는 그 은발 남자와 다시 마주치게 됐다.
* * *
“네? 잠깐만요. 중간에 뭔가 많이 빈 것 같은데요?”
파란색 머리의 소녀가 얼굴을 찡그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뭐가 비었다는 건가.”
“아니, 어쩌다 만나게 됐는지, 그리고 그 남자의 정체가 뭔지.”
“말 끊는 거 아니다.”
“그건 맞지만, 그래도 뭔가….”
“그래서 말이지.”
* * *
악마는 나를 보고 웃었다.
그 악마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악마에게 처참하게 공격당했고, 내가 정신을 잃기 전 그 악마는 내게 속삭였다.
「당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잃게 될 겁니다.」
눈을 떴을 때, 내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했던 말이 계속 귀에서 맴돌았다.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니….
나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가족들은 무사했고, 그 악마는 건재했지만 나는 이제 그에게서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렇게 5년이 지났고, 10년이 지났다.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잃게 될 거란 악마의 저주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고,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아갔다. 아들과 딸들은 어느새 성인이 되었고, 나와 아내는 40살이 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은 늙지를 않네요.”
아내가 내게 가볍게 던진 말이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0년이 지났다. 아들과 딸들도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었고, 아내도 늙어 주름이 생겼다. 하지만 나는 10년 전과 똑같았다.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런가, 하하.”
웃어넘겼다. 하지만 불안했다.
그리고 언젠가, 밭에 쳐들어온 짐승을 상대하다가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바로 집에 돌아가 치료를 받으려 했다.
“다친 곳이 없는데요?”
지혈용으로 대충 두른 붕대를 풀자 잠시 전만 해도 짐승에게 물려 피가 철철 나던 상처가 거짓말처럼 멀쩡해져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그 상처가 단 몇 분 만에 자연치유 되다니. 난 그때 내 몸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느꼈다.
“여보, 우리 마을을 떠나요.”
나보다 먼저 내 이상함을 알아챈 건 내 아내, 앤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제 아이들도 성인, 독립해야 할 때에요. 우리는 산속에서 우리의 삶을 살죠.”
“내 몸이 이상해서… 미안해, 앤.”
“아니에요. 사람 없고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었는걸요.”
그렇게 나와 앤은 단둘이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나무 열매를 따서 먹고, 주변 강에서 물고기를 잡고, 비정상적인 회복력으로 산속 짐승 사냥도 쉽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늙어가는 아내를 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나도 함께 그녀와 죽을 수 있다면… 나는 그제서야 악마의 저주를 깨달았다.
「당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잃게 될 겁니다.」
나는 내 가족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내 아내가 죽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 했고, 내 아들딸이 나보다 먼저 죽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 그게 악마가 내게 남긴 저주였다.
20년이 지났고, 30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그대로였고 아내는 머리가 온통 희끗희끗하게 변해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죽어가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당신 혼자만 이렇게….”
자식들도 부르지 못했다. 지금 내 모습을 원래 아는 사람에게 들키면 안 됐기 때문이다.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당신과 함께 보낸 30년이 가장 행복했는걸요.”
그 말을 끝으로 아내는 눈을 감았다.
나는 그 후로 산속에서 폐인처럼 살았다. 물을 마시지 않아도 멀쩡했고, 밥을 먹지 않아도 멀쩡했다.
인형 같았다. 항상 그대로인 강철 인형.
그러다가 언제는 한번 산 밑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다. 주변 대도시에서 누군가의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었다.
대상인 에드의 장례식.
그는 내 아들이었다. 아내가 죽은 지 어느새 몇십 년이 지났고, 내 아들조차 수명이 다해 죽어버린 것이다.
그 장례식은 며칠 동안 진행됐고, 나는 멀리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장례식에는 나의 딸이자 에드의 여동생 줄리도 있었다. 그래, 할머니가 된 줄리가 그곳에 있었다.
“줄리….”
다가가고 싶다. 몇십 년 만에 만난 딸. 내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같이 아내와 에드의 죽음을 애도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괴물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늙지 않고, 다쳐도 순식간에 회복되는 괴물.
나는 다시 산속으로 들어갔다.
평소에 좋아하던 검을 들었다. 아내가 나무를 깎아 만들어준 목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검만 휘둘렀다.
그렇게 정신이 나간 채로 100년, 200년… 내가 300살이 됐을 때쯤이었나. 산속에 누군가 찾아왔다.
“저, 산속에 미친 검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만… 본인이 맞습니까?”
말을 타고 온 그는 온몸에 두꺼운 철판을 두르고 있었다.
“…….”
“하늘에 거대한 고래가 나타났습니다. 이곳저곳을 부수며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지요. 온 나라의 내로라하는 강자들을 모아오라는 국왕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검성님도 계시고, 대마법사님도 계십니다.”
“…….”
“저기요, 선생님?”
“그 몸에 두른 철판은 뭔가.”
“갑옷 말씀하시는 겁니까?”
200년 만에 나온 세상. 하늘에는 구름 대신 거대한 고래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인간의 신체라고는 믿기지 않는 괴력, 200년간 수련한 검력, 그리고 다쳐도 곧바로 회복되는 몸으로 나는 그 창공의 고래를 지상으로 내리꽂았다.
“정말 대단한 업적일세! 이보게, 이름 모를 검사여. 원하는 것이 있는가?”
국왕이 뭐든 포상해 주겠다고 했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나를 죽여 주십시오.
하지만, 이 세상의 누구도 이걸 해낼 수는 없다. 국왕도, 검성이라는 인간도, 대마법사라는 인간도.
“저에 대한 모든 기록을 말소시켜 주십시오.”
그래서, 나는 그런 부탁을 했다.
100년 뒤 나타난 흑룡을 죽이고도, 200년 뒤 나타난 대악마를 죽이고도, 나는 똑같은 부탁을 했다. 그 덕에 나는 인간들의 역사에 남지 않았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완전히 미쳐서 왕국의 수도를 하룻밤에 괴멸시킨 적도 있었다. 물론 그때의 왕가는 썩을 대로 썩어서 많은 백성이 새로운 왕가를 찬양했지만, 그래도 나는 인간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몇백 년 동안 또 괴로워했다.
정신을 차린 나는 죽인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을 구하려고 애썼다. 용병이 돼서 조금의 돈만 받으며 위험한 마물들에게 위협받는 작은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마을을 지켰다.
아무도 죽지 않도록.
하지만 그런 용병 짓을 하면서도 불살주의를 지켰다. 나는… 너무나도 많은 생명을 빼앗았다.
이토록 애타게 죽고 싶어 하는 나지만, 언제부턴가 칼을 쥔다면 죽고 싶지 않아하는 마물들과 인간들의 영혼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또다시 생명을 빼앗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또 몇백 년 동안 신분을 바꿔 가면서 수많은 사람을 지켰다. 마물이라 하더라도, 죽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체 병사들, 요즘 말로 언데드들은 가차 없이 벴다.
그들은 이미 죽어버린 가엾은 영혼들이니까.
죽고 싶어, 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들은 나와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언데드들을 없앴고, 그다음 날 파란 머리의 소녀가 다가와 나를 추궁했다.
당신은 대체 누구냐고.
대답할 방법이 없었다. 나 역시 내가 누구인지 잊었기 때문이다.
“무명(無名).”
썩 나쁘지 않은 이름이었다. 이름이 없는 것이 이름이라니.
한편 그 소녀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갔다. 그녀가 포함되어 있던 ‘용사 파티’는 마왕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마왕에게 패배했다고, 그래서 남자였던 자신이 여자가 됐고, 정령들을 잃어버린 정령사가 됐다고 그녀는 얘기했다.
마왕에 대해서는 나 역시 알고 있었다. 아마 그 은발의 남자는 오랫동안 악마라고 불리다가 이제는 마왕으로 불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죽이자는 소녀의 말에 선뜻 찬동하지 못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제 소중한 것도 거의 남지 않았는데, 또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다면…
그래서 거절했다.
그 후로 며칠이 지났다. 그 소녀와 다른 소년을 제자로 받게 됐고, 그들을 가르치면서 몇백 년 만에 진정한 행복을 맛봤다.
그래, 난 그들에게서… 에드와 줄리를 보았다.
나의 아이들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겹쳐 보여서. 또 슬퍼졌다.
이 녀석들도 언젠가 나보다 빨리 죽겠지.
그래서 난 마왕을 죽이자는 소녀의 제안을 더 강하게 거절했다.
왜냐면…
이제 내겐, 너희들이 소중해졌기 때문이다.
* * *
“소중한 것을, 앗아가는 저주….”
이제 납득이 갔다. 무명의 말대로라면 아마 내가 잃은 소중한 것은 ‘정령’이겠지.
어릴 적부터 나와 함께한 정령들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여자로는 왜 변한 거지… 저주 2번 받기라도 했나. 두 번째로 잃어버린 소중한 건… 그곳인 건가?
한편, 무명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비극적이었다.
은발의 남자. 악마. 마왕.
1000년 전부터 존재했던 마왕과 1000년 전부터 존재했던 검사.
중간에 무명이 저주를 받는 부분이 조금 생략된 것 같긴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전부 솔직히 말한 것이라고 느껴졌다.
“저를 소중하게 생각하셨다니, 감동적이네요.”
“으윽…!”
“맨날 문전박대나 해서 싫어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 그건….”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 더욱 분명해졌어요.”
무명은 죽고 싶어 한다.
하지만 무명을 죽일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다.
“스승님은 마왕을 죽여야 합니다.”
“하지만…”
“더 잃을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요. 스승님이 죽기 위해서는 그 녀석이 필요합니다. 온 세상에서 스승님을 죽일 수 있는 것은 마왕뿐이에요.”
불사신은 고뇌했다.
소중한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죽고 싶다는 소망 사이에서.
“제가, 1000년간 바라 왔던 당신의 죽음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나는…!”
똑, 똑, 똑.
일정한 간격을 두고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령사, 라헬 피스본 님 계십니까?”
누가 이 중요한 순간에 방해를…!
“네, 저 맞는데요?”
“어휴. 본가에도 안 계시고 촌장님 댁에도 안 계시고, 촌장님이 이곳에 계실지도 모른다고 해서 여기로 왔는데, 계셨군요. 다행입니다.”
“근데 누구시죠?”
“잠시 문 좀 열어 주시겠습니까, 하하.”
중요한 순간을 방해받아 화가 났지만, 순순히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나는 경악했다. 왜냐하면…
“반갑습니다, 정령사 라헬 피스본.”
뾰족한 귀, 풀의 냄새… 문을 두드린 남자는 ‘엘프’였다.
엘프가 어째서 이곳에…?
“당신을 엘피디언 아카데미에 초대합니다.”
……네?
* * *